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는 빵과 커피를 앞에 두고도 쉽사리 포크를 들지 못하고 있다.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엄마, 진짜 언니가 이해가 안 가거든요. 진짜요. 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하면서도 바꾸지 못하고, 여전히 다른 사람말에 전전긍긍하고. 무시하라고 해도 못하고, 그렇게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데 들어주는 나도 정말 힘들어요”
언제나처럼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푸념 같아서 순간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내가 이런 말을 듣자고 주말 아침에 한 시간이나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닌데.
내 반응을 읽은 듯 둘째는 당겨 앉았던 의자에 다시 등을 기대며 깊게 한숨을 내쉰 후 나의 어깨너머를 쳐다보았다.
짧은 침묵. 어색한 공기에 내뱉는 숨소리조차 불편했다.
“실은 어제 회사에서 일이 있었거든요. 자꾸만 실수하는 동료 언니와 같은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남자 동료가 너무 힘들다고 술 한잔 하자고 해서 둘이서 한잔했어요”
둘째는 그 사람과의 대화에서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자신이랑 같은 T인 성향의 그 사람이 이해할 수가 없더란다.
“그냥 실수구나 넘길 만한 일도 그 사람은 용납을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지나치게 꼼꼼하고 계획적인 T의 성향이 좋지만은 않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엄마 그거 아세요? 우리 집에서는 저만T예요. 다 F고 저만T라고요.”
갑자기 이 분류가 마치 누군가의 설계된 결과물인 것처럼 둘째는 억울해했고, 점점 목소리가 탁해지며 격앙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도대체 뭐냐고 묻고 싶을 만큼 MBTI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제 남자 동료의 생각을 듣다 보니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F인 사람들이 T인 사람들의 생각과 말투에서 어떤 벽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요. 예상 못한 답변과 사고의 방향이 그저 ‘저런 사람도 있구나’로 끝나지 않고 ‘정말 이상한 사람도 있네’라고 결론지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나도 언니를 그렇게 단정 짓고 있었구나 갑자기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가 서로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어쩌면 태생부터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요.”
웃음이 터져 버렸다. 주위 시선도 잊고 정말 고개 젖히고 목젖이 다 보이도록 파안대소했다.
언니를 이해한다니 반가웠고, 저렇게라도 이해하고 싶었구나 기특했고, 그리고 그 요상한 분류에 기대는 요즘의 복잡한 사회적인 기류가 내 삶에도 흘러들었다는 것을 감지해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다르다는 것을 찾아 상대를 멀리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도구로 쓴다니 나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꼭 그런 게 필요할까?
경주야.
엄마 이야기 들어볼래?
너희들의 나이가 이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8살, 7살, 5살, 3살.
막내랑 셋째가 차량 2열에 애기 의자 2개에 앉았고, 언니랑 너는 3열에 피크닉 시트 같은 것으로 평평한 바닥을 만들어서 거기 누워서 잤었던 것 같다. 나도 오래돼서 기억이 선명하지 못해.
아무튼 수혁이를 제외한 너희 셋은 시간을 정해놓고 번갈아가며 시트에 앉기로 정했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때는 혜주가 앉았어.
마지막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을 해결하고 다시 고속도로를 탔을 때였어.
시원한 바깥공기도 쐬고 간식 하나씩 먹은 후라 잠에서 완전히 깬 너희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지나가는 다른 차들을 향해 “적군이 가까이 오고 있다. 다들 전투준비” 뭐 그렇게 놀고 있었어.
인주랑 경주 넌 엎드렸다 뒤돌아 앉았다를 반복하더니 다시 나른해진 차 안의 공기에 젖어 얌전히 입을 다물고 창밖만 보고 있었어.
그때였어.
네가 앞 좌석 시트에 앉아있던 혜주를 아주 다정하게 불렀어.
“혜주야!. 언니 이야기 잘 들어봐”
“너가 버스를 타고 가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탔어. 그럼 너는 어떻게 해야 해?”
“할머니?” 잠시 어리둥절 고민하더니 확신에 차서 답하더라.
“자리를 양보해야지” 그렇지 잘 배웠다.
운전하는 아빠랑 앞 좌석의 엄마는 앞을 보고 있었지만 뒤통수에 달린 눈으로 그 미묘한 기류가 느껴졌어.
‘쟤가 뜬금없이 뭔 소리야?’
네가 말했어.
“그렇지? 너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타면 양보해야 하는 게 맞지? 근데 혜주야. 언니가 나이가 많아? 너가 나이가 많아?”
여기서 나는 소리 없이 꺽꺽 웃었어. 갑자기 너의 의도가 예상되었거든. 그래도 에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역시나 너는…
“언니가 나이가 많지? 그러면 너가 양보해야겠지?”
