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신화, 북유럽신화이야기, 발드르, 장례식, 휘로킨
#. 마녀, 휘로킨
신들은 몸가짐을 깨끗하게 하고, 발드르의 장례준비에 들어갔다. 길일을 골라 장례식의 날짜를 정하고, 장례식장은 발드르를 기리는 모든 생명들이 참석할수 있도록 가급적 넓은 장소를 골랐다. 그곳은 '에기르의 들판'으로 불리는 거대한 들판과 바다가 맞닿은 아주 크고 넓은 곳이었다. 여신들은 수의를 짓고 장례에 쓰일 제물을 마련했다. 발키리와 신들의 사절들은 요툰헤임의 거인들은 물론 저 땅속의 난쟁이들과 하늘의 요정들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모든 이들에게 발드르의 장례를 알렸다. 참석하고자 하는 이들은 종족이나 신분에 관련없이 모두가 참석할수 있음도 함께 알렸다.
'흐링그호른(Hringhorn/Hringhorni : 둥근 뿔 또는 줄기가 둥근 나무로 만든 배)'이 발드르의 '장례선(葬禮船)'으로 선택되었다. 이 배는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배로 여겨졌고, 발드르의 소유였으므로 그의 장례선이 되기에 가장 적당했다. 신들은 흐링그호른에 장작을 쌓고, 발드르의 시신을 안치할 제단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때, 장례를 준비하던 신들은 하나의 난관에 봉착했다. 워낙 큰 배인 탓도 있겠지만, 어떤 일인지 하인들은 물론, 장례를 준비하던 신들까지 함께 달려들어도 배가 움직이지 않았다. 신들은 고민에 빠졌는데,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신들은 토르라면 이 배를 움직일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그를 부르려 했는데, 토르는 여전히 로키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헤니르(Hoenir : 강한, 조력자)'가 말했다.
[이건 힘으로 움직일 물건이 아니네. 주인이 아니면 더욱 움직이려 하지 않을게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헤니르는 신들 중에서도 연장자에 속했고, 이번 발드르의 장례를 주관하고 있었다. 그는 오딘만큼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많은 것들을 보고 들어서 아는 것이 많았다. 신들이 묻자, 헤니르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흠.. 내 생각에 자네들이 찾아갈 곳은 오딘님일걸세. 그 분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지. 발드르가 없는 이상 지금 이 배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요툰의 마녀, '휘로킨(또는 히로킨, Hyrrokkin : 거인, 귀신)' 뿐일꺼야.]
휘로킨은 요툰헤임의 거인들 사이에서도 마녀라고 불릴정도로 거인들도 꺼리는 무녀였다. 신들은 난감했으나 결국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더욱이 거인을 아스가르드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오딘의 허락은 반드시 필요했다. 신들은 헤니르를 앞세워 오딘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이를 들은 오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다면 휘로킨을 불러오라. 내가 요청한다고 하면 기꺼이 와줄 것이다.]
오딘의 허락을 받은 신들은 서둘러 전령을 휘로킨에게 보냈다. 휘로킨은 준비가 되는대로 가겠다는 말을 전해왔을 뿐,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휘로킨은 도착하지 않았다. 신들과 하인들은 어쩔줄몰라 해안가에 우두커니 모여있었고, 급한 마음에 수소문을 하여 토르를 부르러 또 다른 전령까지 보냈다. 시간이 흘러 오딘이 헤임달과 함께 해안을 찾았고, 소식을 들은 토르도 해안으로 달려왔다. 오딘이 모여있는 신들을 보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오딘의 한숨 소리를 들은 토르가 말했다.
[제가 배를 옮겨보겠습니다.]
[형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도착할 겁니다. 어서 가서 휘로킨에게 빨리 달려오라고 전하여라. 재촉을 해서라도 데려와야 한다.]
헤임달이 소매를 걷어붙이는 토르를 말리고는 부관을 불러 휘로킨을 데려오라 일렀다. 헤임달의 부관이 막 출발하려는 찰나, 저 멀리 검은 폭풍같은 것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이 가까워오자 세찬 바람과 함께 역겨운 향기가 몰려왔다. 어찌나 바람이 거센지 신들과 하인들은 저마다 막을 것을 찾아 몸을 피했다. 헤임달의 부관과 부하들이 방패를 가져와 오딘과 토르, 헤임달의 주변을 둘러쌌다. 토르와 헤임달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고, 오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묵묵히 그 바람을 맞으면서 서있었다.
