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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Aug 29. 2023

24. 거인 왕의 초대-둘 : 내 말 좀 들어봐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로키, 정신분열, 감금

#. 내 말 좀 들어봐


 로키는 짜증이 났다. 갑갑하고, 답답하고, 화가 났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 후회가 책갈피처럼 끼어들었지만, 그렇다고 후회나 반성에 시간을 들일 로키는 아니었다. 로키는 도저히 지금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외침을 질러댔다. 그러나 그 외침은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 외침은 로키의 머리와 가슴속에서만 크게 메아리칠 뿐이다. 그때 다른 로키가 물었다.


[어이, 대체 왜 그러는데?]

[몰라서 물어? 지금 이 꼬라지를 보고도?]


로키가 대답했다. 다른 로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음.. 자업자득?]

[자업자득? 장난해?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로키는 다른 로키를 노려보았다.  세상에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면 어쩌자는 말인가?


[헤헤.. 뭘 그렇게까지 정색을..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다른 로키가 키득거렸다. 그때 또 다른 로키가 끼어들었다.


[어라? 둘이 뭐 해?]

[아, 지금 이 꼬라지가 된 게, 누구 탓인지 따지던 중이지.]


다른 로키가 대답했다. 또 다른 로키가 대답했다.


[그걸 뭘 따져? 다 다른 놈들 잘못이지. 로키는 절대 잘못이라는 걸 하지 않아.]

[그치?! 그렇지!?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로키가 '득의양양(得意洋洋 : 매우 만족스럽고 기쁨을 뜻하는 사자성어)'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른 로키가 말했다.


[이봐, 앞뒤를 좀 보고 결론을 내려야지. 어이, 로키. 어떻게 된 건지 이 녀석에게도 말 좀 해줘.]

[쳇! 쉽게 물러서지 않는구먼. 알았어! 알았다고. 어떻게 된 건지 다시 말해주지.]


로키의 앞에 다른 로키와 또 다른 로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로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잘 들어봐. 이건 듣는 이도, 말하는 이도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아주 억울한 이야기니까. 며칠 전.. 인지는 모르지만. 여튼! 난 말이지, 아주 심심했어. 너희도 잘 알지? 내가 심심한 거 못 참는 거. 세상은 평온하지, 난쟁이 놈들은 여전히 지 잘난 맛에 기어오르지.. 마누라랑 노는 것도 재미없고, 애들은 지들끼리만 놀더라고.


 하다 못해 토르랑 술이라도 한잔 할라치면~ 이 녀석이 워낙~ 바쁘셔서 어디 술 한잔 제대로 할 틈이나 있어야지. 토르는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다가 집에 오면 애를 보느라 정신이 없더라고. 하아~ 친구라고 있는 게 그 모양이니.. 얼마나 한심하던지.]

[그럼 토르랑 술을 못 마셔서 이렇게 된 건가?]


또 다른 로키가 끼어들었자, 로키가 짜증을 냈다.


[야! 말 끊지 말라고! 그냥 닥치고 들어!]

[아.. 오키.]


로키가 또 다른 로키를 살짝 째려본 뒤 다시 감정을 잡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게다가 말이야! 더 짜증 나고 화가 나는 건 토르는 그런 와중에도 지 혼자만 모험을 즐기면서 신이 났더라고! 아니, 그게 말이 돼? 쓰림 때도 그렇고, 우트가르드 때도 그렇고.. 대체 누가 도와줬냐고! 그런데 그 은혜도 모르고 말이지.. 하, 친구라고 있어봤자 다 소용없더라. 그 오딘도 뻘짓은 했지만, 심심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 다들 그랬어! 다들 지들만 재미있었지! 나만 심심했다고! 나만! 이 아홉 세상에서 빌어먹을 나만 심심했다고!!


