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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버 Apr 03. 2023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을 읽고..

악마적인 삶의 프레임에 빠졌을 때...

살다 보면, 누구나 위기를 겪기 마련입니다. 본인에겐 절대적인 위기처럼 보이는 사안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할 수 있는 타인의 눈에는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위기를 겪으면 시야가 좁아져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만 보입니다. 눈앞에 닥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그 위기를 

만든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못하고 충동적인 해결책에만 집착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당장의 위기 

보다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주력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게 쉽게 보이는 데 말이죠. 

위기에 벗어났던, 그 위기에 함몰되어 더 큰 나락에 떨어졌던지, 나중에 자신의 모습을 보면 그 

위기의 구조 속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자책과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문제점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자신의 삶을 둘러싼 프레임이 제대로 보이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내 깨닫게 

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내 삶을 둘러싼 프레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이죠.

우리의 삶에서 무의식은 삶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거나 등교하고, 

밥 숟가락을 들고, 어딘가를 향해 걸을 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의식을 따라 행동하지요. 

모든 행동의 90퍼센트 이상이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삶에 한 번 자리 잡은 프레임은 

절대적입니다. 우리 삶이 속한 그 프레임은 매우 단단하고 그 프레임에 오래 머물수록, 그 경계는 

더욱 단단해지고 익숙해집니다. 




저자가 유흥업소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tv에서 홀어머니와 사는 한 아들이 각막 

이상으로 실명의 위기에 놓였다는 사연을 보고 업주가 후원해서 도움을 주었다는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업주는 익명으로 여러 후원과 기부도 했다고 합니다. 아가씨들의 선불금과 과도한 벌금, 

이자 등등 아가씨들을 착취하고, 남은 술을 재탕하는 등 결코 정당한 소득이라고 보기 어려운 

돈으로 말입니다. 선행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그 행위가 왠지 도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아가씨들을 착취하는 그 프레임 자체가 갖는 악마적인 속성은 그대로 있고, 

그 안에서 벌어들인 가치로 선행을 하는 것은 가식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업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번 돈으로 선행을 했고, 그 선행 자체는 순수한 것이 

아니겠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의 근간에는 착취가 일상화된 프레임에 오래 살아왔기에 

그 자체가 그냥 일상이고 평범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악마에게 왜 그렇게 악행만 하고 사냐고 묻는 다면, 난 이게 삶이고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선과 악이든, 노예적인 삶이든 한 프레임에 갇히면 그것은 곧 일상이 되고 삶은 원래 그런 것이라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안에서도 희로애락이 존재하고 때로는 안정감을 느끼기도 

마련이니까요.


저자가 유흥업소 생활을 마치고도 시민운동을 하면서도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이따금씩 다시 

유흥업소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한 번 프레임에 한 번 갇힌 다는 것이 인간의 생각과 

영혼마저 그 안에 가둬 버릴 정도로 막강한 것임을 증명합니다.

저자가 유흥업소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가족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가족을 돈벌이의 수단 

정도로만 여기는 부모의 권유로 중학교를 자퇴하고, 공장에 취직한 뒤 우연한 기회에 유흥업소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단지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20살도 안 된 나이에 

말이죠. 우리 삶의 프레임은 가족에게서 만들어지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삶을 시작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경우에 가정환경을 의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돈만 추구하는 저자는 가족에게 좀 더 돈을 보낼 수 있다는 맹목적인 이유 하나 때문에 유흥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무조건 돈만 추구하는 가정에서의 프레임이 거의 처음으로 시작한 

사회생활을 유흥업으로 이끌게 되었고, 저자의 거의 처음이었던 사회생활은 착취가 횡행하는 

유흥업의 프레임 속으로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처음에는 집에 돈도 보내면서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합니다. 원래 어려웠던 집안 경제를 살리려는 

작은 위기의식이 자신을 엄청나게 큰 위기 속에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을 것입니다. 

결국, 선불금이라는 발목에 잡혀 유흥업소에서 벗어날 수 없는 큰 프레임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선불금이라는 빚은 그녀를 유흥업소라는 프레임에 완벽하게 가두어 버립니다. 빚이 있는 이상, 

그녀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고, 집에도 더 이상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본격적인 성매매로 내몰리게 되어 자신의 몸마저 망가지게 됩니다. 선불금이라는 빚은

여전히 그녀를 유흥업소에 잡아두며 정신과 영혼을 갈아먹는 강력한 프레임으로 작용합니다.


한 번 갇혀버린 프레임은 그 경계를 더욱 공고하게 다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곳에서 안주하는 

것은 물론이고 안정감까지 느끼게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저자는 유리방에서 독하게 일한 대가로 

유흥업소에서 빠져나옵니다. 그 지옥 같은 삶에서 빠져나온 뒤, 직업은 없었지만, 보통의 

일반여성처럼 소소한 행복을 잠시나마 느끼며 삽니다.

