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 그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절망이여
신들이 보낸 사절단이 각자 자신의 임무를 마친 순서대로 아스가르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기쁜 소식을 안고. 그들이 복귀할 때마다 신들은 기뻐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면서 그들은 생각했다. 이번만큼은 오딘이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오딘이 말하던 그 운명이라는 것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이번 만큼은 자신들의 정성과 사랑에 감동했음이 분명하다고.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러 신들이 보낸 사절단의 거의 대부분이 아스가르드로 돌아왔다. 이제 마지막 사절단만 돌아오면 된다. 그들이 앞선 이들과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가져온다면, 발드르는 난나의 손을 잡고 돌아올 것이다. 아니, 돌아온다. 신들은 저마다 발드르와 난나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에 대해 기쁜 상상을 하며, 마지막 사절단을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마지막 사절단이 아스가르드의 서쪽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그곳에 있는 크고 하얀 나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목록을 살펴보았다. 가장 마지막에 적힌 이름. <겨우살이 나무>였다. 사절단은 흔들리는 감정을 추스르며, 겨우살이 나무에게 말을 걸었다. 겨우살이 나무는 자신이 본의아니게 저지른 일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기꺼이 눈물을 흘려주었다. 사절단은 겨우살이 나무에게 감사를 전한 뒤,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발드르를 향해 울어주었다. 이제 발드르가 돌아올 것이다. 다시 영광으로 빛나는 아스가르드와 세상이 돌아올 것이다. 사절단은 서로를 부여잡고 한참동안 펑펑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눈물을 멈춘 사절단은 기쁜 마음으로 보무(步武 : 활발하고 버젓하게 걷는 걸음)도 당당하게 신들이 기다리는 발할라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절단의 눈에 낯선 동굴이 하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모두가 거의 평생을 아스가르드에서 살아온 이들이엇지만, 이런 동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사절단은 서로에게 물었지만, 그 누구도 이런 동굴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사절단은 오히려 안도했다. 세상은 워낙 변화가 무쌍한 곳이고, 자신들은 오딘이 아니기에 모든 것을 알수 없었다. 그렇기에 놓치고 지나칠 수 있던 곳을 발견했다는 것이 기쁠지경이었다. 사절단은 가만히 동굴을 살펴보았다. 대체로 이런 동굴에는 무엇인가가 살고 있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예상대로 동굴의 입구 쪽에 누군가 불을 피우고, 음식을 해먹은 흔적이 있었다. 사절단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음식을 해먹었다는 것은 말이 통하는 상대라는 뜻이었기에 수월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절단은 설레는 발걸음으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 살고 있는 자가 위험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 퇴크, 예전에 직접 그린 그림
사절단이 발견한 것은 동굴 안 바위 위에 앉아있는 거인족 노파였다. 그녀는 이곳에 홀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노파가 사절단을 보고 물었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이기에 이 늙은 '퇴크(쏘크/Thokk, Thoekk : 감사, 감사합니다)'의 집에 이리 함부로 들어오는 거요?]
[우리는 신들의 사절단입니다. 당신께 부탁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사절 중 한 사람이 나서며 말했다. 퇴크가 대답했다.
[흥! 뭐, 내가 여기 산다고 세라도 받으러 온거요? 그렇다면 난 한 푼도 없소! 있어도 못주고!]
[아, 안심하십시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신도 온 세상의 사랑을 받는 발드르를 알고 있을 겁니다.]
다른 사절이 양손을 들어 퇴크를 달래며 말했다. 그러자 퇴크가 다시 대답했다.
[아, 그 잘난 체 하는 오딘의 아들 놈 말이군. 소문에는 죽었다고 하던데 아직도 안 죽었소?]
퇴크의 말에 사절들은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시 자세를 공손히 하며 부탁했다.
[발드르는 갑작스럽고도 비극적인 사고로 부득이 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구하기 위해 저희는 백방으로 노력했고, 마침내 저승의 여왕으로 부터 한가지 조건을 단서로 그를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답니다. 그 조건은 세상 만물이 그를 위해 울어주는 것이랍니다.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를 위해 기꺼이 눈물을 흘려주었습니다. 이제 오직 당신만이 남았습니다. 부디 그가 우리의 곁에 돌아올 수 있도록 울어주시겠습니까?]
