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
맨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물건
정리되지 않은 모습과
때론 냄새가 날 수도, 지저분해 보일 수도 있는 상태로
굳이 숨기려 하지 않고 맞닿는다.
중요한 건 편안함과 실용성
그리고 매번 같은 시작점이라는
자리에서 발을 내딛게 해주는 일이다.
다른 신발들을 위해 발을 단정하게 만드려 애쓰는 동안
하루의 끝에 무너진 자세 체중이 그대로 실린 순간들까지
말없이 받아들이며 바닥과 인간사이에 자신을 놓는다.
가벼워 보이지만 동행자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은 슬리퍼는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생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인생에도 그런 존재가 하나쯤 떠오른다.
정돈되지 않은 모습과 드러내기 싫은 허물을
설명하지 않아도 받아들이는 관계
버티고 있다는 사실조차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묵묵히 곁에 남아 무게를 나눠 갖는 사랑
아마도 사랑이란 그들처럼 허물을 고스란히 받아주면서도
어느샌가 발의 모양을 닮아 닳아 가듯이 그 무게를
알고 지탱해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