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의 거울이 된다는 것 (13)

by 서화

저녁 설거지를 하다가 카톡 알림에 고무장갑을 벗고 돌아섰을 때 막내가 거무스름하고 두툼한 잠옷차림으로 거실을 지나 나에게 다가왔다.

“뭐 필요한 거 있어?”

답은 않고 갑자기 두 팔을 벌려 다가온다.

곰같이 시커먼 놈이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오고 있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지레 겁먹은 내가 바짝 긴장하며 멈칫거리자 막내는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정말 감사해요”

뜬금없이? 갑자기 왜?

“엄마가 제 엄마라서 정말 행복해요”


맞다. 막내는 오전에 자신의 엄마 때문에 삶이 고달프다는 친구와 통화를 했었다. 이제 환갑이 된 친구의 엄마는 아무런 경제적 노력 없이 자꾸만 아들에게 돈을 요구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친구는 더 나은 직업을 위해 배달일을 중단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고 막내가 안타까워했었다.

‘그 친구의 엄마를 보니 내가 고마운 건가?’

‘나는 계속 무슨 일이든 해서?’

“왜 인성이가 엄마 때문에 힘든 거 보니까 내가 고마워?”

“그것뿐이 아니라 엄마가 제 엄마라서, 누나들이 내 누나라서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야. 술 취해서 너한테 막말하고 뒤치다꺼리시키는 누나들이 뭐가 감사해?”

집안 분위기상 정직한 표현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 도리어 더 직설적으로 반문했다. 요 며칠 사이 둘째와 셋째가 연말술자리로 막내와 나의 평화로운 일상을 어지럽게 했었다.

술에 취한 누나들을 위해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편의점으로 숙취해소제를 사러 가질 않나, 3차 식당에 놔두고 온 가방을 다음날 대신 찾으러 가기까지.

아무튼 그리 살가운 누나들이 아닌 걸 알기에 나는 내 앞에서만큼은 솔직했으면 했다.


막내는 웃었다.

술 취해서 횡설수설하던 누나들이 생각나는지 고개를 저으며 박장대소했다.

그리고 시원하게 물을 한 컵 들이켜고 웃음기 지운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의 지금 이 성격, 제가 하는 생각들. 이 모든 것들이 다 엄마와 누나들이 만들어 준 거니까요. 그래서 저는 항상 감사하고 행복해요”

더 이상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없게 막내는 제법 진지하게 날 보고 있다.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며 나는 두 팔을 벌려 다시 내 아이를 안았다.

“그래 우리 서로서로 많이 많이 감사하며 살자”

“고맙다 그렇게 말해줘서. 나도 네가 내 아들이어서 좋아”

무슨 일이 있었구나 짐작만 했다.

다시 캐묻기엔 막내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감정만 받아주는 것도 괜찮은 대응일 듯싶어 한참을 안아주었다.


새로운 인연으로 사람들을 알아가며 막내는 이전에도 한 번씩 솔직한 속내를 내비치곤 했었다.

“엄마. 세상에 우리 누나들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 왜? 다른 사람들도 치열하게 살 텐데?”

“열심히들 사는 건 맞는데 우리 누나들만큼 바르고 정직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나도 누나들처럼 살려고요. 그럼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막내의 고백을 딸들에게는 전하지 않았었다. 기고만장하는 추태(?)를 보고 싶지 않았고, 막내의 순수하고 이쁜 감정을 다른 말들로 덧씌우기 싫은 엄마의 욕심이었다. 막내의 말을 듣고 내심 딸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마음도 일었다. 자신의 삶에 누구보다 진지하고 올바르게 살고 있다는 건 엄마인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가족끼리 서로 신뢰하고 가르침을 받는다는 건 무엇보다 뿌듯하고 흥분되는 감사였다. 하지만 엄마인 나는 조금 더 무겁게 느껴졌었다.

앞으로도 잘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해진 무게랄까.

그러던 차에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친구랑 5일간의 일본여행을 다녀온 셋째가 한 보따리 싸 온 선물을 풀어헤쳐 놓더니 앉은자리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진짜로 엄마한테는 좀 더 특별한 걸 사드리고 싶었는데”

“왜? 그런 게 없었어?”

나는 여행에서 사 오는 선물은 일단 사절한다. 먹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고 더군다나 필요한 물건이 없는데 쓸데없는 시간과 돈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의 선물은 직장 동료들의 선물을 제외하면 거의 다 먹을 것들이었다. 커피. 초콜릿. 그리고 가락국수 같은 현지인들에게 인기 있는 품목들.


“실은 저희가 벼룩시장을 갔었어요. 마침 우리 숙소가 그 마켓이랑 가까워서요”

엄마가 좋아하는 독특한 찻잔 같은 걸 찾으려고 했단다. 그렇게 골동품 같은 오래된 물건이 진열된 장소를 헤매다 딸아이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고 말하며 다시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이상한 물건이라도 있었어?”

“아니요. 그냥 도자기부터 엄청 오래된 것 같아 보이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오래된 물건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무서웠어요”

“일본과 우리가 앙숙처럼 지낸 역사 속 물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어요”

“한국인의 원망과 분노와 억울함이 같이 묻어있을 것 같아 소름이 돋으면서 겁이 나기 시작했는데 우중충한 날씨까지 더해서 진짜 싫었어요. 이런 걸 사갔다가 엄마가 왜 사 왔냐고 화내실 것 같았고요”

동시에 딸아이의 친구도 음산한 기운을 느꼈고 둘은 도망치다시피 빠져나왔단다.

자신이 그렇게 역사적인 관계로 일본을 적대시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그날 그곳에서는 기이했다면서 딸아이는 말했다.

“그래서 엄마 건 못 사 왔어요”

잘했다 잘못했다 그런 말은 안 했다.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이 있을 때마다 나는 목소리가 탁해지고 막힌 것을 토해내듯 일본이라는 이웃나라의 잔인함과 무례함을 내내 지탄했었다. 말끝에 잊지 않고 한마디까지.

“그 민족성은 절대 안 변해”

치켜뜬 눈으로 그곳에서의 음산했던 기분을 표정으로 보이는 딸아이가 나는 고맙고 기특했다. 일본을 싫어하는 엄마의 마음에 공감해 줘서.

“내 선물은 필요 없어. 먹을 것 많이 사 왔으니 됐어”






정말 부모는 거울이다.

부모의 말과 행동에 따라오는 책임감이 무섭도록 무겁게 다가왔었다.

내가 일본을 싫어하니 결국 내 아이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내가 살아가며 보이는 말과 생각들이 내 아들의 성격과 신념을 만드는 초석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고민이 깊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 아이들과 나의 신념을 분리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나의 판단은 오롯이 내가 겪어온 시절과 내 경험에서 나온 것이니 니들에게 엄마처럼 하라고는 하지 않겠다고 정확하게 전했었다. 그리고 지금껏 그 약속은 지켜지고 있다.

한 번도 일본 땅을 밟지 않은 나와 달리 어릴 적부터 일본문화를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던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일본을 자주 다닌다.

다양성을 인정하니 평화로울 수 있다.

그렇게 나름 고민하며 엄마처럼 편견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 안의 것을 바로 내려놓지도 못하고 있다.

그저 나의 일상에 반듯함과 떳떳함을 채워가는 것 말고는...

부모에게 가장 무서운 스승은 자식이 맞구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2) 혼자 있어서 화목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