 .. 하아. 일단 마음을 좀 진정하고. 왜, 스스로 구원하라는 말이 있잖아? 그래서 말이지, 난 뭔가 재미난 꺼리가 없을까 궁리를 좀 했지. 그러다가 이 오살할 놈의 거인 놈들을 좀 놀려주면 재미있겠다 싶은 거야. 패배의 비참함에 빠져 허우적대는 놈들은 놀려줘야 제맛이니까. 아주 좋은 계획이었지. 아마 다른 놈들 같았으면, 그대로 요툰헤임으로 갔다가 놀리기는커녕 두들겨 맞았겠지만.. 내가 누구야? 나 로키잖아? 이 현명한 로키님은 아주~ 안전하게 거인 놈들을 놀려줄 계획을 세웠지. 난 정체를 숨긴 채 마음껏 놀려줄 수 있지만, 이 오살할 놈의 거인 놈들은 날 어쩌지 못할 계획을 말이지. 그래, 아주 완벽한 계획이었어.]

[완벽하다고?]


 이번에는 다른 로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로키가 다른 로키를 째려보았다. 다른 로키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 미안. 계속해.]

[쯧! 그래서 난 프레이야에게 갔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매의 날개옷(fjaðrhamr : 깃털 외투)'이 필요했거든. 몇 번 입어보니 이거 참 물건이더라고. 매로 변신하는 게 어찌나 감쪽같은지, 마법으로 변신하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 거기다 프레이야의 향긋한 냄새까지 베여있어서.. 쿨럭.. 아니 이건 넘어가고.. 여튼 프레이야에게서 매의 날개옷을 빌려서..]


그때 또 다른 로키가 다시 끼어들었다.


[헐! 프레이야가 그 옷을 너한테 그냥 빌려줬다고?! 드디어 프레이야가 미친 건가?!]

[.. 야, 너 말 그따위로 할래? 내가 뭐? 뭐 어때서? 쯧. 이번에는 오딘을 좀 팔았지. 오딘이 은밀하게 정탐꾼을 보내는데 필요하다는 핑계를 댔더니 빌려주더라고. 뭐, 좀 째려보긴 했지만 말이야. 근데 프레이야가 그 째려볼 때의 그 표정 말이지~ 이야~ 어떻게 째려보는 것까지 예쁘냐? 하아.. 정말 예쁜 건 타고났어. 응.]


로키가 프레이야의 표정을 떠올리는지 얼굴에는 엷은 홍조까지 띄었다. 그러자 다른 로키가 재촉했다.


[야, 이야기나 계속해.]

[아. 오키. 난 매의 날개옷을 입고 매로 변신을 했지. 그리고 요툰헤임으로 날아갔어. 그런 다음은~ 아주 제대로 거인 놈들을 놀려줬지. 하늘을 날면서 큰 소리로 비아냥거리고, 놀리고.. 욕을 하는데 속이 어찌나 시원하던지. 진짜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더라니까? 뭐, 거인 놈들이라고 가만히 있진 않았어. 화를 내기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하고.. 아! 그중에는 창을 던지고, 활을 쏘는 놈들도 있었지. 그런데 내가 그런 거에 맞을 놈은 아니거든. 내가 날고 있는 높이까지는 오지도 못하더라고? 버러지 같은 것들..


 그래서 더 작정하고 놀려줬지. 큭큭.. 아, 정말 신났어. 이 놈들은 창도, 활도 소용이 없게 되자 아무것도 못하더라고. 그나마 한다는 게 자리를 피하거나 귀를 틀어막는 정도였지. 진짜 모지리도 이런 모지리들이 없어. 아니.. 그 놈들도 나랑 같은 핏줄인데 어떻게 그렇게 무능할까? 이건 씨도둑질을 하지 않고서는 저렇게 무능할 수가 없지. 그럼.]

[그랬던 게 어쩌다 이 꼴이 된 건데?]


또 다른 로키가 물었다.


[하아.. 그게 참..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지. 응. 아주 억울한 일이야. 들어봐, 그렇게 신이 나서 요툰헤임을 도는데, 꽤 큰 집이 보이는 거야. 보아하니 근처에서 똥방귀 좀 뀌는 놈의 집 같더라고. 그래서 날개를 좀 쉴 겸 그 집 지붕 위에 앉아서 주변을 좀 살펴봤지. 예상대로였어. 집이 꽤 크고, 하인도 많이 거느리고 있더라고. 집주인으로 보이는 놈팽이가 한가로이 정원에서 딸내미들하고 앉아서 놀고 있더라? 내가 또 그런 꼴을 가만히 보아줄 로키 님이 아니시지.


