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일
말라기 1:2-5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는 말에만 관심을 기울였는데, 지금 다시 보니 하나님이 에서는 미워했다고 하시고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을 책망하는 부분이 뒤이짐을 새삼 발견했다. 그래서, 말라기 시작 부분은 독자들에게 에서의 미운 행동을 상기시키고 제사장들의 미운 행동을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읽어 보고 싶어 졌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라기 1:6)
제사장들이 그들은 주의 이름을 멸시한 적이 없다고 하니, 하나님을 멸시하고,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제사장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콕 짚어 말씀하신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라기 1:7-14)
나는 이 부분의 중요한 단어의 히브리어를 찾아 보기로 했다.
1. 멸시와 공경 (6절)
내 이름을 멸시하는(בֹּזֵי שְׁמִי, 보제 쉐미): 6절의 내 이름을 '멸시'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자'(בָּזָה)는 단순히 무시하다는 의미를 넘어 '가치없는 것으로 여기다', '경멸하며 내팽겨치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제사장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불렀지만, 마음의 중심에서는 하나님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서에게도 그런 용어를 쓰셨을까 싶어 창세기를 찾아 보니, 창세기 25장 34절은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후,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라고 기록한다. 한국어로 번역되어 달라 보이지만, 히브리어로는 '바자'(בָּזָה)와 정확히 동일한 단어였다. 성경은 에서와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이 동일한 종류의 죄를 지었음을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보여준 것이다.
공경(כָּבוֹד, 카보드): '공경' 또는 '영광'으로 번역되는 '카보드'의 원래 의미는 '무게감', '중요성'이다. 자녀가 아버지를 공경한다는 것은 아버지를 삶에서 가장 무게 있고 중요한 존재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은 전혀 무게가 없는, 가벼운 존재로 여겨졌다.
2. 더러운 떡과 더럽혀진 식탁
더러운 떡(לֶחֶם מְגֹאָל, 레헴 메고알): '더러운'으로 번역된 '메고알'은 '오염되다', '더럽혀지다'라는 뜻이다. 이는 먼지가 묻은 수준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부정하여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상태이다. 레위기 법에 따르면 제물은 흠이 없어야 했지만, 그들은 흠있는 제물을 바침으로써 쓰레기 같은 부정한 떡을 바친 것이었다.
3. 눈 멀고 병든 희생제물
눈 먼 것(עִוֵּר, 잇웨르), 저는 것(פִסֵּחַ, 핏세아흐), 병든 것(חֹלֶה, 홀레): 이 단어들은 모두 레위기 22장 20-25절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서는 안 된다고 명백히 금지된 것들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인간 지도자들에게도 차마 드릴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 처리하듯 바친 것이다.
훔친 물건(גָּזוּל, 가줄): 13절에서는 심지어 훔친 물건을 제물로 가져왔다고 말한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에 죄를 지어 얻은 것을 드리는 모순을 범한 것이다.
4. 번거로운 일과 코웃음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מַה־תְּלָאָה, 마-텔라아): '번거롭다'로 번역된 '텔라아'는 '고역', '지긋지긋한 수고'를 의미한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하기 싫은 일', '귀찮은 노동'으로 여겼다.
코웃음치고(הִפַּחְתֶּם, 힙파흐템): 이 단어는 '경멸하며 콧방귀를 뀌다'는 뜻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보며 "에이, 저까짓 것" 하고 비웃었던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하셨듯 제사장들도 미워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에서의 예화를 중심으로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았다. 에서의 마음과 제사장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신성한 것을 속된 것으로 멸시함(바자)
- 에서는 장자권이라는 영적이고 신성한 축복을 당장의 배고픔을 채우는 팥죽 한 그릇과 맞바꾸었다.
-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제단과 제사라는 거룩한 직분을 귀찮고 번거로운 일로 여겼다.
둘째,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물질을 우선시함
- 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언약, 영적 유산보다 눈앞의 물질적 만족을 우선시했다.
