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과의 담판
헬의 시종은 헤르모드를 예의 커다란 문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문이 열리자, 시종은 손을 안으로 향한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모드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두 눈을 깊게 떴다. 그는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헬의 집무실이었는데, 꽤나 넓었고, 가느다란 안개와 옅은 어둠이 흘렀다. 집무실의 가장 높은 단에 헬의 옥좌가 있었고, 헬은 그곳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그녀는 절반은 살아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지만, 다른 절반은 죽은 자의 썩어가는 몸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헤르모드는 헬을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놀라지는 않았다. 익히 들어왔던 모습이기도 했고, 그런 정도로 놀랄 헤르모드도 아니었다. 전장의 모습은 그보다도 더 처참한 것이 많았기에. 다만 헬의 살아있는 부분을 보면서는 저 모습으로 온전한 모습으르 가졌다면 상당히 아름다운 아가씨였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때 헤르모드의 뒤에서 문이 닫혔다.
옥좌에 기대있던 헬이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 반쯤 감긴 게슴츠레한 눈으로 잠시 자신의 앞에 서있는 신을 노려보았다. 헤르모드는 그녀의 자세도, 눈빛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싸워야 한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헬의 머리를 베고 발드르와 난나를 데리고 나갈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들을 무사히 데리고 가는 것이 더 중요했고, 그러려면 헬의 심기를 굳이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서로의 시선이 오가고, 헤르모드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시선은 여전히 헬을 향한 상태였다.
[누가 내 정원을 마음대로 휘젖고 다녔나 했더니 바로 당신이었군. 아스가르드의 성질 급한 헤르모드님. 이 어둡고 추운 세상의 끝까지 나를 보러 오지는 않았을테지?]
[물론. 아쉽지만 당신은 내 취향은 아니라서.]
헤르모드가 가볍게 응대했다. 헬이 한쪽 입술을 쌜룩거리며 피식 웃었다. 헤르모드는 헬이 자신이 온 이유를 알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말을 돌려서 하지 않는 그였기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긴말 하지 않겠소. 난 당신에게 나의 형제 발드르와 그의 아내인 난나를 아스가르드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한다.]
[뭐야? 인사따윈 집어치웠다고 해도, 이건 부탁을 하는 자세가 아닌걸? 너희 신들이 요구하면, 내가 '네~ 그러세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거야?]
헬이 한숨을 내쉬더니 비아냥거렸다. 헤르모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요구가 아니야. 요청이지. 명령을 한다고 들을 당신이 아닌 것 즈음은 나도 알아. 다만, 아쉬운 것은 내쪽이니 요청을 하는 거야. 네가 부탁을 원한다면 부탁을 하겠어.]
헤르모드가 살짝 머리를 숙여보였다.
[나 헤르모드가 지옥의 여왕에게 부탁한다. 나의 형제, 발드르와 그의 아내 난나를 돌려다오.]
헤르모드의 모습을 본 헬은 자신의 시체같은 손을 들어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흐음.. 이거 놀랍네? 지금 머리를 숙인거야? 신이? 이야... 이거 이미르가 뒤집어지겠는걸? 그런데 어쩌지? 그 부탁으르 내가 굳이 들어줘야 하는 건가 싶은데 말이지. 내가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여긴 저승이지. 이곳의 모든 것들, 그 생명이 다한 것들은 나의 백성이고, 나의 소유지. 그건 네 아버지 오딘이 그렇게 한거 아닌가? 특히나.. 말이지?]
헬은 헤르모드의 표정을 살펴보려는듯 가만히 몸을 앞으로 숙였다.
[또... 발드르는 전부터 가지고 싶었던 거란다. 지금은 내가 가장~ 아끼는 소유물이지.]
[발드르가 네 소유물이라고? 하. 웃기는군. 그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 자신의 것이지. 다만, 지금은 온 세상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고, 하루 하루 고통속에서 지내고 있어. 특히 우리 어머니 프리그는 피눈물로 발드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지.]
헤르모드가 헬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러자 헬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와우~ 내게 동정과 연민을 바라는거야? 어우~ 세상에나~ 그런 말로 내 동정심을 얻을수 있을까?]
[당신에게 동정심이 있을 것이라고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어. 난 그저 사실만을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헤르모드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헬이 한 손으로 가볍게 턱을 괴며 말했다.
[흠. 너희는 발드르의 죽음으로 이제서야 그런 슬픔을 처음 맛본거 아닌가? 신들을 제외한 모든 생명들은 이미 셀수없이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 지금 이 순간도. 그리고 언제나. 그리고 수많은 요툰의 젊은이들은 너희에게 목숨을 잃었어. 역시 수많은 요툰의 어머니들이 피눈물을 흘렸지. 그녀들의 눈물이 프리그의 눈물과 뭐가 달라?]
[그건 내가 알바 아니야.]
- 헬과 가룸, 요하네스 게르츠 그림(1889.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el_%28mythological_being%29)
헤르모드의 대답에 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헬이 헤르모드를 노려보았고, 헤르모드도 피하지 않았다. 방안의 안개와 어둠이 짙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 사이로 무언가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날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헬이 분노하기 시작한 것 같았고, 헤르모드도 물러서지 않아 마치 싸움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다시 안개와 어둠이 밝아지더니 헬이 깔깔대며 웃었다.
[아하하하! 난 이래서 너희들이 싫어. 너희 신족이라는 것이 싫다구!]
