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드 단테 Jul 11. 2023

21. 토르와 황금갈기-넷 : 진상은 손님이 아니다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오딘, 토르, 흐룽그니르

#. 진상은 손님이 아니다


 발키리는 빠르게 달려 아스가르드의 성문에 도착했다. 그녀는 곧바로 '히민뵤르그(Himinbjorg : 천상의 성)'로 들어갔다. 마침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일을 마치고 돌아온 토르가 헤임달과 함께 막 시원한 미드를 마시려던 참이었다. 토르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헤임달은 그를 맞이해 자신의 저택에서 쉬어가기를 청했다. 토르는 헤임달에게 오딘이 낯선 거인을 데리고 온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는 오딘의 손님인지라 연회장보다는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두 분, 오라버니! 마침 여기 계셨네요! 큰일이에요. 지금 손님으로 온 거인이 술에 취해서 난동을 벌이고 있어요!]


발키리는 숨을 돌릴 새도 없이 토르와 헤임달에게 발라스캴프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여동생(흔히 발키리는 '오딘의 딸들'이라고 불림)의 이야기를 들은 토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진짜! 아버지는 대체 무슨 일을 벌이신 거야!?]


 토르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발키리가 그의 뒤를 따랐다. 헤임달은 만약의 사태를 위해 경계경보를 내리고, 병사들을 대기시켰다. 이미 토르가 나선 이상, 굳이 헤임달까지 병사들을 이끌고 갈 필요는 없었다. 마음이 급한 토르는 순식간에 발라스캴프에 도착했다. 연회장으로 들어서던 토르는 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을 분노로 일그러졌고, 그의 수염은 올올이 날을 세워 일어났다.


 토르의 눈에 들어온 연회장의 풍경은 아주 가관이었다. 연회장의 탁자와 의자 등의 집기들은 부서져 나뒹굴었고, 음식과 술잔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연회의 시중을 들던 시종들과 발키리들은 한쪽에 구석에 물러서 있었다. 여러 신들은 오딘의 곁으로 모여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오딘은 아주 난감한 표정으로 토르를 바라보았다. 그런 연회장의 모습이나 오딘의 표정보다도 더 토르를 분노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연회장의 한쪽에서 웬 거인놈팽이가 술에 취해 프레이야와 자신의 아내를 희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 거인놈팽이가 붙잡고 있는 술잔은 바로 자신의 전용 술잔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토르가 흐룽그니르를 향해 괴성을 토해냈다. 토르의 외침이 연회장에 울렸고, 은으로 만들어진 지붕이 들썩거렸다. 난데없는 토르의 외침에 흐룽그니르는 깜짝 놀랐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위협적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흐룽그니르도 그만 술이 확 깨고 말았다. 토르의 존재는 거인들에게는 피가 되어 흐른다고 할 정도로 위협적이고 공포 그 자체였다. 토르의 목소리를 들은 시프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남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프레이야도 토르의 모습을 보고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시종들과 발키리들, 그리고 신들과 오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토르가 왔으니 괜찮다. 이제 이곳에서 괜찮지 않은 것은 흐룽그니르 뿐이다.


[네 놈이 감히 내 아내를 희롱해?! 그리고 겁도 없이 내 술잔에 손을 대? 널 당장 짓이겨주마!!]


 토르가 흐룽그니르를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흐룽그니르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두려움에 떨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거인도 토르에게 걸려 살아남은 역사가 없다. 그런 그가 지금 분노에 싸여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더욱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그 유명한 묠니르일 것이다. 흐룽그니르는 토르도, 묠니르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여느 거인 같았다면, 그저 최대한 빨리 숨을 끊어주기를 바랐겠지만, 흐룽그니르는 여느 거인이 아니었다. 그 순간 흐룽그니르의 마음속에서 요툰헤임의 전사라는 명성과 자존심이 눈을 떴다. 위대한 전사라는 명성은 결코 싸움을 잘하는 것으로만 붙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위기의 순간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흐룽그니르의 몸과 마음, 머리 그 모든 것은 살기 위해 그들이 지닌 모든 능력을 발휘했다. 온몸이 하얗게 질린 흐룽그니르가 토르를 향해 소리쳤다.


[머.. 멈춰! 너.. 넌 나의 머리털 하나도 건드려서는 안 돼! 난 손님이야!]

[닥쳐.]


 토르가 흐룽그니르를 노려보았고, 강철장갑은 더욱 강하게 묠니르를 쥐었다. 흐룽그니르가 다시 토르를 향해 소리쳤다.


[이, 이것이 아사 신들이 손님을 대접하는 법이란 말인가?! 너희는 손님을 불러들여 그의 목숨을 빼앗는 파렴치한 것들인가!]

[손님이 손님다워야지.]


 손님을 대접하고 그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다. 그러나 반대로 손님도 손님으로서의 예의와 품격을 지켜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다. 토르가 흐룽그니르를 노려보며 말했다.


[대체 누가 이 멍청한 녀석을 이곳의 손님이라 한 것인가?! 대체 누가 이 멍청한 녀석에게 술을 내어주고, 나의 술잔을 내주었다는 말인가!?]

