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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Apr 08. 2024

31. 발드르의 장례식 : 둘 - 아, 발드르

북유럽신화, 북유럽신화이야기, 오딘, 프리그, 발드르

#. 아, 발드르

 아스가르드는 슬픔과 적막에 휩싸였다. 아스가르드가 세워진 이래로 이렇게 슬픈 날은 없었다. 발드르의 시신은 수습되어 발할라로 운구되었다.  발드르의 심장을 꿰뚫은 겨우살이 나뭇가지로 만든 창은 뽑혀져 불에 태워졌다. 그의 몸은 씻겨졌고, 프리그가 그를 위해 만들어 둔 새 옷이 입혀졌다. 발할라의 넓은 홀 한가운데 자리가 마련되고 발드르의 시신이 안치되었다. 발드르는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미소를 짓던 모습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 모습은 죽은 자라고는 믿겨지지 않았고, 그저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발할라에 모인 신들의 마음은 더욱 아프고 슬펐다. 그들 모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발드르 곁에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 프리그와 난나가 발드르를 보며 흐느끼고 있었기에.


  발할라의 적막 속에 프리그의 낮은 흐느낌이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그녀는 비통한 가운데에서도 한가닥 희망을 놓지 않았다. 헤르모드. 막내아들 헤르모드에게 그녀는 자신의 모든 기대와 희망을 걸었다. 그 기대와 희망으로 그녀는 찢어져 나갈듯한 가슴을 간신히 움쳐잡고 버티고 있었다. 이는 난나도 마찬가지였다. 난나에게서도 희망이라는. 그 처절하도록 향기롭고, 아름다우면서 비열한 그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니, 비단 프리그와 난나만은 아니었다. 신들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희망이 내려준 동앗줄을 붙들고 있었다. 심지어 거인들은 물론이고 세상 만물의 사랑을 얻었던 발드르다. 어쩌면 헬이 발드르를 돌려보내 줄지도 모른다. 세상이 탄생하고, 죽은 자가 살아돌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발드르는 우리는 그런 하등한 목숨과는 다르다. 우리는 신이다. 그렇게 신들도 바닥에 주저앉아 프리그와 난나의 곁을 지켰다. 하루. 이틀. 비탄에 잠긴 채 무의미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지만, 헤르모드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비탄에 잠긴 이 긴 침묵을 깬 것은 오딘이었다. 이미 모든 것이 운명이 짜놓은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오딘에게는 희망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오딘에게는 더이상의 미련도, 그 무엇의 희망도 없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는 아스가르드의 그 어떤 신보다도 현실적인 신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희망따위에 의지해 그것에 미련을 둘 오딘이 아니다. 이미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되었다. 그렇다면 충분하다. 지금까지 기다린 것은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와 며느리에 대한 오딘의 연민이었다. 사흘째가 되자, 오딘은 자신의 지팡이를 단단히 잡고 일어섰다. 그는 신들의 아버지이며, 세상의 주인이다. 그는 아스가르드와 세상을 운명이라는 거대한 적으로 지켜내야하는 신들의 왕이자, 세상의 전사였다. 오딘은 낮으면서도 위엄서린 목소리로 아내와 며느리, 모든 신들에게 말했다. 


 [일어서라. 나의 아내여! 나의 며느리여! 나의 형제들과 나의 아들들, 그리고 나의 딸들이여! 모두 일어서라. 더이상 비탄에 잠기지 말거라. 발드르는 떠났다. 더이상 간악한 운명의 노랫소리에 빠지지 마라! 이제는 눈물을 거두어라! 그대들의 가슴이 슬픔에 찢어딘다고 한들, 내 그대들 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 이런 내가 이렇게 건재하게 일어서거늘, 그대들은 어찌 슬퍼만 하는 것인가?!]


 오딘의 하나 밖에 없는 눈이 푸른 빛을 내며 번뜩였고, 신들은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신들은 마음을 다잡으며 풀려버린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나, 둘 신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오딘과 발드르의 시신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오딘은 자신의 옥좌에 앉아 신들의 얼굴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몸은 일으켰지만, 신들의 얼굴은 마치 헬의 노예들 만큼이나 수척해보였다. 그러나 프리그와 난나는 발드르의 곁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오딘이 노기가 담긴 눈으로 프리그와 난나를 바라보았다. 황급히 풀라와 린, 시녀들이 프리그와 난나에게 다가갔다. 그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난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프리그는 그녀들의 부축을 뿌리쳤다. 프리그는 일어서는 대신 붉게 충혈된 눈으로 오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담긴 깊은 슬픔과 달리 오딘의 그것은 어느때 보다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프리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풀라와 린이 다시 프리그를 부축했고, 그제야 프리그도 몸을 일으켰다. 오딘이 신들을 돌아보더니 명령했다. 


[장례식을 준비하라.]


 신들은 놀란 눈으로 오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이 이토록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장례식. 지금까지 아스가르드에서 신의 장례식이 열린 적은 없었다. 신들 중에서 아스가르드에서 죽은 자는 없었기에. 무엇보다도 발드르의 장례식은 다른 존재의 장례식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발드르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신들의 영광이 사라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신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영광을 묻어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그리고 신들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헤르모드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렇다는 것은 발드르가 되살아날 가망성이 아직은 남아있다는 것이다. 지엄한 오딘의 명령에도 당연히 신들은 주저할수 밖에 없었다. 그런 신들 사이에서 강한 항의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프리그였다. 


