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부모의 부재를 대신하는 든든한 울타리

아버지의 가난과 형제의 우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부모를 여읜 채 살아오다 나를 낳으셨다. 자라는 내내 함께했고, 든든한 삶의 길잡이였던 언제나 함께하고 싶은 부모의 빈자리는 컸을 것이다. 부모가 되는 삶을 살기 전 자식으로의 삶만 살다 떠나보낸 것일 테니 말이다. 흔히, 부모가 되면 부모의 마음을 더 이해하고 더 잘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내가 태어나고 나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더 많이 생각나고 보고 싶지 않으셨을까.


그래도 아버지에겐 함께 커온 형제라는 아직 다른 가족들이 남아 있었다. 그 형제들의 수도 많아, 나는 고모도 많고 큰아빠도 두 분이셨다. 그 당시에는 평균적이기도 하다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7남매라는 크고 넉넉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형제들이 부모님의 부재 후에도 잘 버티게 만들어 주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 힘으로 자신의 인생도 잘 살아가시고 힘드신 와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건 그렇게 형제라는 부모를 대신한 울타리가 곁에 여전히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부모님의 부재 이후 남은 가족들이 힘이 된 것만이 아니라, 아버지가 자라서 커오시는 와중부터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 한창 가난한 시절에 태어나 그 가난한 시절을 어린 시절로 보내며 살아오셨다. 그 극심하던 가난이 어쩌면 아버지의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칠 만큼 큰 상처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상처를 충분히 치유해낼 겨를도 없이 살아가기 급급하다 보면 방치된 상처가 그대로 남아 계속해서 삶에 영향을 끼치고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는 법이다.


아버지는 다른 이야기는 스스럼없이 잘해도 즐거운 이야기와 반대되는 아프거나 슬픈 류의 이야기들은 잘 꺼내지 않는 편이신데 가난에 대한 것도 역시 그러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꺼내지 않듯이 굳이 나쁜 것을 끄집어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흔적 같은 것은 눌러도 드러나는 듯했는데, 바로 쌀밥이다. 건강에는 당연히 잡곡밥이 좋지만 아버지는 엄마가 잡곡밥을 할 때면 굉장히 싫어하셨다. 잡곡이 들어간 밥은 찰기가 넘치게 밥이 질어져서이고 어릴 적엔 쌀이 귀해 쌀보단 잡곡이 잔뜩 들어간 밥을 먹었기 때문에 더 그런 듯했다.

그래서 엄마는 요즘도 잡곡은 최소로 한 된밥을 주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이고 아버지도 백미로만 이루어진 즉석밥을 참 좋아하신다. 아버지에게 쌀밥은 부유하거나 적어도 가난하지 않은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뿐만 아니라, 애정 표현이나 관심 중 가장 우선이 되는 것이 결국 밥, 즉 먹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음식을 잘 먹어야 한다며 늘 음식부터 우선적으로 챙기고 뭘 먹으라는 걸 가장 많이 말씀하시는 것만 봐도 말이다. 것이 가장 힘들었고, 그래서 가장 걱정이 되고 또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비록 아버지가 겪은 가난의 형태와 고통을 세세하게는 몰라도, 그것을 짐작할 수 있긴 했다. 예전에 큰아버지로부터 들은 일화 때문인데, 아버지 본인은 아니었지만, 같은 가족이자 형제인 큰아버지의 일은 결국 아버지와 그 상황도 정도도 같을 것이기 때문에 동일시할 수 있었다.


한창 우유 역시 참 귀했던 시절에, 큰 아버지는 소년이 되어서야 우유를 처음 먹게 되었는데 신선한 우유가 아닌 다 상한 우유였다. 그런데 우유 자체를 처음 먹어보다 보니 엄청 맛있어서 정신없이 벌컥벌컥 먹느라, 상했기 때문에 나는 시큼시큼한 맛을 원래 우유 본연의 맛인 줄 알고 아 우유라는 건 이렇게 시큼한 맛이 나는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후에 바나나처럼 우유도 가격이 저렴해져서 많이 접할 수 있게 되자 본래 신선한 우유의 맛을 그제야 알게 되고선 자신이 먹었던 우유가 상했던 것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는 했다.