 그래서~ 다시 놀려주기 시작했어. 근데 그 놈팽이가 은근 잘 참는 거 있지? 그래서 조금 방법을 바꿨지. 이번엔 사돈에 팔촌에.. 백대조(代祖) 할아버지까지 싸잡아서 놀리고 욕을 해줬지. 그제야 이 놈팽이가 좀 반응을 보이더라고. 화가 났는지, 하인을 부르더라? 하인이 지붕 위를 보더니 어딘가로 막 달려가데? 가는 꼴을 보니 사다리를 가지러 가는 것 같더라고. 바보 같은 것들!


 뭐, 도망갈 시간은 충분해 보였지. 그래서 그 하인 놈이 사다리를 가져올 때까지 좀 더 지붕에서 쉬기로 했어. 그동안 이번에는 천대조 할아버지까지 싸잡아서 놀리고 욕을 해줄 셈이었지. 그런데..]

[그런데?]


또 다른 로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놔.. 그때 갑자기 내 뒤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오는 거야. 어찌나 놀랐던지.. 애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가만 보니 아까 그 하인 놈이었어. 집 안에 지붕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있나보더만. 내가 그걸 못 봤지. 오호.. 통제라.. 난 황급히 날아올랐지. 그런데 그 하인 놈이 내 발 하나를 붙잡은 거야! 난 나머지 발로 이 하인 놈의 손을 긁어댔지. 그런데 이 하인 놈이 평소에도 좀 두들겨 맞아봤는지, 잘 견디더라? 게다가 밭일도 좀 했는지, 어찌나 우악스럽게 잡는지 당췌 이 하인 놈의 손을 떨궈내기 힘들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된 거 아예 이 하인 놈을 달고 높이 날아올라가자고 생각했어. 제까짓 놈이 높이 올라가면 겁을 먹고 떨어지겠지 하고. 그런데.. 그게 오판이었어. 이 오살할 놈에게 뭘 멕였는지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달고 올라갈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또 다른 로키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 붙잡힌 로키, 윌리 포가니 그림(1917.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 )


그러자 로키가 발로 땅을 구르며 짜증을 냈다.


[그래서는 뭔 얼어 죽을 놈의 그래서야!?... 그러다 이렇게 붙잡힌 거지.]


로키는 침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다른 로키가 또 다른 로키를 보며 말했다.


[들었지?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야.]

[허허.. 참.. 이거.. 억울하겠네.]


또 다른 로키가 허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른 로키가 또 다른 로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그건 아니지. 로키, 이 녀석이 지가 뻘짓하다가 붙잡힌 거라고.]

[흠.. 글쎄다?]


그런데 또 다른 로키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다른 로키가 동그랗게 된 눈으로 또 다른 로키를 쳐다보았다.


[에?]

[뭐, 로키 이 녀석이 실수를 좀 한 건 맞긴 맞는데.. 그 원인을 좀 따라가 보자고. 잡힌 건 잡힌 거니 그건 지금 생각할 필요 없어. 생각해 봐. 로키가 이 지경이 된 건 다 심심해서 그렇잖아? 그럼 로키에겐 잘못이 없어. 다 로키를 심심하게 냅둔 놈들이 잘못인 거라고. 오딘도 그렇고, 마누라도 그렇고.. 애새끼들도 그렇고.. 누구 하나 로키를 잘 챙겨줬음 이런 일은 없었지.


 특히, 토르. 지 혼자만 재미 보고 다녔지, 가장 절친한 로키를 챙겨주기나 했냐고? 거기다 지금도 봐. 로키가 이 꼬라지로 고생하는데, 그 놈들 중에서 누구 하나 로키를 찾으러 오는 놈이 있기는 하냐고? 안 그래?]


또 다른 로키가 로키와 다른 로키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그.. 그런가?]

[거봐! 이 녀석은 내 말뜻을 알 거라고 생각했다니까! 봐, 내 말이 맞잖아?!]


또 다른 로키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로키는 다시금 득의양양하게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이 웃음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 호쾌하고, 즐거운 웃음소리는 오직 로키에게만 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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