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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Jul 10. 2023

21. 토르와 황금갈기-셋 : 당신은 진상 손님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오딘, 흐룽그니르, 토르의 술잔

#. 당신은 진상 손님


 흐룽그니르가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제 아무리 흐룽그니르가 요툰헤임에서 이름난 전사라고 해도, 한 순간에 적지(敵地)인 '아스가르드(Asgarðr : 아사 신들의 울타리)'에 홀로 떨어진 꼴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정신을 차린 흐룽그니르가 소리쳤다.


[젠장! 내가 비열한 신에게 속았구나! 오딘! 날 죽일 셈이냐!]

[죽여? 누가? 내가? 자네를?]


 오딘이 장난스레 되묻더니 이내 크게 웃었다.


[하하~ 자네가 많이 놀랐나 보구먼. 아니야. 그냥 좀 심심해서 정말로 산책을 나갔던 거라네. 그러다 자네를 만나 달리기 시합까지 하게 된 거고.]


 오딘의 대답에도 흐룽그니르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오딘이 슬레이프니르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난 지금 기분이 아주 좋다네. 자네와 더불어 모처럼 신나게 달릴 수 있어서 말이지. 아, 그 녀석은 자네가 자랑할 만하더군. 내 슬레이프니르가 이렇게 땀을 흘리게 만든 상대는 거의 없었거든. 이 녀석도 그 녀석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흐룽그니르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자, 오딘이 만면이 미소를 가득 담아 말했다.


[그렇지! 이리 오래 말을 탔으니, 자네도 그 녀석도 목이 마를 테지. 어떤가? 내 지루함을 풀어준 자네에게 내가 술 한잔 내어줌세. 아, 결코 다른 뜻은 없어. 오늘 함께 말을 달려준 친구를 술 한잔 먹여서 보내고 싶은 거니까. 아스가르드에서 자네의 안전은 나, 오딘이 보장하지! 자, 가세나!]


 흐룽그니르는 여전히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아스가르드에 들어선 길이라 혼자 힘으로 돌아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오딘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하자, 그제야 흐룽그니르는 마지못해 오딘을 따라나섰다. 오딘은 흐룽그니르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발라스캴프(Valaskialf : 죽은 자의 선반, 오딘의 전당)'로 향했다. 흐룽그니르는 처음에는 불안함을 거두지 못했지만, 발라스캴프로 가는 동안 마주친 이들 중 그 누구도 흐룽그니르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흐룽그니르의 불안함은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오딘이 웃으면서 자신을 대접한다고 하니 슬몃 기대감도 생겼다. 발라스캴프에 도착하니 오딘의 시종들이 마중을 나왔다. 오딘은 슬레이프니르에서 내려 시종에게 말고삐를 건넸다.


[저 친구의 말도 같이 데려가서 개운하게 씻겨주고, 맛난 걸 충분히 먹이거라.]


 흐룽그니르도 조심스레 굴팍시에서 내려, 쭈뼛거리며 오딘의 시종에게 말고삐를 건넸다. 오딘은 흐룽그니르를 데리고 발라스캴프의 홀로 들어섰다. 발라스캴프의 홀은 넓고 높았다. 발라스캴프는 천장이 은으로 만들어져 홀의 내부는 천장에 반사된 빛으로 더욱 하얗고 반짝거렸다. 홀 안에는 이미 연회 준비가 되어있었고, 여러 신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딘이 아스가르드를 떠나기 전, 자신의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준비시켜 두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마침 토르는 일이 있어 잠시 아스가르드를 떠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흐룽그니르는 이 자리에 서있지 못했을 것이다. 오딘은 자신의 자리로 향하며, 시종에게 흐룽그니르를 손님의 자리로 안내하게 했다. 흐룽그니르가 오딘의 자리 아래에 준비된 자리에 서자 오딘이 술잔을 들고 말했다.


[이 거인은 흐룽그니르라는 녀석이지. 그쪽 동네에서는 힘도 좀 쓰고 말도 잘 타는 친구라더군. 요툰에서 왔지만 오늘은 내 손님이라네. 그러니 모두 너무 경계하지 마시게나. 오랜만에 말을 달렸더니 목이 마르군. 자, 모두 술잔을 드시오! 모두 흥겹게 마셔봅시다! 건배!]


