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잘하고 있죠? (8)

by 서화

유경 씨!


잘 지내고 있지요? 그걸 거라고 믿어요.

우리가 순례길을 걷고 온 지도 벌써 6개월이 지났네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내 삶에서 그곳에서의 경험과 그곳을 다녀온 후기의 질문을 받고 있으니 나와 유경 씨가 걸었던 그 길이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었던 것 같네요.


어때요? 유경 씨도 나처럼 한 번씩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아 사진과 기록을 찾아보곤 해요?

나는 그래요. 수녀원 알베르게의 부엌이 생각나지 않아 사진을 찾아보고, 철의 십자가로 향하던 안개 자욱한 그 길이 보고 싶어 또 사진을 뒤적여요. 뭐가 그리운지 분명하게 짚을 순 없지만 뿌연 안갯속에서의 차갑고 좁고 그리고 적막했던 그 길이 좋았나 봐요.


나는 지난주에 한라산 둘레길을 걷고 왔어요. 유경 씨가 추천해 주었잖아요. 등산도 걷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던 나와 달리 순례길의 다른 일행들은 다들 산에 대한 경험들이 진짜 많았죠. 그 사람들의 넘쳐나던 조언을 흘려들으라며 유경 씨가 내게 조용히 알려준 것 기억나요? “한라산 둘레길부터 가봐요” 했던 거.

귀국하자마자 예약했어요. 내가 참 유경 씨 말은 잘 들어요. 당신은 내게 그런 사람이에요.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5박 6일의 일정으로 제주를 걸었어요. 도착하는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6일을 꼬박 걸었어요.

둘레길을 걸으며 내가 누굴 떠올렸는지 알아요? 당신이요.

추천해 준 이라서가 아니라 유경 씨가 순례길에서 말한 ‘이끼 가득한 길’의 원조를 보았거든요. ‘아, 이래서 유경 씨가 이끼 얘기를 했었구나’ 단번에 알겠던데요.

그리고 왜 내게 이 길을 추천했는지 그 이유도요.


산 전체가 이끼 가득한 돌로 만들어진 것 같은 한라산은 순례길과 닮았지만 너무 달랐어요.

순례길처럼 깊고 서늘한 풍경을 보여주면서도 길 자체는 조금도 닮지 않아서 신기했죠. 한라산은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방금까지 어디를 거쳐왔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던 내 기분 이해하죠? 뒤돌면 순례길은 아득한 길이 보였다면 한라산은 분간할 수가 없었어요. 걸어온 길인지 길 옆의 풍경인지.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면 분명 길을 잃고 말았을 거예요. 출발 전 앞사람을 놓치면 안 된다던 대장의 조언이 현실적인 경고였다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죠.





유경 씨와 나, 우린 닮은 점이 많았어요. 기억나요?

서울에서부터 같은 디자인의 옷을 챙겨 와서 놀랐고, 다음 생에 태어나서 되고 싶은 것도 파일럿이라고 똑같이 말해 언니들을 놀라게 했었잖아요. 아이스크림도 엄청 먹었죠.

내가 감탄한 것이 뭔지 알아요?


만년필을 애장품으로 생각한다는 것 말고 온전히 감사했던 거요. 둘 다 침대 배정에도 방 배정에도 도통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에요. 되는대로 받아들이는 우리가 난 진심으로 사랑스러웠어요. 그렇게 나와 알베르게 고유의 스탬프 ‘쎄요’ 취양까지 비슷한 유경 씨는 내가 어떤 길을 좋아하는지도 파악했던 것 같네요.


순례길에 오기 전까지 내가 걸었던 길은 뱅뱅 돌아 다시 그 자리에 닿는 원형적 길이었어요. 공원을 여섯 바퀴 돌면 2 시간쯤 운동한 것이 되는. 반복적인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려 앞만 보고 걷는 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내 인생 같았거든요. 애써도 애써도 벗어날 수 없는 원안에 갇힌 것 같은.


순례길이 어떤 길인지 걸어보기 전에는 몰랐어요. ‘무념무상’이 되는 길이라고 해서 갔죠. 하지만 고민을 잊게 하는 특징 말고도 좋은 점이 하나 더 있더라고요. 한 번 간 길은 절대 다시 걷지 않는다는 점.