헬의 웃음소리가 엘류드니르를 넘어 저승의 성채에 까지 울려퍼졌다. 죽은 자들은 갑작스런 헬의 웃음소리에 놀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헬의 시종인 '강글라티(Ganglati : 움직이지 않는 남자)'와 '강글로트(Ganglot : 움직이지 않는 여자)'도 처음 듣는 듯한 헬의 웃음에 느릿한 걸음을 멈추고 헬의 집무실을 바라보았다. 헬은 한참을 웃은 뒤 말했다.
[좋아. 너의 그 허세가 마음에 들었어. 네가 원하는대로 발드르와 난나를 돌려보내 주도록 하지. 단!]
헬이 몸을 더욱 앞으로 숙이더니 시체같은 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거기에는 한가지 조건이 있어. 뭐, 그리 어려운 조건은 아니란다. 일단 한가지를 먼저 물어보겠어. 내가 듣자니. 네 어미, 프리그가 발드르를 위해 세상 만물로 부터 그를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를 받았다고 들었어. 그게 사실인가?]
[그렇다. 그 작은 새에서 저 날카로운 창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거의 모든 만물이 그의 안전을 보장했다. 그만큼 발드르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어.]
헤르모드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헬이 시체같은 쪽의 입술을 움직이며 피식거리면서 웃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흉측하던지 뭇 사람같았으면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그렇군. 내 조건도 그것과 비슷해. 정말로 발드르가 세상에 모든 이들로 부터 진정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면 말이야.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려줄수도 있겠지. 내 조건은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를 위해 진정으로 슬퍼하며 눈물을 흘린다면, 그를 보내주겠어. 난나는 덤으로 끼워서 말이지.]
헬은 다시 한번 깔깔거리면서 웃더니 옥좌에 기대어 앉았다.
[이게 너의 요구.. 아, 부탁이었지? 너의 부탁에 대한 내 답이야. 그 이외에는 난 어떤 조건도 받을 생각이 없어.]
[좋다. 그것으로 라면. 네가 약속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나, 저승의 여왕은 너희 신들과는 다르단다. 결코 한번 약속한 것은 어기지 않아.]
헬이 더욱 흉측하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신의 약속을 확인시켜주었다. 헤르모드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다말고 잠시 멈춰서서 말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 지옥의 여왕이여,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잘 계시게.]
헬은 미소를 지을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헤르모드가 나갔다. 다시 집무실이 문이 닫히고 난 뒤, 헬이 이번에는 살아있는 쪽의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돌돌 감으며 중얼거렸다.
[글쎄? 난 언제나 잘 있지. 그나저나.. 다시 만나게 될 때라.. 흠.. 후훗.. 재미있네. 운명의 아버지는 누구의 편을 들어주려나? 후훗.. 재밌어..]
집무실을 나온 헤르모드를 앞서 자신을 안내한 헬의 시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헤르모드를 보고는 가만히 몸을 돌려 앞서 걷기 시작했다. 헤르모드는 그가 따라오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따라 걸었다. 가만히 홀의 가장 높은 곳으로 시선을 옮겼는데, 그곳에 발드르와 난나는 보이지 않았다. 헤르모드는 복도를 걸어 엘류드니르의 정문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발드르와 난나가 슬레이프니르와 함께 있었다. 슬레이프니르는 발드르를 만난 것이 기쁜지 연실 그의 손에 얼굴을 비벼댔다. 헤르모드가 발드르와 난나에게로 다가가 밝게 웃었다.
[헬이 형과 형수를 보내주기로 했어. 조건을 달긴 했지만.. 걱정하지마! 그 정도는 충분히 할수 있으니까. 우릴 믿고 조금만 기다려줘, 형!]
발두르는 알수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잘 되었구나. 아, 돌아가는 길에 부탁할 것이 있는데 들어주겠어?]
[물론. 어떤 것이라도 내가 다 들어줄께.]
헤르모드가 대답했다. 발드르가 난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난나가 헤르모드에게 작은 보따리를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이것은 우리를 보내면서 신들과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준 것들이란다. 너무도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 다만, 저승에 있는 우리에게는 필요가 없는 물건이란다. 여기서는 이것들을 쓸 일이 없거든. 이건 살아있는 이들에게 더욱 중요하고, 귀한거란다. 그러니 네가 이것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었으면 해.]
발드르가 대답을 하며,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빼내 헤르모드의 손에 끼워주었다.
[이건 드라우프니르. 아버지께서 주신거야. 이건 나보다는 아버지께 더 필요한 거니, 돌려드리렴.]
[안에 들어있는 것은 어머니와 여신들께서 주신거랍니다. 프리그님께 전해주세요. 그리고.. 이 황금 반지는 풀라님께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잘 돌봐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어머님을 잘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세요.]
난나가 발드르의 뒤를 이어 말했다. 헤르모드는 두 신이 전해주는 물건을 잘 갈무리 하여 슬레이프니르에 실었다. 헤르모드는 몸을 돌려 발드르를 다시 한번 꼬옥 끌어안고 나서야 슬레이프니르에 올라탔다.
[그럼, 빨리 아스가르드로 돌아가서 이 소식을 알릴께. 형, 그리고 형수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다음에는 아스가르드의 대지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응. 그럼 몸조심히.]
[도련님, 부디 조심히 가세요.]
발드르와 난나의 배웅을 받으며 헤르모드는 미소로 대답했다. 그는 곧 슬레이프니르를 달려 함께 저승의 성벽을 뛰어 넘었다.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 검고 어두운 골짜기를 거침없이 달려갔다. 저승으로 올 때와는 달리 돌아가는 길은 보다 마음이 가벼웠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미 발드르의 안전을 보장해주었다. 그런 그들이 발드르를 위해 울어주지 않을리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헤르모드도, 슬레이프니르도 그 간의 피로를 잊은 채, 아스가르드를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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