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와 셋째가 침대 끝에 나란히 앉아 날짜 계산을 하고 있다.
띄엄띄엄 끊어지며 들리는 대화로 봐서 남은 연차를 확인하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방에서 나오다 소파에 앉은 나와 눈이 마주친 둘째가 씩 웃으며 다가왔다.
“혜주랑 같이 호주여행을 갈까 싶어서 날짜를 맞춰봤어요. 가능할 것 같다는데 혹시 엄마도 가실래요?”
“나도? 언제?”
“12월 말부터 1월까지요”
올해 초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내가 또? 싶었지만 얼른 “좋지”했다.
일단 무조건 된다고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딸들은 제일 먼저 자신의 친구들과의 동행을 계획한다. 문제가 생기면 고민 없이 취소하거나 그다음 선택지로 가족을 찾았었다.
가족 중에서도 엄마인 나는 맨 끝순위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장성한 자식들은 부모와의 여행을 효도관광쯤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나도 인지하고 있다. 선택지가 많은 젊은이들 입장에서는 친구가 더 좋겠지. 나이 많은 나도 친구가 최고니까. 하지만 친구라고 다 좋은 여행 동반자는 아닐 것 같다. 이 문제에서는 아이들이나 나나 같은 입장이지 않을까. 내가 다니는 미용실의 원장님은 지인이랑 둘이 호주여행을 다녀온 후 연락을 끊었다고 털어놓으며 조언했었다.
“친구라고 무조건 좋을 거라고는 생각지 마세요”
많아지는 나이와 상반되게 좁아지는 친구의 범위에서 과연 시간과 경제력과 체력 그리고 여행에 대한 소망과 견해가 같을 확률은 얼마일까. 제로에 가까운 그 확률에 기대는 것보다는 아이들이 던지는 동행에 무조건 참여하는 것이 실현성이 더 높을 것 같다.
나는 짧지만 명확하게 동행의 의사를 전하고 기다렸다. 기다리다 보면 알려줄 것이니까.
“엄마. 비행기랑 숙소 이제 예약하죠”라고.
갑자기 셋째에게 차질이 생겼다. 회사 사정상 10일이 넘는 기간을 휴가로 쓰기가 힘들어져서 여행에서 빠질 수밖에 없게 되었고, 둘째 입장에서는 엄마라도 있어 취소하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했다.
이제는 나도 억지로 끼여가는 입장이 아니니 기분 좋네.
여행준비가 시작되면서 내가 떠올린 대화.
3년 전 큰딸과의 스위스 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큰아이에게 물었었다. 엄마와의 단 둘 여행. 어땠냐고.
“좋았어요. 엄마가 맛있는 식사도 만들어주고 저는 좋았죠. 그런데.”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라고?
“다음에 누구랑 같이 가게 되면 혼자서 계획하려고 하지 말고 서로서로 의논해서 준비하도록 해요”
어느 시점에서 나의 독단적인 계획이 있었는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
“엄마랑 다시 가라면 갈래?”
“네. 나는 다시 가고 싶어요”
나는 큰 아이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게 뭐 그리 감동적인 답이라고 울컥하기까지. 돈도 내가 더 많이 썼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고마웠다. 내가 엄마이기 때문에. 자식들과의 동행시간이 점점 줄어들일 만 남은 나이 들어가는 엄마이기 때문에.
둘째는 계획적이고 준비성이 큰 아이다. 혼자서 준비한다고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 아니어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비행기와 숙소를 뺀 모든 일정의 계획을 몇 번이고 수정하며 나에게 브리핑했다.
우리는 시드니에서만 10여 일을 보낼 것이라고 미리 공지하더라. 여기저기 옮기느라 시간을 소비하는 것보다는 한 곳에서 조금은 여유 있고 느긋한 휴식을 하자고.
나는 둘째의 계획과 예약스케줄에 “재밌겠다” “그거 알아보느라 수고했네” 무조건이었다.
나에게는 동행하는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첫 번째였다. 그곳에서 어디를 가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을지는 미리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여행에는 예상하지 못하는 변수가 없을 수가 없으니까. 날씨에 따라서 우리의 몸 상태에 따라서 선택지가 달라질 수 있기에 나는 그저 딸아이의 즐거운 계획을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리고 놀랍고 새롭고 신기하고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 어떻게 나타날지 기대하며 호주로 시드니로 갈 것이다.
출발을 사흘 앞두고 저녁을 먹으며 셋째가 한숨을 내뱉었다.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는 나를 보며 웃더니
“한동안 엄마 저녁이 없겠네요”
연말이라 행사까지 겹쳐 매일 야근하는 셋째의 고단함을 알기에 나는 떠나는 여행준비가 아닌 남겨진 이를 위한 여행준비도 같이 해야만 했다,
냉동실 가득 채우기.
불고기, 고추장불고기, 목살, 삼겹살, 고등어, 연어 등등
취업준비에 아르바이트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막내에게 밥 잘 챙겨 먹으라는 당부를 끝으로 둘째와 나는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드디어 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