두 번 머무르지 못하는 알베르게처럼 38일 동안 똑같은 길은 결코 없었죠. 나는 원형이 아닌 선형의 걷기가 온전히 행복했어요. 하루가 고단했음에도 다시 걸을 에너지가 만들어진 것은 내가 이 길 자체를 도전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일 거예요. 반복되지 않는 변화가 잘 살고 있다는 증표 같았거든요.

어제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나는 앞만 보고 걸으면 될 것 같았어요. 원하는 미래로.


제주에서도 그랬어요. 6일 내내 같은 길은 없었죠. 그래서 유경 씨가 날 제대로 간파하고 있다고 한 거예요.

제주에서의 둘째 날 자신을 소개하는 ‘치맥 데이’가 있었는데 나는 나를 이렇게 소개했어요.

“딸 셋과 아들 하나를 20대로 키우고, 같이 살던 어른이 돌아가시고 나니 무한한 시간의 여유가 생겼어요. 나를 위해 어떤 선물을 할까 생각하다가 절대적인 자유가 그리워 순례길을 선택했어요. 그래서 한 달 반 동안 프랑스길을 완주하고 왔습니다. 예약해 놓고 기다리는 동안 ‘걸을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을 때 여행사 대표님이 그러더라고요. 그 길에서 수많은 천사를 만날 거라고. 정말 천사는 많았고 그 천사 중에 한 명이 제 짝꿍이었습니다. 짝꿍이 이 한라산 둘레길을 추천해 주었어요. 그 인연으로 여기에 왔고 또 이곳의 인연으로 어떤 도전을 하게 될지 기대됩니다.”




짝꿍씨.

자랑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 더 있어요.


제주 여행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스페인의 대도시를 향해 걸어 들어갔던 것처럼 이 도시에서도 선형적인 걷기가 하고 싶어 졌어요. 그래서 또 도전했죠.

네이버 지도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을 도착지로 정하고 3시간 가까이를 걸었어요. 꼬불꼬불한 마을 길에서는 하교하는 초등학생들을 만났어요. 엄마 손을 잡고 활짝 입 벌려 웃는 꼬맹이도 만났고요. 낯선 길이었지만 낯설지 않은 풍광에 나도 모르게 광대가 올라가서 더 씩씩하게 팔저어 걸었어요. 잊고 있었더라고요. 내가 학부모였던 시절을요. 나와 내 아이도 저렇듯 따뜻한 오후였겠죠?


빌라와 아파트와 상가로 이어진 꼬불꼬불한 길을 거쳐 다다른 한강 대교는 기분이 묘했어요. 걸어서 한강을 가로지르는 대교를 건넌 적이 없다 보니 다리 위에서 자꾸만 걸음을 멈추었죠. 붉게 불붙어가는 하늘이 새롭고 멈추어서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여유 있어 심장이 터질 듯 좋았어요. 특별할 것 없던 시간이 온통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던 경험. 유경 씨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우리는 짝꿍이잖아요.

그렇게 걷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어요. 버스를 타고.

같은 길은 여전히 걷기 싫었어요. 더 많이 걷고, 돌아올 걸음은 계산하지 않아도 되니 마치 순례길 같았죠. 어때요? 나 잘하고 있죠?


유경 씨도 많이 걷고 있어요?

조지아 트레킹도 다녀왔을 것이고 어쩌면 또 다른 길을 여럿 걸었을 수도 있겠네요.

나랑은 걸음 보폭부터가 다른 사람이니 내가 상상도 못 하는 도전들을 하고 있을 것이라 믿어요.

나도 조금씩 내 걸음을 넓혀보려고 해요.

나보다 더 나를 잘 파악하던 유경 씨 덕분에 즐거운 마음으로 또 다른 길을 찾아보고 있어요. 세상에 길은 많더라고요.


순례길의 감동이 한라산에 도전할 용기를 주었듯이 나는 또 다른 길에서 당당해지고 싶거든요. 그러다가 기적 같은 행운을 만나는 건 어떨까요?

길 한가운데서 유경 씨와 재회하는 장면. 상상만으로도 좋네요.

건강하고 멋있게 그렇게 느닷없이 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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