- 제사장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보다, 눈에 보이는 흠 없는 짐승을 아까워하는 물질적 욕심을 우선시하였다.
셋째, 극단적인 현재 중심적, 육체 중심적 사고
-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며 극단적인 현재 중심적, 육체 중심적 사고를 보였다.
-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는 수고 대신, 눈 멀고 병든 것을 드리며 당장의 편안함과 이익을 추구하였다.
제사장들은 혈통적으로는 야곱의 후손이었지만, 그들의 마음과 영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유산과 직분을 팥죽 한 그릇만도 못하게 여겼던 '에서'를 그대로 닮아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선택한 야곱의 후손이 왜 내가 버린 에서처럼 행동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에서는 신성한 장자권을 하찮게 여기고, 당장 배고픈데 장자권을 지키기 위해 감수해야 할 현재의 허기를 고역과 수고로움으로 여긴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이름과 제단의 가치를 멸시했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직무가 번거롭고 지긋지긋한 노동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경멸이 더 이상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첫째, 자유로운 예배라는 특권의 '멸시'(바자, בָּזָה)
북한이나 중국의 성도들에게 마음껏 소리 내어 찬양하고, 공개적으로 모여 1시간 동안 말씀을 듣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혹은 꿈꿀 수도 없는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자유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주일 예배는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스러운 시간이 아니라, 주말의 여러 선택지 중 하나, 혹은 지켜야 할 관습 정도로 여겨진다. 우리는 우리 몸을 살아있는 제물로 바쳐야 하는데, 마치 흠있고 병든 짐승을 제물로 드린 것처럼 우리는 한 주간의 피로에 지친 몸, 놀러 갈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 가장 소중한 시간이 아닌 형식적인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둘째, 예배가 '고역'이 되는 현상(텔라아, תְּלָאָ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에 대한 가치를 멸시하게 되면, 그 시간은 자연스럽게 '지긋지긋한 수고(텔라아)'로 느껴지게 된다. "설교가 왜 이렇게 길어?", "찬양을 왜 이렇게 많이 해?"라는 불평이 나오고, 설교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현상은 예배를 기쁨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견뎌야 하는 시간'으로 여기는 마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예배 마치고 놀러 가자"는 마음 자체는 자연스러울 수 있으나,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목적이 아니라, 다른 활동을 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번거로운(텔라아)' 절차가 되어버린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의 비극이다. 누군가는 간절히 기도하며 찾는 예배의 자유를, 이미 가진 자들이 권태롭게 여기고 '고역'으로 느끼는 것은 이 시대의 가장 큰 영적 비극 중 하나일 것이다. 말라기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경고가 2,500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 우리에게 정말 적용되는 것이어서 두렵다.
[6] 외도와 내부로부터의 배신
이는 단순한 매너리즘이 아니다. 에스겔 시대의 죄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신'을 사랑한, 명백한 '외도'와 같다. 그러나 말라기 시대의 죄는 다르다. 그들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았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멸시하고(바자), 그분을 섬기는 것을 고역(텔라아)으로 여겼다.
사랑이 식어버린 마음으로 거룩한 의무를 마지못해 해치우는 것. 겉으로는 신앙인의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지만, 그 중심은 완전히 썩어버린 상태.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신 이유이다. 이것은 배우자를 두고 바람을 피우지는 않지만, 한집에 살면서 배우자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함께하는 모든 시간을 지긋지긋해하며 경멸하는 '내부로부터의 배신'과 같다.
우리의 예배, 기도, 섬김의 순간에 "언제 끝나나"라는 마음이 드는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실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순간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식적인 예배보다, 진심 어린 한 번의 만남을 원하신다. 차라리 문을 닫으라고 하실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다시 살피는 두렵고 떨리는 은혜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만나는 그 자리가 우리 삶에서 가장 무게 있고(카보드),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