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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나를말하는사람 Jul 17. 2021

결혼, 그 쓸쓸함의 기록 4

돌아가는 길


이 과장.

오늘 경영회의 때 사업부장 지시사항이 있는데

상무님이 낼 1시에 리뷰 하자고 하십니다.

아래 회의록 참조하고 내일 오전에 봅시다.


메일은 놀랍게도(나에겐 전혀 놀랍지 않게도) 오후 4시에 팀장님이 보내셨다.


담배를 피우고 사무실로 돌아오시는 팀장님께

“팀장님.. 상무님 리뷰 건.. 배경이 어떻게 되는지..”

팀장님과 1시간을 얘기하고 나서야 보고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시계를 보니 5시가 훌쩍 넘었고, 난 또 야근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리뷰한다고 앉아서는 “퇴근하느라 못했는데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이 이야기는 무려 8년 전쯤의 얘기지만, 지금도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아마 입사 후 내가 받은 메일을 다 뒤져볼 수만 있다면 저런 메일 몇만 통쯤은 쏟아지지 않을까…


어쨌든 난 회사에서는 예스맨이었다.

저렇게 야근을 했고, 다음날 리뷰를 받았고, 또 다음날 오전까지 리뷰를 해야 했기에 야근을 했다.


그 시기에 정말 깍쟁이 같은 한 동료가 있었다.

외고를 나와 명문대 출신에 얘기를 해보면 정말 똑똑했지만, 상사들이 일을 시킬 때 왜 자기에게 시키는 것이냐 따지는 일이 많았다. 사실 기획 직군이라 주요 업무는 보고이지만, 자질구레한 일들은 어쨌든 나눠서 해야 했는데, 그런 것들을 정말 못 견뎌했다.

그가 부담스러웠던 상사는 일을 내게 시켰고, 나는 정말 보고 업무에 개발 이슈에 일이 너무 많았지만 시키는 건 꾸역꾸역 했다.


이렇게까지 한건 내가 성격이 너무 착해서는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그렇게 뼈 빠지게 밤새가며 한 일들은 내 공이었고 그것이 금전적인 보상이든, 한마디의 칭찬이든 나의 성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난 선배들이 좋아하고 챙겨주는 후배라고 생각했고, 당시 나에 대한 팀장의 평가도 좋았기에,

그때 마치 내가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마냥 의기양양했었던 거 같다.


이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난 인정을 받았다며,

이것보다 더한 것은 없을 거다. 내가 해왔던 것처럼 묵묵히 해나가면 된다고 말이다.


내가 결혼한 것은 안타깝게도 그 시기쯤이다.


일을 많이 하는 만큼, 야근도 많고 회식도 많았다. 빨리 집에 가기 위해 저녁을 건너뛰고 업무를 하다가,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늦은 저녁과 반주로 마무리를 하곤 했다. 파트 단위로 하나의 보고 업무를 영역을 나눠서 했고, 저렇게 오후에 시킨 일은 빨리하고 퇴근하고픈 맘에 저녁도 먹지 않고 보고서를 만들다가, 한 사람이 나가면서

“저녁이나 먹고 가시죠”라고 누가 한마디 던지면 다들 “에이씨 남은 건 내일 하자”

이러고 컴퓨터를 덮고 나가는 것이다.


그날도 저녁을 건너뛰고 야근하다 8시쯤 마쳐 일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 R&R 상관없이 왜 이렇게 우리한테 일이 떨어지냐 신세한탄을 하며 치맥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집안 꼴이 폭탄 맞은 거 같은데, 넌 오늘도 이 시간까지 안 들어오고 뭐하냐?”


남편의 카톡이었다.


지난주부터 야근도 많았지만, 사실 야근 없는 날엔 약속도 많았다.

그건 나만 그런  아니라 남편도 마찬가지여서 신경을 못썼으니 폭탄인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평소 내가 집안일을 적게 하는 것도 아니다.


빨래하고 널고 개는 것도 내가 했고, 설거지는  먹고 바로 식탁을 워야 해야 하는 나와 달리, 내가 피곤해서 못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식탁 위에 먹은 그릇이며 남은 반찬들이 냄새를 풍겼고, 우유는 냉장고에 들어가지 못해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대부분의 경우 나의 몫이었다. 남편은 소파밑에 양말과 바지를 벗어놓는 버릇이 있어서 그런걸 치우는것도 내가 했다.


나는 집안일의 90프로 가량을 내가 한다 “생각” 했다.