[오딘이다! 난 오딘의 손님이고, 그의 이름으로 난 이곳에서 보호받는다! ]


 흐룽그니르는 호의를 제외한 모든 감정을 담아 토르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흐룽그니르의 대답에 토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 흐룽그니르의 이야기를 그린 로렌츠 프로리히의 그림(1885. 출처 : http://www.germanicmythology.com/ )


[그래서? 넌 지금 한 말을 후회하게 될 거야. 그것이 지금 너의 만행을 변호할 수 없으니까! 넌 나의 호의를 받는 프레이야를 희롱하여 울렸다! 또, 내 아내에게 술을 따르게 강요했다! 넌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내 소유에 손을 대었다! 난 너에게 그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 이것만으로도 넌 내 손에 죽어 마땅하다!]

[그.. 그렇다고 해도 넌 날 건드릴 수 없다! 이곳은 너희 '아사 신의 땅(아스가르드)'이고, 피를 볼 수 없는 '성역'이야!]


 흐룽그니르가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강변했다. 토르가 왼손을 들어 흐룽그니르에게 이리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걱정 마. 밖으로 끌고 나가서 죽여줄 테니.]


 역시 토르에게 그런 강변은 통하지 않았다. 흐룽그니르는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토르는 어떻게든 자신을 죽일 것이다. 흐룽그니르는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최후의 항변을 내뱉었다.


[머.. 멈춰! 난 지금 비무장 상태라고! 난 몸에 쇠붙이 하나 든 게 없어! 너도 전사니까 잘 알잖아!? 전사가 무기를 들지 않는 자를 죽이는 것은 커다란 불명예야! 이건 명분이 없어! 토르, 너는 아사 신들의 전사다!]


 순간 토르가 멈칫했다. 흐룽그니르는 최후의 항변을 통해 토르의 전사로서의 자존심을 공략했고, 그 어떤 항변보다도 효과가 있었다. 토르가 멈칫하는 것을 본 흐룽그니르가 말을 이었다.


[.. 내.. 내가 어리석었다는 걸 인정해. 그러나 나도 요툰헤임에서는 이름난 전사야. 지금 내 방패와 내 숫돌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건 너와 싸우겠다. 허나 지금 난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 난 너에게 결투를 제안한다! 너로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 아닌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를 죽인다면, 너는 겁쟁이가 되어 전사로서 명예를 잃게 될 테니까!]


 토르가 굳이 흐룽그니르의 말을 따를 필요는 없다. 그대로 흐룽그니르를 아스가르드 밖으로 끌고 나가 죽인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토르가 흐룽그니르와 전사 대 전사로서 마주한 것도 아니었고, 흐룽그니르는 손님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르는 흐룽그니르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흐룽그니르의 말이 맞기 때문이거나, 전사로서의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쨌건, 흐룽그니르를 아스가르드로 데려와 이 사달을 만든 것은 자신의 아버지 오딘이기 때문이다. 토르는 오딘의 체면을 떨어뜨릴 수 없었다. 토르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하니 기회를 주지. 가서 네 무기를 가져다주면 되겠어?]

[내.. 내 무기는 아무나 가져올 수 없다. 토르, 지금 당신에게 정식으로 제안한다. 나는 이 길로 나의 집으로 돌아가 무장을 하고, 전사로서 당신에게 맞설 것이다. 결투 장소는 나의 땅에서 가장 넓은 곳인 '그료퉁가르드(Grjottungard/Griottunagardr : 의미 불명)'를 제안한다. 그곳은 강이 흐르는 땅이고, 결투에 알맞은 곳이다. 비록 나의 땅이지만, 성역도 아닐뿐더러 당신에게는 오히려 영광스러운 곳이 될 것이다. 어떤가? 응하겠는가?]


 흐룽그니르가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토르를 보았는데, 토르는 별로 저어하는 기색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좋다. 네가 집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에 내가 그곳으로 가겠다.]


 토르가 흔쾌히 응하자, 흐룽그니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으며 황급히 발라스캴프를 떠났다. 그는 자신의 애마, 굴팍시에 올라 눈썹이 휘날리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흐룽그니르가 떠난 발라스캴프에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적막이 감돌았다. 토르는 아내를 품에 안고 등을 어루만지며 놀란 가슴을 위로해 주었다. 토르는 말없이 오딘을 노려본 뒤, 아내와 함께 발라스캴프를 떠났다. 그러자 다른 신들도 하나, 둘 눈치를 보며 발라스캴프를 떠났다. 시종들과 발키리들은 난장판이 된 연회장을 정리했다. 그러나 오딘은 여전히 연회장의 가장 높은 자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술잔을 쥔 그의 손이 엷게 떨렸다. 오딘은 화가 났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실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계획이 틀어진 것에 대한 불만이었고, 자신을 탓하는 시선을 보낸 아들, 토르에 대한 불만이었다. 흐룽그니르가 난동을 부리는 것은 오딘이 계획했던 것이 아니다. 이 멍청한 거인이 술에 취해 난동을 부려 감히 오딘의 계획을 무산시켜 버렸다. 오딘은 흐룽그니르를 달래거나 꾀를 써서 굴팍시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이미 그건 틀어져버렸다. 아니, 계획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도중에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토르의 그 무례한 행동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를 그렇게 경멸하는 시선으로 본다는 말인가? 토르는 쉽게 끝내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일을 키우는 것인가? 이미 지닌 명성도 부족하다는 것인가? 토르는 더 큰 명성을 원하는 것인가? 감히 아들이 아버지를 뛰어넘겠다는 것인가?



#북유럽신화, #북유럽신화이야기, #오딘, #토르, #단테, #norsemyth, #dante, #흐룽그니르, #연회, #헤임달, #발키리, #프레이야, #시프, #결투, #전사, #호름강



매거진의 이전글 21. 토르와 황금갈기-셋 : 당신은 진상 손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