휘로킨은 헤임달을 내려다보며 베시시 웃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음산하던지 헤임달의 부하들은 저도 모르게 검을 잡은 손을 떨고 있었다. 이런 부하들과는 달리 헤임달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고, 토르는 휘로킨은 쳐다보지 않았지만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휘로킨은 오딘을 보며 가볍게 목례를 했고, 오딘도 목례로 답했다.
[그럼, 부탁하지.]
[.. 그러죠. 이봐, 애미가 여덟인 녀석. 내 늑대 좀 봐주렴.]
휘로킨은 곧바로 늑대에서 내려 해안가를 향해 걸어갔다. 신들과 하인들은 저마다 바람을 피해 숨어있던 곳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멀찍이 휘로킨이 흐링그호른으로 다가서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때 휘로킨의 늑대와 독사들이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휘로킨이 멀어지자, 늑대는 으르렁거리며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고, 독사들은 독사들대로 혀를 낼름거리며 독액을 토해냈다. 토르가 신경이 쓰였는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거인이라면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 토르였던데다 늦게 나타나 놓고, 안하무인인 휘로킨을 보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오딘은 그런 토르를 모른 척했지만, 헤임달은 그럴수 없었다. 헤임달은 부관을 손짓으로 부르더니 그에게 가만히 명을 내렸다.
한편 휘로킨은 흐링그호른으로 다가가 가만히 살펴보았다. 흐링그호른은 바닷가의 모래턱에 놓여있었는데, 배 아래로 커다란 통나무로 만든 수많은 굴림대가 놓여져있었다. 신들이 나름대로 움직여보려고 설치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흐링그호른을 살펴보던 휘로킨이 앙연하게 웃었다.
[하아.. 멍청한 것들. 이러니 저 아사 신 녀석들이 못움직이는 것도 당연하지. 이건 지 주인이 아니면 못움직이는 마법이 걸린거야. 이런 걸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될턱이 있나? 흥!]
다시 배를 위 아래로 한동안 살펴보던 휘로킨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휘로킨의 눈이 붉게 변했고, 그녀의 진푸른 머리칼이 뻣뻣하게 곤두섰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소리로 주문을 외기 시작했는데, 쇠가 갈라지는 것 같은 그녀의 음산한 목소리가 해안가에 공포스럽게 울려퍼졌다. 그녀의 주변으로 어두운 기운이 몰려들고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그녀의 주문에 호응이라도 하듯 우르릉 거리는 굉음을 내며, 흐링그호른을 감싸기 시작했다. 오딘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이 광경이 심히 유쾌하지는 않았다. 주문을 외우던 휘로킨은 이번에는 양손을 뻗어 흐링그호른의 선수 아래에 얹었다. 그러자 배 아래에 있던 굴림대 여기저기서 불꽃이 튀며 부서져 나가고 일부에는 불까지 붙었다. 부서져나간 굴림대의 일부가 멀리 날아가 숨어있던 신들과 하인들의 근처로 떨어지자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허둥댔다. 토르에게 이런 광경이 유쾌할리 없었다.
[형님, 조금만요. 발드르를 위해섭니다.]
[.. 아~ 후....!]
헤임달의 만류에 토르는 콧김을 내뿜으며 분을 삭혔다. 사랑하는 동생 발드르를 잘 보내주기 위한 일이니 토르로서는 분해도 참을수 밖에 없었다. 토르는 분을 삭히며 연실 발로 애꿎은 모래만 걷어쳤다. 그사이 휘로킨을 감싸던 검은 기운이 잦아들며,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흐링그호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링그호른이 그 크고 무거운 몸뚱이를 천천히 바닷물 위에 눕히기 시작했다. 흐링그호른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신들은 조금 전의 두려움도 잊고,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휘로킨은 천천히 흐링그호른에서 손을 떼더니 몸을 돌려 모래밭을 걸어올라왔다. 그녀는 오딘과 아들들을 지나쳐 그대로 자신이 타고온 늑대와 독사들에게로 향했다. 제 주인이 나타나자 잠시 조용했던 늑대와 독사들이 다시금 기운을 얻었는지,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휘로킨은 그런 늑대를 독사 채찍으로 때리더니 발로 배를 걷어찼다. 그러자 늑대는 다시 커다란 소리를 지르더니 몸을 돌려 왔던 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휘로킨은 올때와 마찬가지로 검은 폭풍이 되어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갔다.
신들은 흐링그호른을 에기르의 들판으로 이끌고 갔다. 장례선이 준비되자, 에기르의 들판은 곧바로 장례식을 위한 준비가 속도를 내며 진행되었다. 신들과 하인들은 마음이 슬프고 무거웠지만, 장례준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자신들이 그토록 사랑하던 발드르를 보내는 일이니 어찌 소홀할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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