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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Dec 25. 2022

04. 리그의 노래-넷 : 리그와 야를

북유럽신화, 리그, 신분, 계급, 야를, 헤임달


#. 리그와 야를


야를은 무럭무럭 자라서 어느덧 십대에 접어들었다. 몸집도 커졌고, 힘도 세졌다. 두뇌는 명석했고, 사냥도 잘했다. 파디르는 야를을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모디르도 야를을 매우 사랑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야를은 혼자 시간을 보내려는 일이 잦아졌다. 야를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생겨나더니,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야를은 대체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한숨을 쉬는 날이 많아졌고, 가슴은 답답했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부모에게 받는 사랑은 변함이 없었지만, 왜인지 점점 멀게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의문도 점점 커져갔다.


'나는 누구지? 나는 뭘 하고 싶은거지? 나는 뭘 해야하는거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야를은 혼자 저택 근처의 숲 속으로 사냥을 나가곤 했다. 어려서부터 수없이 사냥을 다니다보니 손바닥을 보듯 훤한 숲이었지만, 그래도 말을 타고 달리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날도 야를은 혼자 말을 몰아 숲으로 갔다. 숲 깊은 곳에 있는 작은 공터에 들어서자 야를은 나무에 말을 묶어놓은 뒤, 너른 바위 위에 드러누웠다. 혼자 숲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다 발견한 야를만의 작은 쉼터였다. 야를은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야를은 갑자기 인기척을 느꼈다. 순간 야를은 몸을 일으켰고, 오른손은 본능적으로 허리에 찬 칼 손잡이를 잡아쥐었다. 야를이 노려보는 곳에 한 젊은 사내가 서있었다. 햐안 색의 망토를 두르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채, 야를을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누구냐?!"

"나는 리그라고 하지. 파디르와 모디르의 오랜 친구란다. 그리고, 너. 야를이 이곳에서 아주 쓸데없는 고민에 빠져있다는걸 아는 사람이지."


리그가 모자를 벗더니, 옆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앉으며 말했다. 야를이 흠칫 놀라더니 물었다.


"난 아버지의 저택에서 너를 본 적이 없다. 여길 어떻게 알았지? 여긴 나 밖에 모른다. 넌 대체 누구냐! 나를 미행한거냐?!"

"미행? 아니란다. 아가야. 난 아주 먼 곳에서 벌어진 일도 알 수 있지. 아홉 세계 어디든지 볼 수 있고, 들판에서 풀이 자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단다."


리그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뒤, 손을 들어 야를에게 앉으라는듯 바위를 가르켰다. 야를은 잠시 리그를 노려보다 칼 손잡이에서 손을 뗀 후, 바위에 앉았다. 야를이 물었다.


"리그, 우리 부모님을 만나러 온 건가요?"

"아니. 난 너를 만나러 왔단다. 네가 너무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언을 해주려고 왔단다."


리그의 대답에 야를의 귀가 솔깃해졌다. 리그는 천천히 야를이 고민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었다. 처음보는 낯선 사내가 경계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고민하는지에 대해 그는 너무도 명쾌하게 해결책을 내주었다. 야를은 처음에는 얼이 빠진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야를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밝아진 표정으로 야를이 말했다.


"그렇군요. 난.. 아니 전,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 같아요."


야를의 경계는 풀렸다. 그리고 어느새 리그에게 호감을 넘는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리그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손을 한 번 튕기더니 야를에게 물었다.


"아가야. 혹시 너는 고통을 치유해 주는 주문을 알고 있니?"

"모릅니다."


리그가 다시 물었다.


"아가야, 그럼 불을 끄는 주문이나, 거친 바다를 잠재우는 주문은 알고 있니?"

"모릅니다. 창과 방패, 검과 활에 대해서는 알지만, 지금 말씀하시는건 전혀 모릅니다."


야를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리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리그가 야를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너에게 선물을 주마."


리그는 품 속에서 작은 막대를 꺼내더니 바닥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야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나의 아버지가 죽음으로 부터 얻으신 거란다. 고통을 치유하고, 솟아오르는 불을 끄고, 거친 바다를 잠재울수도 있지. 이것은 '룬(Rune : 비밀지식)'이라고 한단다."


- 스칸디나비아형 룬 문자(출처 : https://namu.wiki/w/%EB%A3%AC%20%EB%AC%B8%EC%9E%90)


리그는 야를의 곁에 앉아 한참동안 자상하게 룬 문자에 대한 비밀스러운 지식을 알려주었다. 야를은 리그가 바닥에 적는 문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리그의 입에서 나오는, 리그가 바닥에 그리는 그 모든 것을 하나라도 놓칠새라 눈으로, 머리로, 마음으로 가득 담았다. 리그의 말이 멈췄을 때, 야를은 리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를에게는 더 이상의 고민도, 더 이상의 불안도 없었다. 야를은 오히려 기대와 흥분이 온 몸에 가득차 붉게 상기되어갔다. 리그는 몸을 일으켜 엉덩이를 털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며 숲을 향해 걸었다. 야를이 황급히 일어서며 리그에게 물었다.


"잠깐만요..! 당신은 대체 누구신가요?"

"너는 많은 땅과 성을 가지게 될 것이고, 많은 이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나는 '리그(Rigr : 왕이라는 뜻도 있다.)'란다. 신들의 전당 가장 높은 곳에 앉으시는 분의 아들이고, 아홉 파도의 아들이지. 그리고..."


