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드 단테 Apr 04. 2024

31. 발드르의 장례식 : 하나 - 스노리의 서가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스노리, 스튤라, 올라프

#. 스노리의 서가 


 올라프는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불쾌한 공기와 함께 퀴퀴한 술냄새가 확 풍겨왔다. 올라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는 비단 방안에 찌든 술냄새만은 아니었다. 어두운 방안의 공기는 답답할 정도로 탁했고, 공기 사이를 먼지가 파리떼처럼 날아다녔다. 방안은 어지러질대로 어질러져 있었고, 여기저기에 빈 술병이 나뒹굴었다. 커다란 나무통에서는 오물로 가득했고, 그 주변에는 말라붙은 토사물이 널려있었다. 그 광경 안쪽으로 등을 보인 채 침대에 모로 누워있는 스튤라가 보였다. 스튤라가 방에서 나오지 않은지 일주일이 넘었다. 아니, 사실 한달이 넘게 스튤라는 이런 상태였다. 가끔 술을 구하러 나오는 때를 제외하면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올라프는 들어와 방문을 닫았다. 그는 먼저 어지럽게 널린 술병과 물건들을 발로 밀어가며 창문으로 향했다. 둔턱한 소리를 내며 나무로 만든 창문이 열렸다. 창문이 열리자, 방안의 불쾌한 공기가 빠르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창문 사이로 한 낮의 햇살이 들어오며 방안을 밝게 비추었다. 


[끄응..]


 스튤라가 짜증섞인 신음소리를 내며 이불을 머리로 끌어올렸다. 햇살에서 도망이라도 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올라프가 그런 동생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어나. 깬거 다 아니까.]

[.. 술이나 가져다 줘.]


 머리까지 끌어올린 이불 속에서 잠기다못해 심연에서 들리는 것 같은 걸걸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올라프는 동생을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올라프도 스튤라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둘수는 없었다. 슬프고 아픈건 올라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튤라보다도 먼저 스노리를 따랐고, 더 오랜시간을 스노리와 함께 했다. 


 스노리의 죽음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왕궁에 전해졌다. 이 소식은 왕국 전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스트를룽 저택에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은 왕궁에 전해진 바로 다음날이었다. 처음에는 올라프도, 스튤라도, 저택의 청년들 모두 이 소식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수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혼란에 빠진 사이 며칠이 흘렀다. 그사이 섬의 본가에서 저택의 청년들에게 속속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모든 연락들이 스노리의 죽음을 알리며 무사귀환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스노리가 죽었다. 


 저택은 혼란에 빠졌다. 한동안 저택의 모든 이들이 슬픔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하나같이 침울하거나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이는 올라프와 스튤라도 마찬가지 였다. 한참동안 눈물과 울음소리로 가득하던 저택은 시간이 조금 흐르자, 왁자지껄한 난장판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슬픔에 빠져 정신을 못차리는 이들 사이로 분노가 폭발한 이들이 난장을 벌였다. 그들은 스노리를 죽인 기수르에게 복수를 부르짖었다. 게중에는 왕과 왕국에 대한 분노와 불만까지 토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이 내뿜는 분노는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기수르와 그 일당들, 나아가 왕까지 잡아먹을 것 같았지만 실제로 할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겨우 저택이나 주변 술집에서 술판을 벌이면서 서로의 분노를 내뱉을 뿐이었다. 


 스튤라는 그 누구보다도 슬퍼했고, 그의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스튤라는 이내 분노를 내뿜는 청년들과 어울리며 함께 분노를 쏟아냈다. 그래도 스튤라는 스노리가 가장 아끼는 제자 중 하나였다. 그는 분노한 가운데에서도 이 분노를 내뿜는 청년들이 어떤 이들인지, 그리고 지금 할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금새 깨달았다. 저마다 감정에 복받쳐 분노와 복수를 내뱉지만, 결국 하고 있는 것은 그저 술이나 마시고 소리지르는 것 뿐이었다. 지금 함께 소리지르는 이들 가운데 정작 섬으로 돌아가 진심으로 스노리의 복수를 하려는 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 기껏해야 스튤라를 제외하고 한둘 정도일 것이다.


  인간은 간사하다. 스튤라는 그동안 스노리의 교육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는 그저 어렴풋하게만 알던 것을 지금은 몸으로 깨달았다. 이들은 결코 스노리의 복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지금 스튤라 자신이 무엇을 할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은 적지(敵地)나 다름 없는 곳에 있고, 설령 섬에 있다고 해도 자신이 할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것과 같았다.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섬에는 늙은 어머니와 배다른 형제들 뿐이다. 더욱이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복수를 입에 올리는 순간, 고향은 사라질 것이다. 결국 스튤라는 자신의 무력함만 뼈저리게 깨닫고 말았다. 스튤라는 다른 이들 사이를 벗어나 자신만의 공간에 틀어박혀버렸다. 슬픔과 분노, 무기력. 그것만이 온전히 스튤라의 것이었다. 