엄마는 정말 눈물이 날 만큼 웃느라 아무 생각을 못하고 있었어. 뱃가죽이 당길 만큼…
혜주가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부스럭거렸어.
“응. 언니”하면서.
엄마가 얼굴을 반쯤 뒤로 돌리며 웃음기 지운 얼굴로 말했던 거 기억나?
“아니야 혜주야. 그냥 앉아 있어. 움직이지 마. 그리고 경주야 지금은 혜주가 앉아 있을 시간이야. 정한 규칙은 따라야지. 좀 불편해도 참아”
“네” 너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들이더라. 시도해 보고 아님 말고 하는 성격은 그때부터도 있었던 것 같네.
엄마는 너를 잘 알고 있었단다. 네가 언니나 동생에게 무언가를 얻고자 할 땐 아주 근거 있는 이론을 조곤조곤 설명하여 상대를 굴복시키는 이성이 있었다는 걸 말이야. 하지만 뭐 그리 걱정스럽진 않았어. 너의 이론을 잠재울 엄마의 이성도 강했으니까. 너희의 MBTI가 뭔지는 몰랐지만 엄마는 그저 내 자식들의 성향을 파악해서 그렇게 키운 거야.
지금생각해 보니 너도 언니와 동생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네. 상대에 맞추어 전략을 짰으니 말이야.
혜주는 우리 둘 다 인정하는 감성파야. F 지. 그래서 감정을 건드린 나이 든 할머니의 예시에 두말없이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던 거잖아.
너와 인주도 달랐지.
인주는 초등 4학년에 접어들면서 친구관계가 삐걱대기 시작했었어. 친구들 중에서 빠른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인주. 그런 인주에게 고맙다고 표현하던 친구가 어느 날 짜증 섞인 날카로운 말을 내뱉어 버렸지 뭐야.
“남 신경 쓰지 말고 니 거나 잘해”
혹 너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인주가 그날 참 많이 울었잖아.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엘리베이터에서도 한 번씩 마주치던 아이였는데, 인주는 이해할 수 없어서 더 많이 슬펐던 것 거야. 사춘기가 원래 그렇잖아. 그 시기에 그 아이의 세상은 우주 밖인 것처럼 현실 자체가 못마땅한 거.
울고 있는 인주를 한참 지켜만 보던 네가 아주 명쾌한 답을 해주었었어.
“언니. 앞으로는 도와 달라고 하는 사람만 도와줘. 나서서 도와주고 욕먹는 건 처음부터 하면 안 되는 바보짓이야. 고마운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도와줄 필요가 없는 거야. 알겠어? 그리고 그만 좀 울어.”
인주는 앞으로 마주칠 때마다 불편할 그 친구와의 사이가 더 속상했을 텐데…
“언니, 그냥 이렇게 생각해. 그래 넌 네 인생 니대로 살아라 나는 내 인생 산다”
초등 3학년의 인생관치고는 아주 놀라웠지.
너는 원래 그랬어. 감각적이고 현실적이었지.
너의 “잊어버려. 잊어버리면 제일 간단해”라는 조언이 어떤 때는 엄마인 나도 납득하기 어렵거든.
정말 잊을 수가 있나? 그게 마음먹는다고 돼?
너는 되더라고..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가족은 모두 서로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어. 자신과 달라서 안 맞다며 괄호 밖으로 밀어버렸던 거지. 그러던 중에 세상에 MBTI라는 것이 공공연하게 나왔네. 또 자세히 살펴보니 내 성격도 맞는 것 같고 언니도 동생들도 그리고 엄마도 모두 다 다른 점이 확실하게 보이네. 그렇게 확인받고 나니 우리 마음이 받아들이기가 편해진 것 아닐까?
가족 다섯 명 중에서 같은 MBTI는 없어. 그렇지만 장담하건대 혹 같은 MBTI의 사람을 만난 경우라도 우리들은 또 탄식할 거야. “우와 저 사람 나랑은 달라” “나도 T인데 저 사람은 대문자 T야” 이렇게.
‘한 공장에서 나왔는데 어찌 넷 다 이렇게 다를까’
내가 자주 하던 푸념이었는데 엄마인 나는 어떻게 너희들의 다름을 그 예전부터 알고 있었을까.
내가 너희들을 아주 많이 사랑해 왔다는 증거지. 사랑하면 깊이 보게 되고 자세히 느껴지고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거든.
세상 엄마들의 위대함이지.
그러니 나의 네 보물들, 인경혜수!
MBTI에만 크게 의존하지 말고 찬찬히 상대에게 관심 가지고 지켜보자.
우리는 한 식구잖아.
엄마밥으로 똘똘 뭉친 한 가족.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