숲을 향해 천천히 걷던 리그가 뒤를 돌아보더니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헤임달(Heimdalr : 빛나는 집)'. 너의 아버지란다."


-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대사, 내가 니 애비다.(i am your father)(출처 : https://giphy.com/)




#. 새로운 왕의 탄생


야를은 저택을 떠났다. 말을 달려 거친 산과 깊은 강을 지나 도착한 곳에 자신의 성을 지었다. 야를은 용맹한 전사들을 사귀었고, 충직한 신하들을 모았다. 야를은 그들을 이끌어 많은 땅을 정복하고, 많은 사람들을 지배했다. 말발굽은 항상 피에 젖어있었고, 야를은 열 여덟개가 넘는 땅을 다스렸다. 야를은 많은 정복 전쟁과 수많은 이들의 목을 베었지만, 자신의 사람들에게는 관대했다. 그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주었고, 보석과 금, 귀중한 것들을 나누어주었다. 야를의 곁에는 점점 더 많은 전사들과 신하들이 모여들었다.


야를은 자신의 영토가 굳건해지자, 고귀하고 충직한 신하들을 멀리 '헤르시르(Hersir : 족장)'의 땅으로 보냈다. 헤르시르에게는 아름답고, 야망이 넘치는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에르나(Erna : 활기찬)'였다. 야를이 보낸 사절단은 야를을 대신하여 헤르시르에게 구혼의 뜻을 전했다. 헤르시르는 흔쾌히 이 부유하고, 강한 젊은 왕에게 자신의 딸을 보냈다. 야를은 그렇게 아내를 얻었다. 야를은 에르나와의 사이에서 많은 아이들을 낳았다.


큰아들은 '부르(Bur)', 둘째는 '바른(Barn)'이었다. '조드(Jod)'와 '아달(Adal)', '아르피(Arfi)'와 '모그(Mog)', '니드(Nid)'와 '니듕(Nidjung)'도 낳았다. 그리고 '손(Son)'과 '스베인(vein)', '쿤드(Kund)'를 낳았고, 막내의 이름은 '콘(Kon)'이었다. 야를의 고귀한 아이들은 야를을 도와 전쟁을 했고, 넓은 땅을 정복했다. 그리고 야를로 부터 각각의 몫에 맞게 땅이나 보석, 금, 고귀한 물건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막내인 콘은 땅이나 재물 대신 야를이 아는 모든 지식을 물려받았다. 야를은 리그에게 전해받은 '룬'에 대한 지식을 오직 콘에게만 알려주었다. 그리고 야를과 에르나로 부터 [지배하는 자(혹은 귀족)] 신분(계급)이 생겼다.


#.리그의 노래


사냥을 나선 콘에게 까마귀 한마리가 말을 걸면서, 리그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리그의 노래(혹은 리그의 광상시)]는 인간에게 '신분(身分, estate, caste system)', 즉 '계급(階級, class)'이 생기기게 된 이야기다. 그리고 학계에서는 북유럽의 어느 왕가의 '가계(家系:집안의 계통)'에 대한 이야기 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대체로 덴마크의 고대 왕가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일설에는 리그를 '헤임달(Heimdalr)'이 아닌 '오딘(Odin)'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대체로 리그는 헤임달로 여겨진다.(저도 이 견해를 따랐습니다.)


- 뿔나팔을 부는 헤임달, 로렌츠 프로리히(1895,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eimdall)


우리는 일반적으로 역사에서 '농업혁명'이 시작된 후, '잉여산물'이 생기고,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인간사회에 '신분' '계급'이 등장했다고 배운다. 이것을 신화에 대입해본다면, [굴베이그가 일으킨 황금 열풍]으로 대변되는 '사유재산', 즉, '내 것', '내 소유'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고, 그것이 [리그의 노래]로 이어지면서 '신분'과 '계급'의 등장이라는 실제 역사 속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에서는 그보다는 지배층에서 주입한 사고라고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은 것 같지만.


신분과 계급. 고대 사회에는 이것이 사회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규범이자 시스템이었다. 특히,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이런 기본적인 규범을 확립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것을 신화를 통해서(빙자해서) 피지배층에게 각인시킨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다. 고대 사회에서 신(神)은 절대적인 존재였고, 다른 누구도 아닌 신이 정했다면, 그것은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고대 이래로 이 시스템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지금의 우리는 신분이나 계급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과 현실을 들여다보면 신분과 계급은 지금도 존재한다. 고대에서 중세, 근세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계급이 눈에 보이는 형태(쉽게 알아볼 수 있게)로 존재했다면, 지금은 보다 더 은밀하게, 더 세부적으로, 더 우악스럽게 그 형태를 바꾸면서 말이다. 크게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작게는 우리가 접하는 그 모든 분야에서. 더욱 더 세밀하게 쪼개진 신분, 계급을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지금의 시대가 이러한 신분과 계급의 이동이 가능은(!?)하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다르다 말할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을 이동하고, 바꾼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표면적으로 '가능'하지만, 그걸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생과 노력이 필요하며, 여전히 저 위에 있다는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항상 그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차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걸까? 리그는 왜 인간에게 이런 숙제를 던져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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