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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Aug 28. 2023

24. 거인 왕의 초대-하나 : 스노리의 서가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스노리

#. 스노리의 서가 : 왕궁, 청원자 대기실


 소년은 언제나 우울했다. 13살. 소년이 암살을 당한 아버지를 대신해 왕이 된 나이였다. 소년은 왕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소년은 왕이 되어야 했다. 소년은 모든 사람이 무서웠고, 매 순간 불안했다. 소년은 죽고 싶지 않았지만, 소년의 목숨은 그의 손에 들려있지 않았다. 왕국은 오랜 시간 동안 왕위를 두고 다툼이 이어졌다.


 소년은 선왕의 적자가 아닌 서자였지만, 권력을 노리던 귀족에 의해 왕이 되어야 했다. 그들은 어린 왕의 섭정과 고문이 되었다. 그들은 소년을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왕국의 권력을 탐했다. 그들의 비호하에 있었지만, 소년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소년의 목숨과 자리를 빼앗을 수 있었으니까. 소년은 언제나 불안에 떨었고, 모두를 의심했다. 이런 시간만이 계속되었다면, 소년은 진작에 미쳐버렸을 것이다.


 다행히도 소년에게는 이런 불안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만큼은 불안과 의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시간만큼은 왕이 아닌 또래의 여느 사내아이가 되었다. 그것은 소년이 한 귀족 청년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섭정과 귀족들은 소년의 교육과 놀이의 일환으로 한 귀족 청년을 소년에게 보냈다. 그는 섬에서 건너온 재기 넘치는 귀족 청년이었다. 그는 소년에게 옛날이야기에 시와 노래를 섞어가며 아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그가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소년은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였다. 이 시간은 소년이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소년왕 : 하나만! 하나만 더! 스노리! 응?


 스노리에게는 그 시간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스노리는 자신의 수염을 만지며 대기실을 둘러보았다. 대기실 안에는 스노리 이외에도 십여 명의 청원자들이 저마다 초조한 표정으로 대기 중이다. 그들 중에는 귀족으로 보이는 자도 있었고, 상인으로 보이는 자도 있었는데 스노리가 아는 얼굴은 없었다. 물론 그들도 자신들과 같이 있는 이 나이 든 남자의 얼굴을 아는 자는 없었다.


 그들이 이 나이 든 남자가 한때 '섬의 주인'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예전 같았다면 스노리가 이들과 함께 대기실에 있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노리는 착잡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스노리에게는 하루라도 빨리 귀환하는 것이 중요했다.


- 하콘 4세, BBC 다큐멘터리 '바이킹들의 마지막 전투' 중에서(출처 : www.bbc.co.uk )


 형과 조카의 죽음을 들은 스노리는 다음 날, 곧바로 왕궁에 정식으로 왕의 알현을 요청했다. 상황이 변했으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스노리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스노리는 그대로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친분이 있는 여러 귀족들을 찾아가 부탁했다. 다행히 스노리는 알현이 아닌 청원대기자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스노리는 내심 실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현은 아니지만 어쨌건 왕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얻었다. 스노리는 왕이 자신을 본 다면, 반드시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왕과 이야기를 할 기회만 얻는다면.. 왕은 반드시 오해를 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섬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희망. 스노리는 한 조각의 희망을 품었다. 평소의 스노리 답지 않았지만, 지금의 스노리는 그것이 악마의 손길일지라도 이 희망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스노리의 희망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알현과 청원은 다르다. 알현이 받아들여지면, 직접 왕을 만날 수 있고 왕과의 대화도 가능하다. 그러나 청원은 그것이 쉽지 않았다. 청원자들이 왕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적었다. 청원은 왕의 일정이나 건강, 왕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었다. 알현이 가능한 것은 상당한 지위가 있거나,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해당되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청원을 해야 했는데, 대부분의 청원은 왕에게 보고조차 되지 않았다.


 수많은 청원자들 중에서 아주 소수만이 청원대기실에 들어갈 수 있다. 청원자들 중에서도 잘해야 한 두 명 정도가 왕이나 왕의 측근에게 청원 내용을 전할 수 있었다. 그것도 왕이 집무를 보고 돌아가는 복도에서 인사를 하는 형태로 아주 짧게 왕이나 왕의 측근을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역시도 당연히 왕궁에 인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천하의 스노리가 이런 요행에 희망을 걸어야 했다.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청원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스노리는 서둘러 청원대기실의 문 밖으로 나갔다. 스노리는 다른 청원자들과 함께 복도에 나란히 섰다. 왕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노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별처럼 눈을 반짝이던 소년은 이제 서른 중반을 넘긴 사내가 되었다. 그 시간 동안 권력에 대한 욕망은 소년을 권력과 탐욕으로 가득한 정치꾼으로 만들었다.


 스노리는 왕을 바라보았는데, 이내 시종의 매서운 눈길이 느껴졌다. 스노리는 다른 청원자들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제 청원자들의 청원을 듣는 것은 오직 왕의 마음에 달려있다. 스노리는 왕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왕이 복도를 걸어 청원자들에게 가까워지자, 스노리는 다른 청원자들보다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불경스러운 일이었지만, 스노리는 왕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스노리의 바람은, 그의 희망은 깨져버렸다. 왕은 의도적으로 스노리를 못 본 척했다. 왕은 걸음을 살짝 옆으로 옮겨 그대로 스노리의 앞을 지나갔다. 스노리는 손을 뻗어 왕의 망토를 잡으려 했지만, 왕의 시종이 황급히 다가와 스노리를 밀어냈다. 왕은 청원자들 중 그 누구의 청원도 듣지 않고 복도를 빠져나갔다. 스노리는 왕의 뒷모습을 보며, 왕의 시종들에 의해 왕궁 밖으로 끌려나갔다. 왕궁 밖으로 쫓겨난 스노리는 한동안 왕궁을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노을은 왕궁의 지붕을 붉은색으로 물들였고, 스노리의 눈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스노리는 몸을 돌려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스노리 : 나는 돌아갈 것이다.(Út vil ek.)


- 하콘의 인장, 영국에서 선물을 받은 인장임(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aakon_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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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일이 추가되서 복귀가 조금 늦었습니다.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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