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이라는 폭력성에 대하여...
영화의 리뷰라기 보다는 영화가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에 격하게 공감이 되어 쓴
글이기에 리뷰나 영화평이라기보다는 저의 주관적인 감상평입니다.
한 때, 전역 후 취업 문제로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낙인찍힌다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를 알고 있기에 영화 보내 내내 제 과거가 떠올라서
더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스포는 처음부터 왕창 있으니, 영화 안 보신 분은 주의 바랍니다.
약자를 대하는 개인이나 집단, 사회의 태도에서 본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사회나 약자는 존재한다. 어떤 사회는 약자를 돌보고, 어떤 사회는 약하니 마음껏 약탈하고
조롱하기도 한다. 70년대부터 산업 격동기를 겪은 우리 사회는 안타깝게도 후자에 속했다.
경제는 역동적으로 발전했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폭력은 애써 외면했다.
먹고살기 힘든 것을 벗어난 게 어딘데.. 라면서 한가하게 인권을 고려할 여지도, 생각도 없었다.
정영희는 그런 과정에서 우리들이 외면했던 폭력에 희생된 우리들 지난날의 추한 자화상이다.
영화 내내 정영희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괴물같이 못 생겼다는 말만 있을 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들이 이모들에게 어디 장애가 있었냐고 물으니, 그건 또 아니라면서도 괴물 같이 못 생겼다고 한다.
그러니, 관객의 입장에선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말에 의지해 계속 장애가 있는 듯한 추한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영화 막판에 드러난 정영희의 얼굴은 영화 내내 괴물과 같았다고
하던 모습과는 달리 지극히 평범한 얼굴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정영희는 집단에서 괴물같이
추한 인물로 낙인이 찍혔던 모양이다.
수도권 도심이 이렇게 커진 것은 70년대부터 농촌에서 올라온 이들이 도심에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도시는 도시지만, 농촌의 공동체 가치를 중시하는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기에 도시임에도
농촌처럼 공동체의 가치를 추종한다. 농촌은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기에 공동체의 판단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누군가를 공동체가 못 생긴 이로 낙인찍으면, 그때부터 낙인찍힌 이는 공동체의 판단이 뒤집히기
전까지는 헤어 나올 수 없기에 그 집단을 떠나던지, 그 낙인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야 한다.
비극의 인물이 된 정영희는 안타깝게도 후자에 속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를 더욱 장애가 있는
괴물에 가까운 추녀로 상상하게 되는 것은 그녀의 행동이 특별한 장애가 없음에도 마치 장애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행동과 말투가 그렇다. 누구에게나 이쁘게 보이고 싶고, 말도 예쁘게 하고 싶은 그 젊은 나이에
정영희는 마치 중학생 아이가 울면서 투정을 하듯 거친 말투로 시종일관 말을 한다.
이 부분이 사실 가슴 아팠다. 실제 자신은 그렇지 않은데도, 주변의 말에 의해 스스로 무너져 내리다가
아무렇게나 막사는 듯한 모습이 그렇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을 거의 듣지 못했는지, 장님이 도장을
파주면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하자 마음을 열다가 청혼마저도 덥석 받아들인다. 자신의 모습을 못 보는
이의 순수한 애정을 처음으로 느꼈을 것이고, 앞으로도 받지 못할 감정이라고 여겼는지 모르겠다.
정영희는 아마도 앞을 못 보는 남편을 만나, 더 이상 자신의 외모로 인한 불행은 없을 거라
생각한 듯싶은데, 그것은 오판이었다. 애초에 지극히 평범한 그녀를 괴물 같은 추녀로 만든
것은 저항 못하는 약자에 대한 폭력적인 낙인이 그렇게 만든 것이니까.
그렇기에 그녀의 얼굴 본모습보다 사람들의 입이 더 중요했고, 남편의 귀에 그녀가 추녀라는
사실이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여기서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외모에 대한 무시, 멸시를 넘어 조롱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정영희는 어려서부터 추녀라는 말을 들어왔기에 내성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앞을 못 보는 남편은 사람들 말에 의하면 미녀인 아내를 얻어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온 자기 인생
도약의 변곡점으로 삼은 듯하다. 그런데, 실제 자신의 아내는 괴물 같은 추녀이고, 사람들의 조롱
섞인 사기에 속아서 미녀인 줄 알고 결혼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조롱했을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모양이다. 하지만, 장애를 갖은 남편이 비장애인들에게 보복이나 복수를 할 수
없었다. 끓어 오른 분노는 애꿏게도 아내인 정영희에게 향해 죽음에 이른다.
약자에 대한 폭력은 그렇게 악순환되면서 약자를 괴롭히거나 또 다른 악마를 만들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런 약자들에 가해지던 폭력을 외면해 왔다. 이젠 지나간 이야기라고 하지만, 약자에
대한 배려나 폭력을 등한시한다면, 약자에 대한 폭력은 다른 형태로 지속될 것이다.
영화 속 pd가 정영희를 시청률 올리는 데, 필요한 도구로 여기는 모습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약자를 보호, 배려하지 않는 사회는 과거처럼 원시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자신도 스스로를 속이고 합리화하며 계속 폭력을 계속 자행할 것이다. 지금은 괜찮아도,
내일 당장 내가 장애를 얻거나, 약자가 된다면 그 폭력 속에 누구나 삶이 갇힐 수 있는
지옥을 늘 곁에 두고 산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우리는 간과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