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상을 넘어 현실로.

자기애의 타자확장

by 최희재

앞서 1~5층에 이르기까지, 나는 사랑을 고유성, 반응성, 변화성, 윤리, 조율 등의 단계로 구성해 왔다. 그 사랑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가능한 최선의 윤리적 실천을 모색하는 이상에 가까웠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는 크다. 실제로 관계는 언제나 완벽하게 조율되지 않고 완벽한 상황에서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만 이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상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실천적인 사랑이라 하더라도, 현실과는 아직도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현실적인 사랑은 불완전하고 모순적이다. 그래서 이상적이지 않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다양한 이유로 한쪽이 실천적인 사랑을 하기 어려울 때, 관계의 균형은 무너진다. 그럼 이 사랑은 단순히 타협이나 희생, 아니면 이별을 해야만 하는가?

앞서 5층에서 말한 관계는 어디까지나 양측 모두 실천적 사랑을 의지로 가지고 실현시키는 것을 가정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한쪽만이 가능할 때 사랑은 어떻게 되는지 물어본다. 우울, 상실, 정서적 소진 등의 심리적 여력이 없을 수도 있고 돈, 시간, 건강의 제약 등의 물리적 여력이 없을 경우도 있다. 혹은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누구든 사랑을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면, 아니면 몸이 아프고 회복이 불가능해 보인다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헤어짐이 맞는 건가? 그렇다면 남겨진 사람이나 떠나야 하는 사람이나 둘 다에게 너무 가혹한 선택이 아닐까? 사랑은 시공간, 나이, 성별, 어떤 조건이나 경계에도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필요한 자격 같은 건 없다.

나 자신과 타자에 대한 성찰을 거친 뒤에는, 이런 상황에서도 이상적인 사랑을 외치는 것은 타자에 대한 부담이나 죄책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이상적인 사랑은 언제나 조건의 안정 위에서 더 쉽게 구현된다. 서로의 여력이 안될 때, 서로를 위해서 헤어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존중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내'가 무너지는 일이며, '내'가 없으면 그 무엇도 의미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사랑하는 '타자'를 상처 입히는 것도 고통스럽고, 이 관계가 더 망가져버리는 것을 보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관계의 끝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러한 생각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타당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이 분명 있었다. 이런 흐름이라면 현실에서 이상적인 사랑을 실현시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자기애를 타자까지 확장시킨다. 그러므로 나에게 타자란 둘이자 하나이다."

자기애를 타자까지 확장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함께 성장하려는 돌봄의 실천, 자신의 돌봄 안에 타자를 품으며 타자의 고통도 함께 살아내려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과 짐을 희생과 억압이라 생각하지 않고 거기에 어떠한 보상을 바라는 게 아니듯이 타자의 고통을 똑같이, 자연스럽게 짊어진다. 타자는 나와 완전히 분리된 존재이지만, 내가 타자의 고통을 나의 일부처럼 감각하는 순간, 타자는 나의 ‘경계 안으로 들어온 둘’이 된다. 그래서 타자란 둘이자 하나이다. 이것은 순수한 자기애의 발전으로, 나는 항상 혼자일 때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이 온전치 않았다. 하지만 타자를 품으며 그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다시 인식하게 만든다. 그 책임 앞에서 자신을 돌보아야 할 이유를 타자를 통해 깨닫고 스스로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자기애는 더 깊어진다. 그렇기에 나의 자기애는 타자로부터 완성된다. 자기애의 타자확장은, 타자를 품으면서 타자를 감당하기 위해 나를 돌보게 만드는 힘이며, 결국 나를 다시 나답게 만드는 실천이다.

이러한 자기애의 타자확장은 타자가 무너졌을 때 내 자신이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믿음과 여유가 생긴다. 더 정확하게는 타자의 고통과 무게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된다. 반대의 경우라면 자신이 무너졌을 때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공간이 생길 것이다. 자기애의 타자확장은 철학자들의 언어에서는 정의되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충분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짊어지는 것. 그것은 남을 위한 희생이나 양보로 보이는 '이타심'과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좀 더 진화된 개념으로서 그 행위는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 자신을 완성시키는 과정이다. 이러한 자기애의 타자확장은 현실 속에서 가장 강렬하게 구현된 형태로도 존재한다. 바로 부모가 자식을 향해 보내는 사랑이다. 내가 어머니께 받아온 사랑이 그러하였다. 무조건적인 헌신적 사랑. 가장 따뜻하고 안정되었던 그의 품 안에서 느꼈던 사랑을, 가장 닮고 싶었고 어느새인가 닮아 있었다. 하지만, 타자의 고통을 함께 살아내는 그 마음은 결코 자기 소멸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다르며, 그 무게를 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선을 정하는 일 또한 사랑의 일부이다.

자기애를 타자까지 확장시키면 사랑은 훨씬 따뜻하고 부드럽고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완벽하지 않아도 되며, 부족해도 괜찮으며, 항상 조율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억지스러운 희생도, 채우지 못한 결핍도, 상대에게 내어준 뒤 남겨지는 공허함도 없다. 그러한 타자와의 연결은 따뜻한 안정감이 흐른다. 감당해야 할 무거움을 평온함으로 바꾼다. 내가 부족할 때는 타자가 채워주고, 타자가 부족할 땐 내가 채워주는 것이 된다. 앞서 말한 이상적인 사랑은 불안정한 조건에서는 어려움이 있지만, 이런 사유가 가능하다면 현실적인 문제로 조건이 무너졌을 때에도 여전히 이상적인 사랑을 가능하게 만든다. 관계에서의 '조율'은 '순환'이 되며 서로가 서로의 보금자리이자 함께 성장하고 나아가는 동반자가 될 것이다.

윤리적인 시선에서 이런 개념을 본다면 위험하고 위태로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에서 윤리, 존중만 강조한다면 어떻게 될까.

타자를 절대 침해하지 않는다.

타자도 나를 침해할 수 없다.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은 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거기에 타자를 끌어들일 수 없다.
서로 힘들어도 각자의 몫은 알아서 감당하고 일어서야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사랑하는 사이인데 개인주의가 되고 있다.
물론, 윤리는 사랑을 지탱하는 근간이며 타자에 대한 존중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윤리가 감정과 실존을 차단하고 책임을 각자에게만 부여하는 순간, 사랑은 ‘함께’라는 의미를 잃게 된다. 개인의 경계를 존중하는 윤리는 관계를 보호하지만, 그 윤리에만 머물면 사랑은 각자의 방에서 외치는 메아리가 된다. 사랑은 그 벽을 넘고자 하는 무모한 감응이며, 무너질 수 있음에도 다가가는 용기다.


사랑은 불완전한 두 사람이 얽히고 얽히며 그 안에서 같이 성장해 나아가는 서사이다.


이 글은 나의 사랑에 대한 사유와 실천의 흔적이자, 하나의 결론이 아닌 발자취이다. 처음으로 사랑과 자신과 타자와 관계에 대해 깊게 성찰하고 글을 마무리 짓지만 또 다시 사랑에 대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성찰은 멈추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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