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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버 Feb 09. 2024

길고양이와 동냥

나의 소중한 동정심에 대하여..

구청에서 몇 년 전부터 벼르던 회심의 하천 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개인사업자, 주택을 자의가 아닌 타의로 떠나게 된 이들의 보상 처리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는지,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한 동안 걸렸었다. 하지만, 하천 사업이 

본격화되어 공사가 커지자 그 현수막들은 모두 사라졌다.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게 된 사람들인데, 좀 잘해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막연한 동정심이 들기도 했다.


뭐, 이런 느낌으로 만들겠다고 하는데, 완공되고 봐야겠지요.


공사가 시작되면서, 기존의 길들은 거의 폐쇄되었고, 통행을 위해 임시로 낸 길들이

곳곳에 생겼다. 그 임시로 낸 길에 어느 날부터 길고양이 한 마리가 자주 출몰했다.

추운 겨울날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동정심을 일으키게 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고양이를 위해 먹을 것, 물, 따뜻한 담요가 담긴 박스로 만든 집을 만들어

주었다. 고양이도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지, 사람들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고 쓰다듬어도 움직이지 않고 '야옹' 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는 듯싶었다.

그에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는지, 가끔은 박스로 만든 집이 박살 나고, 먹이통이 

내동댕이 쳐진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지만, 사람들의 온정이 더 많은지 먹이와

물, 박스로 만든 집은 여전히 있다. 길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약자

앞에서 따뜻한 마음을 여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참 인간적이라 생각했다.

사실, 저 눈빛과 같은 초조함과 긴장으로 사는 불쌍한 녀석들이죠


한 밤 중에 화장실에 갔다 온 뒤, 잠이 도통 들지 않아 tv를 켰다. 

아흔 살이 넘은 할아버지가 길거리에서 동냥을 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누추한

모습으로 동냥하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져 채널을 돌리지 않고, 한 동안 봤다.

그런데, 동냥을 마친 할아버지는 택시를 타고 무려 2만 원 정도 비용이 드는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식당에 들어서 메뉴를 두 개나 시켜서 식사를 했다.

자기 집에 돌아간 할아버지는 식사전단지를 꺼내 촬영팀의 식사까지 배달을 시키고,

2만 원이 넘는 돈을 지불했다. 자기 집에 온 손님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동냥을 할 장소로 역시나 택시를 타고 도착한 뒤, 허름한 차림으로 손을 올린 채,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 동냥을 하는 절박한 모습과 달리 할아버지는 쏠쏠한 수입으로 씀씀이도 꽤 큰 모양이었다.

처음에 들었던 동정심은 이내 배신감 비슷한 감정으로 바뀌면서, 어이없다는 생각과 함께

다시 잠을 청했지만, 택시를 타고, 식사를 시킨 뒤, 만 원짜리를 거림 낌 없이 내던 모습이

자꾸 꿈속에 나올 것처럼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동냥은 이렇게 두 손으로 하는 건데, 그 할아버지는 한 손으로 받습니다. 다만, 넋 나간 표정은 방송에도 출연했으니, 백상예술대상을 주어야 할 듯.


구청에서 벌이는 공사는 여전히 지속 중이다.

공사 구간이 워낙 커서 임시로 낸 길이 여러 곳이 있는데, 지난번에 사람들에게 먹이, 물, 집을

지원받던 고양이가 있던 그 길에서 멀지 않은 길에도 먹이, 물, 박스로 만든 집이 보였다. 별 관심 없이

지나친 것은 길고양이는 많고, 사람들은 애정이 넘치니까라고 생각한 순간, 그 자리에 나타난

고양이는 아무리 봐도 앞 선 언급한 그 고양이가 맞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녀석이 주로 활동했던

그 임시 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잘못 본 것 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다르게 보려도 해도

그 녀석이 맞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쳐다보면서

'야옹' 하면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고양이 소리를 내는 모습은 녀석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양쪽에서 먹이를 받아먹고, 집도 여러 채를 가진 셈이라고나 할까? 아니, 더 많은 곳에서 저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순간, tv에서 동냥하던 아흔 살 노인이 떠오른 이유는 뭘까?

동정심으로 바라봤던 녀석이 갑자기 얄밉다고 해야 할까? 약아빠졌다고 할까? 뭐, 그런 비슷한

부정적인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본능에 사는 길고양이가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속일 생각은 없었을 테니,

그런 쓸데없는 감정은 이내 잦아들었다.


주인 잘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데, 눈은 왜 그렇게 뜨니? 너도 길고양이 해 볼래?


진부하지만,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우리가 알고 있고, 보고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 세상의 일부일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세상에 일어나는 일의 일부만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다 죽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일일이 조사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내 선한

의도를 누군가는 이용하기도 하고, 난 그것도 모른 채 뿌듯해하는 바보가 될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체 말이다. 그리고, 나처럼 tv를 통해, 때로는 직접 경험을 통해 내가 알던 사실과

내가 알지 못하는 더 큰 사실에 가끔은 큰 괴리가 있는 상황을 다시 경험할 것이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보이는 현상에 부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 정말로 도와줘야 할 누군가가 있는데,

"쇼 하네~"

하고 빈정거리는 지경까지 갈지 모른다. 


혹시 입장을 바꿔, 자신도 이런 경험을 행여나 하지 않았을까?  나는 사실 별 것 아닌 일을 했는데, 

선생님에게 과도한 칭찬을 들었던지, 친구들에게 과대평가를 받아 굉장히 우호적인 대접을 받은 경험 말이다.

분명 있을 것이다. 나만 사실 이면에 다른 면을못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 이면의 나의 모습을 모른다. 그래서 결국, 서로를 모른 체, 주고받고, 오해도 하고, 내가

과장되게 포장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속된 말로 '셈 셈' 아닐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동정심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약자를 위해 아무 대가 없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을 때, 우리는 인간적인 세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단지, 자신이 잘 알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추측으로 당연히 가져야 할 인간적인

동정심을 버린다는 것은 나 자신과 내 인생이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생각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내 약자에 대한 따뜻한 동정심은

소중히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


ps:

길을 걷다 동냥을 하는 노숙자를 봤는데, 뒤에 숨겨놓은 돈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너무 불쌍해 보여서

적선을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적선한 돈이 노숙자에게 부의 축적에 절대적인 기여를 할 것도 아니고,  난 나대로 내 순수한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소중히 간직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정도면 내가 손해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남의 동정심을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쌓는 인간들을 볼 때, 이용당한다고만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그보다 

더 나쁜 놈은 세상에 너무나 많고, 그런 나쁜 놈들을 피해살 수 없다. 돈 많은 이들의 불법은 욕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가장 중요한 것은 내 평정심. 내 인간적인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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