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처지는 게 아니라 머무르는 거야

by 서화

2026년. 또다시 다른 해가 시작되었다.


시작을 준비하는 마무리로 나는 매번 가계부를 산다. 결혼 이후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이어온 나만의 즐거움이었다. 우리 집의 방대한 일과를 적을 넉넉한 입출금내역 공간이 있는지, 하루를 마치며 짧게나마 나의 기분을 끄적일 메모난이 있는지, 덤으로 작은 요리코너가 있어도 좋고. 어느 해에는 표지색이 화려해서 눈에 들었고, 어느 해엔 차분하고 순한 파스텔톤을 샀었다. 일주일, 한 달, 일 년의 계획을 미리 짜고 실천하는 치밀하고 방대한 프로젝트 같은 건 없었다. 가계부 잘 쓰면 돈이 모인다는 광고성 멘트에 이끌려서 시작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몇십 년을 이어온 명분에 절약이나 반성, 뭐 그런 경제적 요인은 애초부터 없었다.


나는 그냥 반복되는 루틴이 필요했었다. 지루하고 단순하지만 꼭 있어야 하는 완결 편. 뒷걸음질 친 하루였어도, 미친 듯이 내달린 시간이었어도 마침표를 찍으면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잠들기 전 가계부를 적으면 나의 하루는 명확하게 끝이 났다.

10여 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 복잡했던 하루를 단순하게 만들었다. 아이가 아파서 종종거린 하루도, 남편과의 언짢은 대화로 자꾸만 살아온 인생이 후회로 마무리 지어가던 날도, 돈이 나가고 들어오고 그래서 계산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그 숫자만이 중요한 가계부가 나를 격려해 주는 것 같았다.

‘돈이 잘 맞네. 오늘도 잘 살았구나. 수고했어’


가계부의 첫 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로운 한 해 동안 완성하고 싶은 것, 지속하고 싶은 것, 그리고 성공하고 싶은 것들을 예쁜 메모장에 적어 붙여놓았었다.

영어 공부도 중단하지 말고 이어가자.

요가도 욕심부리지 말고 하루하루 해내자.

아이들에게 짜증 내지 말고 하루에 한 번씩 안아주자.

음악을 듣자.

일기를 쓰자.


일기는 가계부 안에 썼다. 메모칸이 모자라면 아래위 여백에 흘겨 적었다. 각 잡고 앉아 예쁜 노트에 얌전하고 단아한 내 글씨로 쓰려던 일기는 단 하루도 성공하지 못했다. 우울과 불안과 그리고 자책. 어두운 감정만을 담는 일기장은 필요 없었다. 짧지만 내 감정을 홀가분하게 정리해 주는 가계부에 남겨 숫자와 같이 날려버리는 것이 나의 처방법이었다. 매일을 새로 시작하기.




2025년 아이들과의 합가를 준비하며 처음으로 가계부 책을 사지 않았다. 글을 쓰기 시작하니 고백할 메모난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정이 없는 단순한 계산의 가계부라면 ‘금전출납부 앱’이 더 적합할 것 같았다. 핸드폰 하나에 점점 더 많은 것을 담게 되고 의지하게 되는 것 같아 잠시 고민했지만.

‘멋있잖아. 디지털 시대인데’


2026년. 나는 예전으로 돌아왔다. 가계부 책을 다시 샀다.

기계라는 것이 이름과 달리 놀랍도록 착오가 잦았다. 그 단순한 계산을 자꾸만 틀려 내가 되짚어보게 만들었다. 어디서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확인하게 했다.

‘알아서 해 준다며?’

‘입력만 하면 총지출도 잔액도 자동입력 되는 거 아니었나’

‘나의 씀씀이까지 분석해 준다고 했는데…’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내 숫자들에 아예 손을 놓아버린 2025년이었다.

‘차라리 카드 앱에서 내 지출을 확인하는 게 빠르겠다.’


그 앱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따져보면 정확하고 똑똑하게 사용 못 한 나의 무지함이 더 클 것이다. 설정을 잘 못 해 놓았을지도 모른다. 펜으로 쓰는 것과 달리 디지털 기계는 일일이 그 기능을 체크해서 찾아 써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최소한을 썼다.

종이 책처럼 한눈에 일주일치가 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위아래 이동시키며 하나씩 확인하는 사용법에 첫날부터 당황했던 나였다.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작했으니 1년은 채워야지 고집하다가 나의 2025년은 통째로 뭉개져 버렸다.




종이책으로 다시 하루를 마무리하는 요즘.

앞서간다고 무조건 내게 좋은 것은 아니라고 나 자신을 위로한다.

핸드폰으로 은행업무를 보고, 친구들과의 모든 약속과 교류를 하고, 장을 보고, 심지어 신용카드와 교통카드까지도 하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지겠지.

그러니까 한 가지쯤은 고집스럽게 거부해도 괜찮지 않을까.

핸드폰에 계산기가 있음에도 여전히 구구단을 외우고 암산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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