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언 초원에서 피어난 꽃 Oct 10. 2022
아무리 밖에서 사람들로부터 에너지를 얻는다 해도 결국 아버지가 돌아오게 되는 곳은 집이다. 쉬어야 할 곳도 머물러야 할 곳도 집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집은 좋은 장소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바깥이 밝다면 집은 어두운 곳이요, 바깥이 북적북적하다면 집 안은 쓸쓸한 곳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바깥에 머무는 시간이 많을 것이라 여겼다. 다른 건 몰라도, 힘든 것을 잊을 수 있는 곳과 다시 떠오르는 곳인 건 분명할 테니까.
하지만 또 한 번씩 밖에서 진탕 술을 먹고 들어오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다 보면 그것만은 아니라는 걸 느끼기도 했다. 어쩌면 그때만이 아버지의 평소 내색하지 않던 속마음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때였으니까, 저 모습에 비추는 마음은 믿어도 될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신다. 그런데 술 자체를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집에서 홀로 드신적이 한 번도 없다. 그걸 보면 술 자체를 따로 좋아하거나 혹은 위안을 얻거나 건강하지 못한 의존을 하는 쪽은 분명 아닌 것 같다.
우선 좋아하는 것을 떠나서 주량이 세기 때문에 술을 잘 드시는 편이고 그래서 술 약속에 자주 나가시고 시간을 한참 보내다 오신다. 그게 친밀한 사람끼리 노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생활의 한 일환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직까지도 남자는 술 담배를 하는 게 사회생활을 위해 필요한 요소인데, 과거에는 그 분위기가 훨씬 강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주량이 센 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할 때까지 무척 많이 드시고 오신 날에는 엄마는 잔소리로 아버지를 맞이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말이 거의 없는 과묵한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을 한 다른 사람을 만나는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바깥에서의 아버지의 모습, 또는 7살 무렵의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는 것 같았다.
사람이 술을 많이 먹게 되면, 속에 있는 무슨 말이든 물이 새듯이 줄줄 흘러나온다는 것을 나는 아버지를 보며 진작부터 알 수 있었다. 술을 많이 드신 아버지는 말이 정말 많아지셨다.
집에 막 도착해서 내 얼굴을 보면 평상시와 다르게 딸이라며 무척 반갑게 맞이를 한다. 정말로 반갑게. 그게 낯설면서도 아버지가 나를 봤을 때 원래 속마음이었을까 싶었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아마 술 때문일 거라 생각을 했지만 집에 막 도착한 아버지는 기분이 정말 좋아 보였다. 그걸 보면 집이 그저 끔찍하기만 한 곳이 아니라 그래도 저만큼의 안식과 마음 편함을 줄 수 있는 공간은 되는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버지 스스로도 한 번씩, 그래도 바깥에 있다가 집에 오면 기분이 좋다는 말을 하시곤 했으니까. 그 바깥이란 아마 친구들이나 사람들과의 술자리나 약속이라기보다는 일과 일하는 곳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신체적으로든 그곳의 사람들로 인한 것이든 가장 힘든 공간일 테니까.
그런데 술은 감정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만들기 때문에, 만약 기분 나쁠만한 것이 보이거나 떠오르면 그것이 하나도 통제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출이 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갑자기 분위기가 180도 확 뒤집어진 것 같은 섬뜩함이 엄습하게 된다. 즐거운 분위기가 전혀 다른 긴장되고 무서운 분위기로 뒤집어져 생기는 공포는 사춘기 시절엔 훨씬 컸던 것 같다.
그럴 때면 마치 가라앉았던 문제들도,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와 모습까지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그것은 싸움의 형태로 발전되기도 하고 정반대로 아버지의 외로움과 무게가 드러난 형태가 되기도 한다.
아버지는 술을 드실 때에만 비로소 감정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더 크게 웃고, 화를 내고, 슬퍼한다. 특히나 슬퍼하고 힘들어하시는 모습만큼은 아버지가 술을 드실 때에만 고스란히 볼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아버지가 평소에 가장 참고 있고 마음을 가장 무겁게 누르는 것이 그 감정이라는 소리이다.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 나는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오는 날이면 반갑게 맞아주는 아버지가 오랜만이라 좋다가도 유독 마음이 아파지기도 했다. 쓸쓸한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는 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