그 밖에 다른 가난했던 시절의 모습들은 직접 전해 듣지 못해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시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중 하나였으니 그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해도 힘들고 서러웠을 것임은 분명했다.

그래도 그 힘들고 배고픈 시절을 혼자가 아니라 비슷한 형제들과 함께 커오며 서로 돕고 살아오셨지 않을까. 그러면서 과거의 기억은 그저 마냥 고통이 아니라 함께 나누었기에 말은 그때 엄청 힘들었지라고 하면서도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지 않았을까.

콩 한쪽도 나눠먹으라는 말처럼, 가난이란 것은 사람이 많으면 각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적어지지만 함께 나누면 그래도 그 무게가 많이 덜어지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때보단 훨씬 살만해졌을 지금 형제 사이의 모습은 분명 가난하던 시절부터 돈독했고 그것이 이어져왔을 뿐일 것이다.


또한 형제들이란 단지 힘든 시절의 가난만 함께하기만 한 것 아니라 그런 시기임에도 힘을 합쳐 께 헤쳐나갔을 것이었다.


비록 그 당시 사회는 가부장적인 형태가 훨씬 더 강했지만, 그런 사회분위기가 침범할 수 없을 만큼 집안의 분위기는 더 굳건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가족은 이미 시대를 조금 앞서가거나 초월한 사상이 이미 형성된 채로 함께 하는 것이 가능했다. 힘든 시절도 다 같이 으쌰 으쌰 하며 힘을 뭉쳐 살아왔을 때에, 분명 남녀를 나누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의 어릴 적 일만으로도 충분히 장담할 수 있다.


가족끼리 모일 때는 간단히 맛있다는 음식을 사 와 나누거나 상을 차려 이미 만들어둔 반찬을 먹는 식사만 한 것이 아니었다.


노동을 같이 하면서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바로 만두였다.

우리 가족이 만두를 직접 손으로 빚어 만든지는 꽤나 오래되었는지 내가 어릴 때에도 마치 이미 분업이 된 것처럼 각자의 역할이 정해져 있는 채로 바로 만두 만들기에 착수했다.

제일 먼저 밀가루를 큰 대야에 붓고 물을 섞어 반죽을 한다. 직접 손으로 반죽을 하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들어 보통 큰아버지 같은 남자 어른들이 반죽을 한다.

그렇게 큰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만들면 그 반죽의 일부를 떼어낸 뒤 밀가루를 얇게 피는 기계에 넣어 돌리는 과정을 반복하며 얇게 만두피로 만든다. 이 것 역시 힘이 많이 들고 반복되는 과정이라 주로 남자 어른들이 함께 한다.

그렇게 얇은 만두피가 나오면 두 손으로 만두피를 걸치듯이 들어 밀가루를 뿌려 놓은 넓은 상에 그 피를 내려놓은 뒤, 주전자 뚜껑 같은 동그랗게 만두피를 찍어 낼 수 있는 단단한 틀이 되는 물건으로 일정하게 동그란 만두피를 찍어내듯 만든다. 이 과정은 쉽고 힘은 덜 들지만 주로 친척 오빠가 했다.


만두피를 수십 장 찍어내듯 만들었으면 그때부터가 여자 어른들의 할 일이다.

펼쳐진 만두피를 하나씩 가져가서 미리 만들어 둔 양념을 속으로 피 안에 넣고 만두를 오물조물 감싸서 만두 모양을 잡아 만두를 만든 뒤, 밀가루를 뿌려놓은 쟁반에 일렬로 늘어 둔다.

쟁반 하나가 꽉 차면 여자 어른 중 보통 큰어머니나 큰고모가 쟁반을 가져가 만두를 찌고 익은 만두를 가져와 내어 놓는다.