 건배를 제안한 오딘이 먼저 시원한 미드가 담긴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자 모인 신들도 건배를 외치며, 술을 마셨다. 흐룽그니르도 얼결에 술잔을 들어마셨는데, 더없이 시원하고 맛있는 술이었다. 갈증이 심했던 흐룽그니르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딘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아스가르드는 손님 접대가 소홀한 법이 없다네. 걱정말고 얼마든지 마시게. 술은 넘쳐나도록 많으니까!]


 흐룽그니르가 술잔을 비우자, 시종이 다가와 흐룽그니르의 술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흐룽그니르의 탁자에는 술과 음식이 가득했고, 먹다 모자란 것은 금세 다시 채워졌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홀 안에 가득했고 오딘과 신들은 흥겹게 먹고 마셨다. 이제 완전히 경계심을 풀은 흐룽그니르도 분위기에 취해 흥겹게 먹고 마시며 연회를 즐겼다. 그런데 연회가 무르익어가자, 슬슬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흐룽그니르가 경계심을 내려놓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분위기에 취해 아주 기본적인 것까지 내려놓아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목이 말라서 한 잔, 맛이 좋아서 한 잔, 그리고 또 한 잔. 빈 술병이 늘어가고, 들이킨 술잔이 늘어가면서 흐룽그니르는 술에 취해 점점 무례하게 굴기 시작했다. 온몸이 벌겋게 된 흐룽그니르가 술잔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다가 그만 잔을 부숴버리고 말았다.


[어? 잔이 없네? 오딘! 노인장~ 여기 잔이 없다고요~ 잔 줘요~ 더 큰 걸로~ 헤헤~]


- 바이킹의 뿔잔, 토르의 술잔도 이런 모습이었을지도.(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소장,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demeeschter/ )


 흐룽그니르가 헤헤거리자, 분위기에 취한 오딘은 문득 흐룽그니르가 어디까지 마실 수 있나 궁금해졌다. 오딘은 곁에 있던 발키리에게 '토르의 술잔'을 가져오게 했다. 이것은 토르의 연회용 술잔으로 발키리도 간신히 들만큼 커다란 술잔이었다. 술잔이 얼마나 큰지 오딘은 물론, 로키도 도저히 한 번에 들이켤 수 없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토르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토르는 부재중이었고, 오딘은 기분이 좋았다. 발키리는 토르의 술잔을 흐룽그니르의 앞에 내려놓고, 술잔 가득하게 술을 따랐다.  흐룽그니르는 눈을 크게 뜨더니 그대로 숨도 쉬지 않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번에 마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흐룽그니르는 술잔의 술을 모두 비워버렸다.


[크아아~ 조옿타! 헤헤~ 아~ 신난다~! 한 잔 더~!]


 오딘과 연회를 즐기던 신들 모두 혀를 내둘렀다. 술에 취했는지, 흐룽그니르는 곁에서 술을 따라주는 발키리에게 추파를 보내는 것도 모자라 은근히 희롱을 하기 시작했다.


[만땅~ 만땅~ 가득~ 가득~ 채워 주세용~ 케헤~ 자, 마시자구! 에~ 피 같은 술~! 완샷! 와안샷~!]


 흐룽그니르는 술잔에 가득 담긴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역시 한 번에 마시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도 흐룽그니르는 술잔의 술을 비워버렸다. 그러나 흐룽그니르가 토르의 술잔에 손을 댄 것은 가장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다. 이미 한껏 취한 데다가 토르의 술잔으로 연거푸 두 번이나 잔을 비우자, 흐룽그니르는 말 그대로 술에 취해 꼭지가 돌아버리고 말았다. 흐룽그니르의 눈은 반이상 풀려버렸고, 혀도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져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에헤~ 술.. 가져.. 아니, 그러니까.. 달리란 말이야! 에~ 에~! 엄마~ 쟤가 나 보구~ 케야이~]


 흐룽그니르가 술에 취해 바닥에 퍼질러 앉아 주정을 부리자, 그 모습을 본 오딘과 신들이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그런데 흐룽그니르는 이런 신들의 웃음소리가 거슬렸다.


