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미’라는 TV 프로그램이었다.
결혼하고 한 번도 혼자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는 남편이 아내에게 지금까지의 노력으로 3일이라는 허락까지는 받아냈는데 하루를 더 얻고 싶어 이 프로에 출연했다는 진부한 사연까지 듣고 TV를 껐다. 부부끼리 가야 좋지 왜 혼자 가냐. 꼭 가족들이 아니라 친구들하고도 여행을 가면 좋지 않으냐 뭐 그런 의견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예전 기억이 떠오르며 순간 불쾌했다.
아이가 둘 이였을 때라고 기억된다.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사흘동안 혼자서 여행을 가고 싶다고. 게다가 어디로 가는지 누구랑 가는지 묻지 말아줬으면 한다고. 뜬금없이? 이게 무슨 의미지?
불현듯 스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이 말이 나오기 몇 달 전쯤에 있었던 일이다. 웬만해선 낮에 집으로 전화를 잘하지 않는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조금 있으면 경규 와이프한테서 전화가 올지도 몰라”
“왜?”
“와서 지난 주말에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물어볼 거야” 반응 없이 가만히 있었다.
“실은 경규가 와이프 몰래 인터넷으로 여자를 사귀다가 그 여자를 지난 주말에 대전에서 직접 만났나 봐. 그걸 와이프한테 들켰는데 경규가 나하고 갔다고 거짓말했대. 그래서 좀 도와달라고 전화했더라고”
“뭘 도와달라고? 당신이 같이 갔다고 말해달라고? 당신이 같이 갔었다고 하면 뭐가 달라져?”
“그 와이프가 나랑 있었다고 하면 믿을 테니까”
“뭘 믿는데? 인터넷으로 알게 된 여자를 직접 만난 건 맞는데 같이 자진 않았다. 뭐 그걸 믿게 해 달라는 거야?”
“그렇지”
정말 잤는지 안 잤는지는 중요한 쟁점이 아니다. 이미 그놈은 나쁜 놈이다.
“꼭 그렇게 해 줘야 해?” 진심 뜨악했다.
“한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막자는 거지”
한참을 고민하고 말했다.
“생각해 볼게. 끊어. 그리고 경규랑 통화도 만나는 것도 줄여. 계속 연락하면 내가 그 와이프한테 확 불어 버릴 거니까”
며칠 후 진짜 연락이 왔다. 그런데 아픈데 없이 잘 지내냐, 아이들은 잘 있냐 뭐 그런 일상적인 안부만 묻곤 끝이었다. 아마 그 와이프 입장에서는 내가 참 안쓰러웠을 거다. 남편이 바람피운 것도 모르고 고생하는 내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자신보다 내가 더 불쌍하다는 마음에 위로받았을지도 모른다. 그 전화 후 며칠 동안 나는 솟구치는 화를 힘들게 참아야만 했다. 그 나쁜 놈이 내 남편의 동기이면서 언니의 초등 동창이라 내가 정말 부처님 불러가며 참았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묻지 마 여행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아, 이놈도 그놈한테서 물들었구나.’
날 바보 취급하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화가 났지만 묘하게 흥분은 되지 않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속이 빤히 읽히는 남편이 어리석게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고 싶은 이유가 뭔데?” 감정을 덜어내고 나름 차분하게 물었다.
“힘들어서 에너지 충전이 하고 싶어”
“그 에너지를 꼭 다른 데 가서 얻어 와야 해?”
“그러고 싶어. 나쁜 짓은 절대 안 해”
힘들다는 단어가 계속 머리에서 맴돌며 내 전의를 희석해 버렸다.
‘나도 힘들고 너도 힘들구나.’ 그래서 짧게 답했었다.
“그래. 갔다 와”
“진짜?”
“그래. 힘들어서 쉬었다 오고 싶다며. 그리고 내가 당신을 못 믿는 것도 아니니까. 근데, 당신이 갔다 오고 나서 그다음엔 내가 3일 동안 충전하러 갔다 올게”
“아니 너는 왜?”
남편은 펄쩍 뛰며 크게 소리쳤다.
‘이놈 봐라. 왜라고?’
“나도 힘드니까. 나도 충전이 필요하니까. 당신 나 못 믿어? 나도 나쁜 짓 절대 안 해”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보던 남편이 일어서며 말했다.
“없었던 걸로 할게”
“왜? 갔다 오라니까. 안 묻는다니까”
내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진심이었다. 솔직히 그 사람의 3일보다 나의 3일에 잠시 달뜨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내 ‘사흘의 자유’를 말하는 순간 없었던 것으로 하잔다. 머리가 뜨거워졌다.
‘이 새끼 나쁜 생각하고 있었네’
“없었던 일로 할 거니까 당신도 잊어”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는 남편의 등을 보며 일침을 날렸다.
“앞으로는 하고 싶은 거 요구할 때 나도 해도 되는 건지 미리 따져보고 말해. 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건 없어”
부부의 역할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역할의 고단함조차 차별로 구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남편의 힘듦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나 또한 휴식 없는 육아로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고단함을 인정하고 동시에 나의 노력도 인정받길 원했던 나로서는 당연한 요구를 했던 것이다.
내가 아는 평등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