처음으로 찐만두가 나오게 될 쯤엔 아직 만두 만들기가 한창이기 때문에 만두를 만들면서 만두도 하나씩 먹는 재미도 있는 것이다.


7살 정도 되는 나의 역할은 처음엔 만들어진 반죽 중에 건조한 끝부분을 떼어 찰흙처럼 가지고 놀면서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다가, 큰아버지가 반죽을 피로 만들 때 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상 위에 앉아서 고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아직까지도 그 옛날의 상의 그림까지도 기억난다. 주황빛 비단잉어가 그려진 상이 었다.

좀 더 커서는 나도 같이 만두를 만들었다. 한자리에 앉아 아빠 다리를 하고 만들고 있다 보면 종아리가 터질 거처럼 아프기도 했다.


만두 만들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어느 한 명도 놀지 않고 그렇게 모두가 다 같이 하는 일이었다. 그 노동 끝에 먹는 만두는 보람차고 함께할 수 있어 더 맛있고 그 추억 역시도 좋았다.

그래서 일찍이부터 남아선호 사상이 강하고 가부장적인 사회와 시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교적 남녀가 평등하고 동등하게 대우받으며 성별보단 사람에 집중할 수 있는 집안에서 남녀평등을 일찍이 겪고 자랄 수 있었다. 오히려 학교에 가기 시작하고 외부사람들을 겪으면서 그 불평등을 뒤늦게 알아챘을 정도였다. 당연하다 생각한 것이 당연하지 않았던 거여서 그 괴리감이 낯설고 놀랄 뿐이었다.


이처럼 아버지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고 아버지란 사람을 훌륭히 키워준 집안과 형제들은 자식인 나에게도 마찬가지의 좋은 영향을 주었다.

비록 조부모님을 겪지 못하고 컸어도 아버지만큼은 , 그리고 아버지의 형제분들 까지도 고모와 큰아버지의 형태로 어릴 때에 정말 많이 겪고 자랄 수 있었다. 집안 분위기로 불리는 형태로 말이다.

아직 어린아이이던 시절에는 어른들 역시 아직은 젊은 편이었기에 그래도 여유가 조금 있는 편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떨어져 살아도 비교적 거리가 같은 도 안에 살 정도로 가까워서였을까?

이유는 잘 몰라도 상당히 자주 모였던 것 같다. 특별히 생일이나 제사, 집안 행사가 아니더라도 그저 밥을 먹자면서 모였다.


그렇게 모이게 되면 고모나 엄마 같은 여자 어른들이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에 남자 어른들은 부엌 옆 안방에서 방의 모서리 부분대로 나란히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하거나 그때 한창 인기 많던 대하사극을 보며 기다렸다.

나도 어린아이라서 아버지와 함께 있느라 그때의 남자 어른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그 이야기를 고스란히 듣게 되었는데,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님에도 어찌나 그 이야기들이 재미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어렸기 때문에 재밌다고 밖에 생각을 못했지만, 후에 생각해보면 그것이 상당히 유익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야기라곤 해도 마냥 시시껄렁하진 않았고, 오히려 토론에 가까웠다. 흔히 방송에서 보는 고성이 오가고 어느새 주제는 벗어나 서로 개인적인 공격을 하는 꼴 보기 싫은 수준 낮은 토론이 아니라 단어 말 그대로 생각을 나누고 공유하고 그러면서 의견을 확장하고 정보도 얻는 식의 고전시대 많이 행해지던 수준 높고 철학적 성격의 토론에 가까웠다.


가장 흔했던 주제는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나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그런 성격의 이야기들을 접했기 때문에 확장된 사고가 키워질 수 있었고 물질적이지만은 않은 관심사를 갖게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받을 수 있는 정말 좋은 조기교육이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거기에다가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같은 조카이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정말 원 없이 사랑을 받고 또 오히려 어리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안 된다고 제대로 혼도 나면서 자랄 수 있었다. 그래서 부모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형제들은 나에게 부모 혹은 스승 같은 역할을 해주면서 부모님만으론 부족할 수 있던 부분을 마저 채워줄 수 있었던 것 같다. 같기 다른 성격과 표현이었지만 그것의 방향성과 목적은 같았고 따뜻했다. 그것이 내가 받은 사의 한 형태였다.