[에이~ 씨! 정말 시끄럽네~ 다들 저 밖으로 던져버릴꺼야~! 이헤~]


 흐룽그니르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그럼에도 신들이 여전히 웃자, 흐룽그니르는 갑자기 의자를 집어 던졌다.


[염병~! 내가 시끄럽다고 했쟎아~! 이~씨! 다 죽여버릴꺼야~씨~! 이 녀석들~~ 다 죽여버릴꺼야! 조용히 못해! 이씨!]


 순간 거대한 홀이 조용해졌다. 주위를 노려보던 흐룽그니르는 갑자기 한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는 한 여신의 앞에 멈추더니 그녀가 들고 있던 술잔을 뺏어 단숨에 들이켰다. 흐룽그니르는 여신에게 술잔을 내밀며 소리쳤다.


[야! 따라! 어서 따르라고 이 망할 년아!]


 흐룽그니르가 욕지거리를 내뱉은 여신은 신들의 공주님, '프레이야(Freyja : 여주인)'였다. 주위에 있던 신들이 이 광경을 보고는 모두 경악했다. 그제야 분위기에 취해있던 오딘도 정신을 차렸다. 오딘이 가만히 흐룽그니르를 살펴보았다. 흐룽그니르는 술에 취하다 못해, 이성을 상실한 것 같았다. 이 상태라면 흐룽그니르가 '거인의 분노(jotunnmoðr)'상태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오딘은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아차! 내가 너무 분위기에 취했구나!!)]


 너무 놀란 프레이야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주위의 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주위의 신들도 당황한 나머지 그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연회장에 있는 신들도 술에 취한 것은 마찬가지인 데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곳에는 흐룽그니르를 쉽게 제압할만한 신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여신들까지 함께 있으니 막무가내로 싸움을 벌일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아스가르드다. 아스가르드는 피를 봐서는 안 되는 '성역(聖域 : 신성한 지역)'이다. 이는 오딘도 마찬가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끌고 나가서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흐룽그니르를 데려온 것은 자신이다. 오딘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그를 손님으로 맞이했고, 그의 안전을 보장했다.


[내 이 빌어먹을 동네를 요툰헤임으로 가져가서 텃밭으로 만들어버릴 테야!!! 끅!]


 흐룽그니르가 술에 취해 소리쳤다. 그때, 한 여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술병을 들고 용감하게 흐룽그니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지닌 토르의 아내, '시프(Sif : 인척)'였다.


[어머? 술이 비었군요? 그러면 안 되죠. 내가 따라드리죠.]


 그녀는 생글거리며 흐룽그니르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마치 화산이라도 터진 듯, 취해 붉어진 흐룽그니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시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여신 중 한 명이다. 그런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술까지 따라주는데 어떻게 흐룽그니르가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흐룽그니르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이 년은 뭘 좀 아는 구마 안~ 젛아~ 내 저 년(프레이야)과 네 년은 내 첩으로 삼아주지! 하하하!]


 흐룽그니르의 주정에도 시프는 화를 숨긴 채, 다시 흐룽그니르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흐룽그니르는 헤헤거리며 시프가 따라 준 술을 마셨다. 그 사이 시프가 가만히 오딘을 바라보았다. 오딘은 시프의 의도를 알아챘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한 가지다. 아스가르드에서 피를 보지 않고, 난동을 부리는 흐룽그니르를 제압할 수 있는 '용력(勇力)'을 지닌 신은 이제 토르뿐이다. 오딘이 조용히 근처에 있는 발키리를 손짓으로 불렀다.  


[넌 몰래 나가서 토르에게 이곳의 상황을 전하고 데려오너라. 아마 지금 즈음이면 돌아왔을 것이다.]


 발키리는 그대로 몸을 낮추더니 흐룽그니르의 눈을 피해 몰래 발라스캴프를 빠져나왔다. 그녀는 곧장 아스가르드의 성문을 향해 달렸다. 지금 토르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헤임달(Heimdalr : 빛나는 집)'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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