그도 그럴것이 신혼때의 나는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일주일에 두번은 했고, 배게 커버와 침대요는 주말마다 세탁하고 갈았으며, 화장실 락스청소도 일주일에 한번은 꼭 했다. 우리집은 아빠가 위생상 좋다며 앉아서 볼일을 보셨기 때문에, 처음으로 서서 볼일을 보는 남자와 살기위해선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남편 생각은 달랐다. 본인이 집안일의 50프로 정도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내 뒤치닥거리까지 한다 했다.

예를 들면 세면대에 둔 일회용 렌즈 껍데기를 치우고, 떨어진 내 머리카락 뭉치들을 줍는 등의 일들 말이다. 남편은 화장실은 청소를 왜 하는거며, 빨래는 내가 하긴 하겠지만 세탁기가 해주지 않냐 등의 내가 이해할수 없는 말들을 했다.


‘아니 어떻게 집안에 정말 필요한 주된 일은 내가 다하는데, 저렇게 뻔뻔하게 반은 한다고 주장할수 있지?

자기가 하는 작은 일은 엄청난 집안일을 한거고, 남이 하는 일은 그저 기계가 해주는 일인가?’


정말 분노가 끝까지 치밀었다.


이런 억울한 경험을 어디서 해본적이 없었다. 회사 일은 내 역할이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주어진 일을 하면된다.

내 영역을 넘어가는 일도 좀 억울하지만 한다면 인정과 보상이 있다.

내 업무 중에 조금 꼬이고 흐트러지는것도 있을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주도적으로 상황을 나쁘게 만든게 아니라, 연관된 모든 사람들이 만든 상황이고, 그런걸 또 푸는게 업무이기에 흐트러졌다.는 자체가 큰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집안엔 내가 한일을 지켜봐온 선배도 팀장도 없었다.


나와 남편은 각자 몇일밤을 분노로 지샜다. 나는 너무 억울한 나머지 엑셀에 집안일 리스트를 쓰고 누가 주로 하는지를 하나하나 적고, 이렇게 집안일 내가 다하는데 내가 한일을 무시 받을 바엔, 리스트를 정해서 반반 하자 제시하기도 했지만, 남편은 더 화만 낼 뿐이었다.


너무 억울해서 친구들과 주변 언니오빠들에게도 물었다. 이거 남편이 잘못 하고 있는거 아니냐고.

그들이 해줄수 있은 가장 현명한 대답은 둘이 이야기 해서 잘 풀어라. 였다.

가끔 결혼 안한 친구들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며 같이 분노해줬다.


그러나 그것 모두 내가 원하는 만큼의 객관화된 평가가 아니었다.


사회생활 좀 해본 어른이랍시고, 거기서 뭐 사회의 대단한 진리를 깨달은 듯 의기양양하던 나는 가정이라는 새로운 사회를 만나며 보기좋게 무너졌다.


여긴 남편과 나 우리 둘뿐인것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열심히 하면 남편이 날 당연히 인정해줄거야.’ 라고 생각했지만 이놈의 끝도 없는 집안일은 내가 치운다고 표시도 나지 않는데다, 완벽하게 하기엔 회사일이 너무 많았고, 내 체력은 한계가 있었다.


난 남편이 내가 하지 못하는 부분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주길 기대했지만, 남편은 본인이 한다는 그 50프로 (내 입장에선 10프로) 조차 억울해 하는듯 보였다.

그가 집안일이 억울하다고 당연히 말로 꺼낸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었다.

“내 주변 남자들 중에 내가 집안일을 제일 많이 하더라. 내가 뭘 그렇게 안해서 나한테 자꾸 불만이야?”


그에게  집안일의 절대적인 양은 중요하지 않은거다.  사회에서 남자들이 평균적으로 하는 집안일 이상을 본인은 하고 있었고, 그는 나에게  사회에서 여자들이 하는 평균적집안일보다 내가 적게 하는 만큼 본인에게 감사하길 바랬을 것이다.

아마 그가 말한 집안일  50프라는  역시, 남자가 할만집안일 전체중 50프로, 그런 계산법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결국 당시 우리는 합의점을 찾지 못한채, 시간은 지나갔다.


결혼은 서로 의지해며 사는거라고들 하는데,

서로에게 거는 기대의 크기와 종류가 다를 , 그때오는 배신감과 좌절만큼 사이를 금가게 만드는  없을거다.


내가 할 수 있는건, 그에게 기대하지 않고 내가 할수  있는게 뭔지 알고, 할 수 있는만큼 한다. 고 생각하는 거였다.

힘이 부치는건 내버려두는 과감함도 필요했다.


남편은 아내가 당연히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우기는 건데 억울하지 않냐고?

억울하면 당장 그것 때문에 이혼할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돌아가는 길이지만 좋은 대안을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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