 그와중에도 올라프만큼은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저택의 그 누구보다도 스노리의 총애를 받았고, 가장 오랜 시간동안 그를 따른 것은 올라프였다. 그런만큼 가장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그였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돌보아야 할 스트를룽의 청년들이 있었다. 올라프 자신이 무너진다면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좋건 싫건, 올라프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물론 올라프도 스튤라가 느끼고 알게된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최대한 저택에 있는 청년들을 살려야 했다. 이들은 모두가 스노리가 남긴 유산일 것이다. 올라프는 어떤 형태로든 이들을 살려 스트를룽이 일어설수 있는 힘이 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노리의 죽음이 전해진 지 한달정도가 되던 어느 날. 올라프는 저택의 청년 모두를 불러모았다. 그러나 스튤라는 여전히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저택에서 모처럼 조용한 가운데 긴 회의가 열렸다. 올라프는 먼저 청년들에게 자신들이 직면한 현실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희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들었다. 청년들의 말을 하나, 하나 들은 뒤,  올라프는 자신의 생각을 그들에게 전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살아남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스트를룽이 살아남을 수 있다. 올라프는 이 점을 가장 먼저 이야기 하며 몇 번이고 강조했다. 살아남아라.

 

 다음으로 올라프는 그들에게 세 가지의 선택지를 주었다. 하나는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서 각자의 고향과 삶을 지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왕궁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향하는 것이다. 보다 넓은 곳으로 가서 보다 많은 경험을 통해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이곳에 남는 것이었다. 좋건 싫건.. 지금 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수 있는 세력은 이곳 왕국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곳에 남아서 왕국과의 교량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왕과 왕궁에 대한 신종이 되었건, 그에 대한 염탐이나 첩보가 되었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모인 청년들은 한동안 깊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세 가지의 선택지 중 하나씩을 선택해 행동에 옮겼다. 일부는 고향으로, 일부는 다른 나라로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결정을 하지 못한 자들과 왕국에 남기를 선택한 자들이 남았다. 올라프는 그들 하나, 하나 챙겨보냈다. 그렇게 저택이 어느 정도 비었을 즈음에 올라프도 스튤라를 찾았다. 이제는 올라프도, 스튤라도 결정을 해야했다.


- 중세 베르겐 항구의 그래픽작품(출처 : https://www.uib.no)


 올라프는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한 낮의 햇살이 쏟아져내리는 가운데, 멀리 분주한 항구가 보였다. 오늘도 몇 명의 청년이 저 항구를 통해 각자의 길을 떠났다. 올라프는 차분한 목소리로 지난 회의와 그동안의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누가 떠났는지, 누가 남는지. 이제는 자신들도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도. 이불속에서 여전히 걸걸한 목소리가 말했다.


[.. 명령하는거야?]

[아니. 생각해보라는 거야.] 


 올라프가 오른손을 들어 가만히 창틀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네가 싫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지는 않아. 현실을 직시해. 숙부님에게 배웠으니 너도 알고 있을꺼야. 가장 절망적인 순간, 가장 최우선은 현실을 직시하는 거라는 걸. 스튤라. 너하고 나. 우리는 숙부님이 남기신 진정한 유산들이야.]


 스튤라가 이불 속에서 가만히 눈을 떴다. 올라프는 여전히 시선을 창밖으로 향한 채 말을 이었다. 


[너와 나, 시그바투르와 카갈리. 우리야말로 진짜 스노리의 유산들이지. 그중에서도 너와 나는 숙부님의 아들과 같아. 숙부님의 말씀을 기억하니? 숙부님의 친아들들 보다도 우리는 더욱 숙부님을 닮았지. 그렇기에 숙부님이 우리를 더욱 가까이 두고 가르치신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질기게 살아남아야 해. 스노리의 유산을. 그 유산을 우리가 이어가야 해. 


  어떻게든 살아남아. 현실을, 오늘을 살아남아. 그리고 내일로 걸어가야하지. 그렇게 스노리의 유산을 이어가야 하는 숙명이 우리에겐 있어. 스튤라. 그러니 너도 이젠 깨닫고 일어서주길 바라.


난 덴마크로 갈꺼야. 그곳 왕실에서 나를 필요로 한다는 연락이 왔어. 숙부님의 뜻을 대신 이루기에 아직 난 힘이 부족해. 그곳을 시작으로 더 넓은 세상을 배우겠어. 그러면서 힘을 키울 생각이야. 나와 모든 걸 함께 하자는 건 아니야. 나는 우리의 길이 같으면 좋겠지만, 다르다고 해도 난 좋다고 생각해. 난 널 믿거든.]


 올라프의 말을 들으며 스튤라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올라프가 몸을 돌렸다. 그는 방문을 열려다 손을 멈추고는 말했다.


[카갈리는 살아있어.]


 올라프는 조용히 밖으로 나가 방문을 닫아주었다. 올라프가 나가고 나서야 스튤라는 다시금 눈을 떴다. 


[(카갈리 형이 살아있다. 섬에, 고향에.. 토르두르가 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스튤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에 강한 통증이 느껴지며 몸이 휘청거렸다. 스튤라는 왼손으로는 침대를, 오른손으로 앞이마를 짚었다. 핑도는 느낌과 함께 쌓였던 숙취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스튤라의 얼굴은 초췌하고 수염은 덥수룩했고, 몸은 피곤에 찌들었다. 그럼에도 다행히 스튤라의 눈빛은 돌아왔다. 침대를 짚은 왼손에 햇살의 온기가 느껴졌다. 


#북유럽신화, #북유럽신화이야기, #북유럽, #오딘, #토르, #단테, #norsemyth, #dante, #스노리, #올라프, #스튤라, #토르두르, #시그바투르, #스트를룽   


매거진의 이전글 30. 발드르의 죽음 : 다섯 - 형제를 위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