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노리의 서가
벽에 기대어 있던 양피지 더미가 갑자기 바닥으로 쏟아져내렸다. 스튤라가 툴툴거리며 양피지를 주웠다.
스튤라 : 아~ 정말! 아까 정리한건데! 갑자기 왜 넘어지는거지?!
스노리 : 흠.. 로키라도 왔다간 걸까나?
스튤라 : 갑자기 로키요?!
스튤라가 양피지를 든 채,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스노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스노리 : 로키는 이런 장난을 참 좋아하지.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신이란다. 누군가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고, 누군가 기껏 해놓은 일이 있으면 망쳐놓는게 특기지만.
스튤라 : 하.. 로키건, 럭키건 사고는 그만치고, 이것 좀 같이 정리해주면 좋겠네요. 이걸 언제 다시 정리하지?
스노리 : 흠.. 그럼 내가 이야기 하나를 해줄테니 그걸 들으면서 천천히 정리해보렴.
스튤라 : 지금은 귀에 안들어올 것 같은걸요?
스튤라의 대답에도 스노리는 수염을 쓸면서 말을 이어갔다.
스노리 : 로키가 있는 곳에는 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지. 자신은 장난을 치는 거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화가 나는 일이기도 하고. 그렇지, 토르의 아내인 시프의 머리칼을 모조리 잘라버린 적도 있지!
스튤라 : 헐... 진짜 겁을 상실했네요.
#. 나, 심심하다~ 진짜아~!
오늘도 아스가르드는 평화로웠다. 신들도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와 여유였다. 신들은 이런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단, 세 명의 신을 제외하고. 먼저 오딘은 언제나 바빴다. 오딘은 신들의 아버지이자, 신들의 왕으로서 할 일이 많았다. 한 편으로는 여전히 지식을 탐했고, 그와 동시에 이곳 저곳에서 수많은 여자를 탐했다. 요즘에는 '프레이야(Freyja : 여주인)'에게 꽂혀서, 마법을 알려달라는 핑계로 그녀에게 열심히 치근덕대고 있었다. 다음은 토르였다. 거인들은 신들에겐 손도 못대고, 늘 만만한 인간들을 괴롭혔다. 이를 보다못한 토르는 직접 나서서 거인들로 부터 인간들을 지켜주느라 바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로키(Loki : 의미불명)'였다.
- 어망을 든 로키. 18세기 아이슬란드 삽화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Loki)
로키에게는 이처럼 평화롭고, 여유있는 시간이 더없이 지루했다. 오딘이 시예의 봉밀주를 훔쳐올 때는 은근한 기대를 했었다. 이걸 구실로 거인들이 일 좀 터뜨려주길 바라며, 요툰헤임을 지켜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오늘도 로키는 담넘어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아.. 뭔가 신나는 일이 없을까? 누가 사고 좀 쳐주면 좋을텐데...]
멍한 표정으로 로키가 중얼거렸다.
[사고? 사고는 개뿔. 이 동네서 사고칠 건 너 로키 밖에 더 있냐? 나? 그치. 사고는 내가 쳐야하는데.. 꺼리가 없다고~~~ 꺼리가~~~~ 아, 누군가 골탕이라도 먹이면 그나마 나을 것 같은데..]
혼잣말도 이제는 싫증이 나던 로키였다. 다시 한참을 멍하게 주변을 둘러보는데 저멀리 한 무리의 여신들이 꽃을 들고 지나가는게 보였다. 여신들은 서로의 꽃을 칭찬을 해주기도 하고, 향기도 맡으며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로키가 따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 여자는 진짜 모르겠어. 꽃 따위가 대체 뭐라고...]
순간 로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여신들 중 '토르(Thor : 천둥)'의 아내인 '시프(Sif : 인척, 시브라고도 함.)'가 보였다. 정확히는 시프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시프는 누구보다도 탐스럽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그녀의 머리카락은 황금빛 파도가 일렁이듯 빛나며 살랑거렸다. 시프는 언제나 프리그, 프레이야와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꼽혔고, 무엇보다도 프리그나 프레이야도 갖지 못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 로키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로키가 누구인가. 남 잘되는 건 죽기보다도 싫다. 누군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으면, 질투가 나서 못참는다. 반드시 그걸 빼앗던지, 망쳐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 그가 바로 로키였다.
#. 로키, 시프의 머리카락을 잘라내다.
구름이 달을 가려 아주 어두운 밤. 로키는 누가 볼새라 잔뜩 몸을 낮춘 채, '스루드반가르/스루드헤임(Þruðvangar/Þruðheimr : 힘의 평야)'를 기어갔다. 이 곳에 토르의 저택인 '빌스키르니르(Bilskirnir : 빛나는 틈새, 또는 세례의 공터)'가 있었다. 저택의 담벼락에 찰싹 달라붙은 로키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마침 오늘 밤은 토르도 집을 비워 기회는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로키는 마치 뱀처럼 소리도 없이 담을 넘었다. 빌스키르니르에는 방이 무려 540개나 있었지만, 그걸 걱정할 로키가 아니었다. 로키는 토르의 친구였고, 그동안 수없이 토르의 집에 드나들었다. 침실이 어디인지 정도는 이미 꿰고 있었다.
- 머리를 손질하는 시프 (1897.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Sif)
로키는 몰래 침실로 숨어들었다. 시프는 엷게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넓은 침대 위로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넓게 펴져 있었다. 보면 볼수록 마치 가을의 탐스런 밀밭의 황금물결이 출렁거리는 것 같았다. 머리를 풀고 잠이 든 시프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로키는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여기에 온 목적이 있었으니까. 로키는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시프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머니에서 준비해둔 칼을 꺼내어 머리카락의 이곳 저곳을 함부로 잘랐다. 자신의 자랑거리가 그렇게 잘려나가고 있었지만, 시프는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있었다. 마침내 로키는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었다. 그리고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토르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손에 들린 시프의 머리카락을 보며 로키는 오랜만에 즐거웠다.
[큭!]
내일 아침 시프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지을 표정을 생각하니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그런 시프를 보는 토르의 표정은 또 어떨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로키는 도무지 이 즐거움을 참을 수 없었다. 로키는 손에 든 시프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흔들며 마치 춤을 추 듯 스루드반가르를 사뿐사뿐 뛰어 돌아갔다.
-시프의 머리카락을 자른 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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