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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Aug 30. 2023

24. 거인 왕의 초대-셋 : 포로가 된 로키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로키, 게이르뢰드, 계약

#. 포로가 된 로키


 로키는 눈꺼풀 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참을 떠들었지만.. 그 모든 것은 로키의 머리와 마음속에서 벌어진 일. 로키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줌의 빛도 없이 사방이 꽉 막힌 곳이라 시간의 흐름도 알 수 없었다. 이곳은 로키가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너무 좁았고, 숨을 쉬는 것도 갑갑했다. 로키는 매로 변한 모습 그대로였다. 하인에게 붙잡힌 로키는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매로 변한 로키의 발톱에 팔을 잔뜩 긁힌 하인은 땅으로 내려오자마자 로키의 발을 붙잡고 몇 번인가 땅바닥에 내리쳤다. 로키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가 이 비좁은 공간에서 정신을 차렸다. 상황을 살펴보던 로키는 벽을 부리로 긁어보았는데 나무로 만든 상자 같았다. 로키는 몸으로 부딪혀 보려 했지만 상자 안의 공간이 너무 좁아 별 소용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로키는 변신을 풀고서라도 이 상자를 부수려고 해 보았지만,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것인지 도무지 변신을 풀 수도 없었다. 로키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로키는 자신이 이곳에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누구도 로키를 찾아오지 않았다. 신들의 구출은 고사하고, 로키를 이곳에 가둬 둔 거인이나 하인의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나간 것은 그 와중에도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한 로키의 몸부림이었다. 시간은 더 흘러갔고, 이런 로키의 몸부림도 무색해지는 것 같았다. 로키는 목마름이나 배고픔도 느끼지 못했고, 점차 모든 의욕과 기운을 상실해 갔다.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났을까? 로키는 작은 빛이 느껴졌다. 그것은 상자의 위쪽에서 들어왔다. 로키가 고개를 들어보니 상자의 위쪽으로 아주 작은 틈이 열렸다. 그 작은 틈사이에서 이 상자에 갇힌 뒤, 처음으로 누군가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숨소리만 들렸다. 로키는 다시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로키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 것 같았다. 그는 로키가 백대조 할아버지까지 들먹이며 놀려댔던 거인일 것이다. 거인이 상자를 만지는 것인지 상자의 위로 무언가 손길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로키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거인이 말했다.


[이봐, 로키. 죽은 척은 그만해. 자네가 정신을 차린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로키는 내심 놀랐지만, 거인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자 거인이 웃었다.


[큭큭.. 그 주둥아리를 좀 더 놀려보셔야지?]


거인의 웃음소리를 듣던 로키가 반응했다.


[.. 그냥 죽여. 장난질하지 말고.]

[하하! 제대로 사기를 치는군! 이봐, 죽을 생각 따윈 없잖아?]


로키의 말에 거인이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로키가 물었다.


[.. 네.. 네 놈이 원하는 게 뭐야?]


이번에는 거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로키는 퀭한 눈으로 상자 위쪽의 틈을 노려보다가 힘을 짜내며 말했다.


[장난질은 그만해! 네 놈이 원하는 게 있으니, 그러니 날 이런 꼴로 가둬둔 것일 테지. 피차 시간 끌지 말고!]

[하하! 직설적이군. 난 좀 더 이런 식의 여흥을 즐기고 싶은데 말이야.]


거인이 크게 웃었다. 로키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랄 그만 떨고, 제대로 대답을 해! 알았으니까, 내 몸값으로 뭘 원하는지 말하란 말이야!!]

[흠. 조금 아쉽지만, 자네를 불쌍히 여겨 협상에 응해주겠네. 그럼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지. 난 '게이르뢰드(Geirrøðr : 창에 의한 평화)'라고 해. 이 근처 거인들의 왕이야. 내 조건은 간단해. 네 녀석이 토르를 꼬득여서 내 집으로 데려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게이르뢰드가 웃음기를 거두며 대답했다. 지금은 모든 거인들이 토르라면 벌벌 떨며 꽁무니를 빼는 상황인데, 토르를 데려오라니.. 게이르뢰드의 조건을 들은 로키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토르를?]

[응. 토르만 데려오면 되는 거야. 아주 간단하지. 물론 약간의 부가적인 조건이 붙긴 하지만 말이야.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야. 토르의 망치와 그 녀석의 허리띠 없이 맨몸으로 여기까지 데려오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지.]