 [오딘!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요? 난 당신의 말을 믿을수가 없습니다. 우리 아들.. 우리 발드르를 어떻게 하라구요?! 내 아들의 장례식 이라니, 난 받아들일수 없어요! 나, 프리그는 당장 그 명령을 거둘 것을 요구합니다!]


 프리그의 반발은 너무도 당연했지만, 오딘은 그녀의 반발을 받아들일 의향이 없었다. 오딘은 옥좌에서 일어나 계단을 걸어내려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프리그는 풀라와 린의 부축을 뿌리치며 오딘에 맞섰다.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오딘의 차가운 눈을 노려보았다. 오딘과 프리그 사이에 험악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어떤 미동도 하지 않는 오딘을 보던 프리그는 그만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제발.. 제발 간청합니다. 나의 남편이여.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막내가.. 헤르모드가 발드르를 구하기 위해 니블헤임으로 갔어. 그 아이가.. 우리 큰 애를 데리고 올때까지만.. 제발.. 제발..]


프리그는 이내 오딘의 망토를 붙잡고 울며 매달렸다. 


[안돼! 안돼! 안돼! 난 이렇게는 못보내.. 당신 아들이야.. 당신도 그 애 아버지잖아!! 어떻게 그래? 아니,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이래!! 신들의 아버지? 신들의 왕? 그게 뭔데!! 당신이 뭔데, 그 애를 보내라 마라 하는거야?! 당신이 뭔데!! 당신이 뭔데 나에게 내 새끼를 보내라 마라 그래!! 그러고도 당신이 아빠야? 그러고도!!!!! 으흐흑... 아들아... 발드르.. 내 아들아...!]

 

 오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더욱 차가운 눈으로 프리그를 내려볼 뿐이었다. 오딘의 그 차가운 눈빛에 프리그는 무언가 알수 없는 고함을 지르며 바닥으로 온 몸을 내던졌다. 미친듯이 손으로 차가운 돌바닥을 긁어대기도 하고, 온 몸을 바닥에 내리치며 통곡했다. 그런 프리그의 모습을 보며 신들도 참았던 슬픔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고, 비탄에 잠긴 탄성이 터져나왔다. 난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다 그대로 혼절해버리기 까지 했다. 


- 발드르의 죽음, 크리스토퍼 빌헬름 에커스버그 그림(1817,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The_Death_of_Balder)


 이 모습에 오딘은 분노했다. 오딘은 지팡이를 들어 바닥을 내리쳤다. 마치 온 세상에 천둥이 치듯, 거대한 천둥소리같은 것이 울려퍼졌다. 오딘의 분노에 온 아스가르드가 다시 침묵했다. 오딘은 자신의 신성(神性)을 그대로 드러냈고, 구름처럼 부드럽던 회색빛 머리칼과 수염이 날카로운 창날처럼 싸늘하게 일어섰다. 


 [나에게 두번 말하게 하지 마라! 그것이 설령 내 아내일 지라도 나의 말에 거부하는 것은 용서치 않겠다! 모두 내 명령대로 이행하라!]

 신들은 오딘의 분노에 놀라 모두 머리를 싸잡아 쥐며 주저앉았다. 프리그도 더이상 오딘의 뜻을 거부할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프리그는 바닥에 엎드려 끅끅거리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조용히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었다. 오딘도 그런 프리그에 더이상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딘은 풀라와 린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풀라와 린은 시녀들과 함께 프리그와 난나를 부축해 펜살리르로 모셨다. 프리그와 난나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오딘은 몸을 돌렸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걸어올라갔고, 다시 자신의 옥좌에 앉았다. 신들은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제 발드르의 장례식을 막을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옥좌에 앉은 오딘은 신들을 둘러보고는 다시 명령했다. 


[장례를 준비하라. 또한, 아홉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발드르의 죽음과 장례식이 열림을 알려라. 그들은 진심으로 발드르를 사랑했노라. 우리가 그를 사랑했듯이, 그들도 그를 사랑했음이라. 발드르의 장례식에 참석을 원하는 자는 그 누구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요툰이건, 난쟁이건, 인간이건! 그 누구도 막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슬픔도 우리와 같으니, 우리는 그들과 함께 슬퍼하며, 발드르를 보낼 것이다!] 


 신들은 다시 한번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딘의 명령대로라면 지하에 사는 난쟁이들은 물론, 저 요툰헤임의 거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맞이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요툰헤임의 거인들이라면 자신들과는 불구대천의 원수들이다. 신들은 경악했지만, 자신들만으로 오딘의 명령을 어찌 거스를 것인가. 오딘이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은. 나의 아들에게 성의를 보였다. 나와는 불구대천의 원수일 지언정, 그들은 나의 아들을 사랑했다. 그들은 나의 아들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했다. 이것은 그에 대한 마땅한 댓가다! 더이상 토를 달지 말라! 명한대로 시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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