한 번씩 사려 깊은 마음의 고모 같은 사람들은 모여 있을 때, 가 깊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 깊음은 내 스스로가 잘나서가 아니라 좋고 훌륭한 사람들의 영향을 일찍이부터 받고 그들이 나를 가르쳐 주며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시간이 흘러서 아버지의 형제들 역시 어느덧 나이가 많이 드셨다. 형제들도 언제나 함께 할 것만 같았지만, 역시나 부모님처럼 이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일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확실히 폐에 관해선 가족력이 있는 듯했다. 사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것도 결핵이라는 호흡기 질환이었고, 아버지도 현재 담배를 끊은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기침으로 고생하시며 나 역시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벌써 몇 해전의 일이다. 큰아버지가 병원에 가셨고 그 병명에 대해서 가족들에게 먼저 알려지게 되었다.

바로 큰아버지가 폐암에 걸리셨다는 거였다. 그것도 말기 폐암에. 당사자인 큰아버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였다. 그 날이후 큰아버지 한 분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자리에 모였고 평상시보다, 어쩌면 여태까지 모여 왔던 그 어떤 모임보다 무겁고 심각했다.

가장 먼저 사실에 대해 알릴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나왔다. 폐암이라고 말을 사실대로 해야 할지 아니면 숨겨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더군다나 말기였기 때문에 사실 수 있는 날이 몇 달이 남지 않은 시한부였다. 무조건 숨길 수도, 그렇다고 청천벽력의 소식은 그 자체가 충격일 것이라 병의 진행에도 영향을 줄 수 있어 쉽게 전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누구 하나 쉽게 말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도 그때는 어린 편이었지만 그래도 성인이 되었을 때였다. 나 역시 고민을 하다가 그동안 살면서 들어온 적 있는 말이나 조언, 사례들을 곰곰이 생각해 본 뒤에 의견을 꺼냈다.

그것은 사실대로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의 중간점이 되는 절충안이었는데, 명은 말하되 몇 기인 지에 대해선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후에 시간이 조금 더 흘러 가족들끼리 따로 충분히 생각하고 논의를 하였는지 큰아버지는 폐암 2기로 알고 계셨다. 그 하얀 거짓말이 작은 희망이 되었는지, 몇 개월밖에 사시지 못할 거라 했던 큰아버지는 운동도 열심히 하고 이겨내려는 의욕으로 2년을 더 살다 가실 수 있었다.

가족들도 마음이 아프지만 이별의 시간이 조금 길어질 수 있어서 인지 조금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었던 듯했다. 벌써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큰 아버지의 모습이 선하다.

큰아버지가 먼저 떠나시긴 했어도, 남은 형제들은 여전히 우애 좋게 지내며 함께하고 있다. 그 모습만은 꼭 그런 계기가 아니더라도 한결같은 게 좋으면서도 대단한 것 같다.


가난한 시기는 비록 지나갔고 나름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우며 각자 잘 살아가는 형제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가 있기에 예전보단 상황이 나아졌대도 다 같이 힘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고모는 자신도 넉넉지 않으면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오빠 이거 하면서 얼마의 돈이 든 봉투를 조용히 건네주더랬다. 모른척했지만 나는 그 모습에서 형제의 우애를 느낄 수 있고 그 마음이 따뜻해서 참 좋았다.


아버지를 비롯해 그런 가족들 역시 가족이란 형태로 함께 할 수 있고 내 주변 사람들이라서 참 감사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복중에는 인복이 있다는데, 참 복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 가까운 혈연일 수 있어서 행운이고 마찬가지로 잘 되었을 때 받은 것을 되돌려 드리고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형제들도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 그 행복은 길고 슬픔은 짧았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울타리로 오래오래 남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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