- 로키와 협상 중인 게이르뢰드, 요하네스 게르트 그림(1885. 출처 : https://throwbackthorsday.wordpress.com )


 게이르뢰드의 말에 로키는 얼굴을 찡그렸다. 토르의 망치라면 수많은 거인들을 강제로 요툰헤임으로 이주시킨(죽인) 묠니르일 것이다. 토르의 허리띠는 '메긴교르드(Megingjorð : 힘이 나오는 허리띠)'라고 하며, 단지 허리에 차고 있는 것만으로 힘을 두 배로 늘어나게 하는 능력을 지닌 마법의 허리띠였다. 로키는 게이르뢰드의 목적을 알아챘다. 게이르뢰드는 토르를 죽일 셈인 것이다. 로키는 갈등에 빠졌다. 지금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게이르뢰드의 조건에 응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죽음으로 모는 일이다. 갈등에 빠진 로키는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을 느꼈다.


[네가 이 지경이 된 건 다 심심해서 그렇잖아? 그럼 로키에겐 잘못이 없어. 다 너를 심심하게 내버려둔 놈들이 잘못인 거라고. 오딘도 그렇고, 마누라도 그렇고.. 애새끼들도 그렇고.. 누구 하나 너를 잘 챙겨줬음 이런 일은 없었지. 특히, 토르. 지 혼자만 재미 보고 다녔지, 가장 절친한 친구인 너를 챙겨주기나 했냐고? 거기다 지금도 봐. 네가 이 꼬라지로 고생하는데, 그 놈들 중에서 누구 하나 로키를 찾으러 오는 놈이 있기는 하냐고? 토르도 그렇고. 안그래?]


바로 스스로와 나눈 대화가 다시금 마음속에서 속삭였던 것이다. 순간 로키의 표정이 변했다.


[(그래, 토르! 그 녀석이 가장 나쁜 놈이야! 내가 이 꼴이 되었는데도 구하러도 오지 않잖아?! 그런 게 무슨 친구야? 안 그래? 그래! 어차피 난 이 놈에게 토르를 데려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 뒤는 토르 녀석이 알아서 하던지 말던지 그건 내 알바가 아니지! 그래! 그래! 그렇다고!!)]


로키는 결정을 내렸다.


[게이르뢰드. 네 조건에 응하겠다. 그러니 날 어서 풀어줘!]

[하하! 그래야지! 그래야 로키지! 좋아, 이것으로 계약 성립이다. 이제 계약은 어길 수 없어.]


게이르뢰드가 로키가 갇힌 상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러니 날 이 빌어먹을 상자에서 꺼내달라고!]


 로키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러자 게이르뢰드는 손뼉을 치며 크게 웃은 뒤, 나무 상자를 열어주었다. 로키는 얼굴을 일그리며, 두 눈을 꽉 감았다. 밝은 빛이 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키의 예상과는 달리 아주 밝은 빛은 느껴지지 않았다. 로키가 천천히 눈을 떠보니 별 빛이 가득한 밤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시원한 밤공기도 느껴졌다. 바람을 타고 오는 밤공기는 바로 자유. 자유의 향기였다. 로키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만히 기억을 떠올려보니, 자신이 지붕에서 보았던 게이르뢰드의 저택의 마당이었다. 로키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로키는 자신을 지켜보는 눈빛들을 느낄 수 있었다. 로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날개를 활짝 폈다. 로키는 힘겹게 날개를 움직였고, 천천히 게이르뢰드의 저택 위로 날아올랐다. 로키는 비틀거리며 아스가르드를 향해 천천히 날아갔다.


 게이르뢰드는 로키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고, 그의 곁에는 그의 두 딸이 함께 있었다. 큰 딸로 보이는 여자거인이 게이르뢰드에게 물었다.


[정말 우리가 생각한 대로 움직여 줄까요?]

[걱정하지 마라. 로키는 그 이상을 해줄 녀석이니까.]

[소문을 내기를 잘했네요.]


 작은 딸로 보이는 여자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게이르뢰드는 휘청거리며 날아가는 로키를 보며 말했다.


[흐룽그니르마저 토르에게 당해버린 지금.. 우리 거인들은 저 아스가르드 놈들에게 눌려 지낼 수밖에 없다. 애초에 토르와 정면으로 싸우려고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어. 우트가르드에서 호되게 당한 토르에게 마법이 다시 통할리도 없어. 하지만 말이야. 그놈은 단순하지. 내 계략에 빠진 이상.. 토르. 그놈은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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