하지만, 유흥업소 생활이 사회생활의 거의 전부였던 그녀가 다른 직업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유흥업소에서 생활이 몸에 전부 배었기 때문에 그녀의 생각과 태도, 

몸은 모두 유흥업이라는 프레임에 너무나 단단하게 갇혀 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다시 그녀는 유흥업소로 돌아간 뒤, 몸과 마음이 철저히 망가집니다.


사실 그녀는 20대 초반에 유흥업에서 빠져나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헌신적으로 사랑한 한 

남자가 선불금을 해결해 주고 안정된 삶을 보장해 줄 수 있음에도 그녀는 남자를 보냈습니다. 

남자가 자신에게 드리워진 유흥업의 짙은 그림자를 견뎌내지 못할 것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든 그녀에게 더 이상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을 때, 다시 한 남자가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었고, 그녀는 그 손을 잡습니다. 유흥업에서 빠져나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살지만, 그녀가 

20대 초반에 헌신적인 남자를 보낸 이유가 곧 드러납니다. 그녀를 구원해 준 남자는 그녀의

과거 경력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결국, 갖은 폭력에 시달린 그녀는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여러 번 유흥업에서 탈출하려던 그녀는 그저 받아주기만 했을 뿐인 가족에게 돌아간 뒤에야 비로소 

완전하게 유흥업에서 빠져나옵니다. 물론 가족에게는 유흥업소에서 일한 과거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경력은 모르지만,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를 가족들은 받아들입니다. 그렇다고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과거의 미안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가족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망나니가 되었든, 그 어떤 괴물이 되었든 받아 줄 수 있는 것은 

가족이고, 가족은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녀가 중학교를 자퇴하게 

하고, 공장에 보내졌을 때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좀 더 돈을 벌어 집안경제에 보탬이 되려 

유흥업에 뛰어든 것처럼 가족 안에 일어나는 일들은 무조건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 하는 그녀를 그냥 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돌아온 그녀는 가족과 살면서 

유흥업소에 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녀는 공장에 다시 취업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이 살아왔던 유흥업의 프레임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언니가 바지 하나를 산 뒤, 자랑하면서 어떻냐고 묻자 그녀가

“좇나, 좋아요.” 

라고 말하자 그 언니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비로서야 자신의 과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과거를 숨기고 돌아온 가족의 품에서 그녀는 과거와 거리를 둘 수 있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처럼 힘겨워하는 여성들을 돕습니다.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유흥업소에서 일하다가 온몸이 엉망이 되어 시한부의 삶을 살게 된 20대 

초반의 여성을 돕는 과정에서 그 어린 여성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지금 시한부의 

삶을 사는 순간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과거를 다시 한번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점차 

자신의 삶을 망가뜨렸던 과거 삶의 프레임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 뒤,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과거의 흔적을 완전히 털어내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책을 보고 나면,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어느 정도는 깨지게 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닐지 몰라도 상당수의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폭력적인 착취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빠져나가고 싶어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상황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에 그녀들에 대한 

인권을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녀들의 인권에 대해 말을 하지 않으니, 업주들은 더욱 마음 

놓고 착취를 하고, 자신들의 업소에 여성을 고용하는 것에 대해 부담이 덜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술집은 어디를 가던 여자를 원하면 불러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남자들은 여자가 나오는 술집을 자꾸 찾게 되고, 많은 여성들은 유흥업소의 유혹에 노출됩니다.

악순환은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그 프레임은 더욱 견고하고 그 뿌리는 너무나 깊습니다. 

하지만, 술집을 중심으로 한 유흥문화의 잘못된 프레임은 너무나 사회 깊숙이 견고해서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노래방을 가도 여자를 부르고, 좀 더 노골적인 요구를 하는 그런 문화는 

모두 잘못된 프레임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고, 어쩌면 그 문제의 중심은 유흥업 종사자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가 제도화된 노동시장으로 편입되지 못해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하게 됩니다. 이런 인식을 위해서는 우선 유흥업소들이 작동하는 큰 그림, 즉 그 

폭력적인 프레임을 제대로 인식해야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제대로 풀릴 것입니다. 

저자가 부끄러운 과거를 과감히 드러낸 이 책의 내용이 단순히 성 경험담이나 고생담의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의미를 갖는 것은 문제가 가득한 성매매 구조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사족:

몇 년 전에 나온 책인데, 글을 올리기 전 검색해 보니, 사이에 익명으로 책을 저자가 악플에 

엄청나게 시달렸던 모양입니다. 입에 담을 없을 정도의 심한 악플이라고 하니, 대강 짐작이 갈 

만합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다.'라는 생각은 무서운 신념의 프레임입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이 스스로 정당하다고 판단한다면, 폭력적인 언어와 행동도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의 프레임에 빠지면, 끊임없이 폭력적인 언어와 행동을

생산해 낼 것입니다. 폭력의 생산자는 자신에겐 명분과 목적이 있다고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겠죠.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존재가 되어 가는지, 폭력의 노예가 되는지 알고나 있을까요?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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