[눈물 한 방울. 그를 위해 단 한 방울의 눈물만 흘려주셔도 됩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퇴크는 대답 대신 슬픈 눈으로 사절단을 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점차 슬픈듯한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막 눈물이 터질 것 같이 보였다. 사절단도 함께 슬픈 표정이 되며 퇴크가 울어주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퇴크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곧 울것 같았던 눈은 게슴츠레하게 변해버렸다. 그녀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퇴크는~
발드르의 죽음에 대해 마른 눈물만을 흘릴 것이라네~
오직 그것뿐.
그는 죽어서도~ 살아서도~
나에게는 기쁨을 주지 않으니~
보시게들~
헬은 자신이 가진 것을 계속 가지고 있도록 놔 두시게나~ ]
사절단은 놀란 눈으로 퇴크를 쳐다보았다. 노래를 마친 퇴크는 큰소리로 웃었다. 퇴크의 쭈글쭈글한 얼굴은 광기에 사로잡히기 시작했고, 공포스럽게 웃고 있었다. 사절단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들이 이제껏 힘들게 한 일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헤르모드가 지옥에서 헬과 담판을 지어가며 만든 마지막 희망은 그렇게 산산히 부서져버렸다. 사절단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싸잡아 쥐며 슬픔에 빠져 통곡했다. 그들이 간신히 정신을 수습했을 때는, 이미 퇴크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뒤였다. 사절단은 넋을 잃은 듯, 마치 저승의 사자들이 걷듯, 멍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발할라로 향했다. 신들은 마지막 사절단이 가져온 이 비보에 아연실색해버렸다. 그들은 절망에 빠져버렸는데, 어떤 신들은 넋을 잃고 쓰러져버렸고, 어떤 신들은 그대로 퍼질러 앉아 섧디섧게 울었다. 찬란하게 빛나던 희망이 너무도 무참하게 부서져버렸다. 찬란하게 빛이 났던 만큼, 그것이 부서진 자리에는 한없이 깊은 아픔과 상처만을 남겼다. 모든 신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오직 오딘만이 울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러나 신들은 이전처럼 눈물만 흘리고 있지는 않았다. 곧 정신을 차린 신들은 발드르가 돌아오지 못하게 한 그 퇴크라는 노파를 도저히 용서할수 없었다.
[퇴크인지, 퇴끼인지! 내 그 염병할 할망구를 찢어죽여버리겠어!]
[이봐, 대체 그 할망구가 어디로 도망갔다는 거야?! 울지만 말고 말해! 말하라고!]
일부 신들은 눈물만 흘리고 있는 사절단들을 붙잡고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발할라의 넓은 홀이 슬픔과 분노로 휩싸이며 소란스러워졌다. 프리그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었지만, 오딘은 두 눈을 감은 채 침묵했다. 그때, 토르의 목소리가 발할라의 넓은 홀 가득하게 울려퍼졌다. 낮은 음성이었음에도, 홀의 소란함을 한순간에 잠재우는 토르의 목소리였다.
[따로 찾을 것 없어. 퇴크가 누구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순간 신들은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 멈춰섰다. 신들은 이가 부서질 듯이 깨물었고,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은 슬픔과 분노로 가득했는데, 이 순간 만큼은 저 거인들의 분노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토르의 말을 들은 신들은 깨달았던 것이다. 착하디 착한 호드를 꼬득여 발드르를 죽음으로 이끈 자. 모두가 발드르의 죽음을 슬퍼했으나, 유일하게 발드르의 죽음을 기뻐했던 자. 발드르가 죽고,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자. 이 모든 비극을 이끌고, 뒤에서 조정한 단 한 명의 존재. 바로 모든 사기와 재해의 고안자, 중상자(中傷者) 로키였다. 이 세상에서 발드르를 위해 울지 않을 자는 오직 그 뿐이다. 그동안의 것들과는 다르다. 이제 더이상 신들은 로키를 참아줄수 없게 되었다. 로키가 신들에게 등을 돌린만큼, 신들의 마지막 희망마저 절망으로 바꿔버린 만큼. 그는 이제 더이상 자신들의 친구도, 동료도 아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신이 아니다. 이 순간부터 로키는 신들에게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원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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