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선생님 네 분은 유독 나를 이뻐했다. 가장 어린 선생님과 내가 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으니 어쩌면 나도 그들 나이에 해당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자꾸만 그들과 동선이 겹치기도 했고 혼자 온 나의 외로운 점심을 챙겨주면서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제주 한라산 둘레길을 걷는 여행이었다.
망설임 없이 단독 신청을 했었다. 제주는 외국이 아니니 더더욱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혼자 하는 식사가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다. 센터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죽을 예약해 혼밥을 해도 좋았고 입에 맞는 겡이국을 찾아 세 번의 아침을 개장 첫 손님으로 여행의 묘미를 만끽했다. 하지만 혼자 하는 식사가 즐겁다고 해도 타인들의 시선으로는 마냥 편안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네 분의 선생님은 도시락을 꺼내먹을 때만큼은 나도 일행으로 챙겨주셨다.
셋째 날 저녁, 구미에서부터 챙겨 온 다기 세트로 우리는 공유주방에서 다도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늦은 시간에 차를 마셔도 수면에는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좋은 차를 나누며 마음껏 웃었다.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산에서의 점심, 센터에서의 아침, 그리고 다도.
선생님들은 나에게 농담처럼 멤버로 들어올 생각이 없냐고 했고 나는 그저 웃었다. 구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모임이라…
예전 같았으면 나는 고민에 빠져 힘들었을 것이다.
‘진심이면 어쩌지?’
‘자꾸 연락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들은 나를 잘 모르는데 그럼 나는 어디까지 진실해야 하지?’
생각에 빠져 걸음조차 무거워졌을 수도 있다. 나는 유난히 ‘인연’에 약하다. 이것도 인연인데…하면서.
선생님들은 진심이었다. 진지하게 두 달에 한번 정도 서울에서 모임을 갖자고 제안까지 했다.
“우리랑 정말 잘 맞는 사람 같은데… “ 몇 번을 말하던지.
나는 마지막 날 잠깐의 휴식 시간에 막내 선생님께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에너지를 얻고 싶어서예요. 제가 하고 있는 글쓰기도 영어 공부도 발전을 이루고 싶어서요. 아마 저는 돌아가서 더 바빠질 것 같아요”
우린 공항에서 이별했다.
“아까운 사람인데 못 봐서 정말 아쉽다”
“가끔 제 사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해 주세요. ‘이 사람 잘 살고 있겠지? 잘 살고 있을 거야’ 라고요”
“다들 건강하시고 무탈하세요”
짐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은 듯 가볍고 홀가분하게 돌아섰다.
어디서 읽은 글이다.
‘50이 넘어가면 정리해야 할 때다. 넓은 관계가 아니라 좁아도 편안한 관계가 필요하다.’
나도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마주칠 때마다 상처받고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사람을 친구에서 삭제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 와중에 새로운 모임이라…
8년 전쯤 막내가 고2가 되면서 나는 결혼 이후 첫 아르바이트에 도전했었다. 7개월밖에 못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만두는 날 나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모임을 만들자는. 멤버는 세 명.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은 2년여 동안 같이 근무한 절친이었다.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근무지에서 보이는 성향만으로 그저 인생을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아줌마들 같아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라 그 자리에서 동의했었다.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꼬박 6년을 보내고 우리는 끊어졌다.
무거운 경제적 부담으로 힘들어하던 그들이 자녀들의 취직으로 형편이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심 기뻤다. 투덜거리는 짜증 섞인 말투를 더는 하지 않을 것이고, 영화도 같이 보고 좋을 책을 서로 권하면서 삶의 방향을 바꾸어 긍정적이고 즐거운 에너지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그들의 푸념과 화를 참아내며 모임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던 건 나뿐 아니라 그들도 행복해 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노력하며 버티어온 엄마들의 삶이 성공적이기를 말이다.
변한 것은 없었다. 좋은 책과 아름다운 영화. 그리고 여유로운 여행 같은 것은 나눌 수가 없었다. 서울로의 이사를 준비하며 나는 잠깐 고민했었다. 먼저 연락하지 않는 그들에게 이번에도 내가 나의 이사를 알려야 할지.
그게 끝이었다.
시작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유지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나 같은 사람은 시작도 충동적이면 안되었다.
상대가 요구한다고 일단 받아들이고 적응하면 된다는 시도는 나한테는 맞지 않는 방법이었다.
나는 명확한 인생 공식을 만들었다.
‘내 시간과 노력은 내가 선택한 것에만 투자하자.’
타고난 것인지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민이 지나치게 많던 나였다. 타인이 먼저인 나였다.
‘내가 거절해도 될까. 그 사람이 상처받았다고 하면 어쩌지?’
‘거절했는데도 연락해 오면 뭐라고 하지?’
두루두루 원만하게 사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 믿고 살았다. 그래서 나의 힘듦을 보며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는 시누의 전화조차 거절하지 못한 등신이었다. ‘당신 인생의 원동력을 위해 나를 이용하지 마세요’ 한마디 못 해준 걸 내내 억울해하면서 말이다.
그랬던 내가 네 선생님들의 영입 제안에 과도한 부담을 갖지 않은 건 ‘좋은 것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방법’으로 거절도 유효하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거절하고도 행복한 경험까지 이미 한 후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같이 걷던 일행은 대장까지 모두 14명이었다.
그들과 이리저리 얽히면서 걸었고 잠을 잤고 밥을 먹었다. 고맙고 감사한 이들도 있었고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세상은 다양하니까.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니까.
대장은 순례길이 끝난 후에도 모임을 계속하고 있는 작년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다들 잘 걷고 좋은 추억을 이어가자고 첫인사를 꺼냈었다. ‘정말 좋았나 보다. 우리도 끝나면 그렇게 친해질까’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단톡에서 탈퇴했다. 나보다 앞서 그리한 이가 있어서 과감하게 따라 했다.
너무 단호하게 내 의사가 전달된 것 같아 잠깐 고심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의 그립고 고마운 동행들은 자신들의 삶을 충실하고 단단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그 험난한 여정에서 깨달은 자신들만의 행복에 감사하며 말이다. 지금의 나처럼.
가족만큼 가까워졌던 이들과의 이별도 거리낌이 없었던 것은 소중한 기억을 변형시키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컸기 때문이다.
산티아고도, 한라산의 둘레길도 기억 속에서 자랑스럽고 따뜻하게 내내 유지되고 있다.
나의 거절은 행복한 선택이었다.
기억을 추억으로 만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