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9일
얼마 전, 나는 내가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한 것으로 친구에게 많은 불편을 주었다. 친구는 내가 착한 것은 알겠지만 여러 가지로 남을 불편하게 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등, 여러 가지 단점을 지적해 주었다. 물론 그 친구는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내가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길 바란다며 예배 시간에는 전화를 하지 않고 나의 신앙 생활을 존중해 주는 친구이다. 그런데 내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녀를 실망시킨 일이 있자, 친구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교회 다닌다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면, 천국 갈 수 있겠어?”라고 비난하기 쉽다고 고쳐야 한다며 충고해 주었다.
오랫동안 혼자 생활하다 보니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지 이틀 후 언니도 나에게 비슷한 충고를 해 주었다. 언니는 내가 동생이니까 참고 넘어가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많이 불편할 것 같다며 요목 조목 고칠 점을 이야기해 주었다. 언니도 교회에 다니지는 않지만 나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터라 기독교도인 나를 책망하기 보다는 내가 진정 고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한 충고였다.
감사하게도 나는 지난 주 들었던 두 분의 충고로 지난 50년간 별생각없이 행동했던 나의 모습을 반성해 보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대해 그렇게 배려가 없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한 행동들이 친구와 언니한테만 불편한 것으로 느껴졌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내 앞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지만 속으로 생각하거나 나의 비매너적인 행동에 대해 뒷담화를 했을 수 있다. 나는 산상수훈을 생각하며 아주 진지하게 회개를 하였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죄송했다. 우리가 보통 못된 행동을 하는 자녀를 둔 부모에게 딸을 어떻게 키웠는데 이렇게 남을 배려하지 않는가라며 책망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런 처지가 된 것 같아 너무도 죄송한 마음에 눈물로 회개하였다.
하나님은 그런 나에게 두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해 주셨다. 한 사람은 다윗이다. 몇 주 전 목사님이 시편 3편을 설교하시면서 시편 1-2편이 히브리 문학에서 일종의 프롤로그에 해당한다면 진짜 시편의 시작은 3편인데, 그게 다윗 생애에 가장 수치스러운 일에 관한 것이라고 하셨다. 그걸 그 많은 시편 이야기의 첫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시편 3편을 다시 읽어 보았다.
제3편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많은 사람은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라는 말을 들은 다윗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 대신 은혜로 우리 죄를 사해 주시기 전 시대이다 보니, 밧세바 사건으로 ‘율법’을 어긴 왕은 죄인이고, 아들 압살롬이 꾀를 써서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의 송사에 관심이 없다는 식으로 선동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더 이상 다윗을 지지하지 않던 시기였다.
완전 사면초가에 몰린 다윗이지만,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그의 방패가 되시고 그의 구원자가 되셨다. 사울왕은 제사를 잘 지키고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큰 잘못이 없어 보이고, 실제로 큰 죄를 지은 자는 다윗이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사울왕과 다윗의 경우 하나만 봐도, 우리의 구원은 완전한 행실을 하는데서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늘 강조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외모(훌륭한 행위와 결과)를 취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 즉 진정성(진정성과 과정)을 보시는 것이 진리이다.
구약의 하나님이 다윗의 방패가 되어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다.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2)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15-17)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셨을 때, 예수님은 “너는 왜 나를 세 번이나 부인했느냐?”라고 추궁하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부인한 것이 옳으냐?"라고 묻는 것은 율법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예수님은 다르게 질문하신 것이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부인했지만 지금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때 두 번이나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 물으셨고, 베드로는 두 번 다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베드로는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가페한다고 대답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예수님을 지켜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그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그리고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부족한지 이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인간으로서 최고의 사랑인 우정어린 필레오로 답했을 것이다. 이 필레오는 친구나 자녀의 죽음을 대신하는 최고의 사랑이었다. 베드로가 두 번 다 필레오로 대답하자 예수님은 세 번째 질문을 바꾸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 이렇게 베드로가 한 대답을 토대로 질문을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당신의 언어를 잠시 내려두고, 베드로의 언어로 물으신 것 같다. 그건 ‘인간의 자리까지 낮아져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고 사명자로 다시 부르셨다.
물론, “행동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고 결국 마음만 진심이면 되는 거구나.”하고 생각하면 안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이건 모순이 아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지는 않지만,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행함으로 드러난다. 과실 나무가 살아 있다면 언젠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그날 이후로 변했다. 그의 ‘필레오’ 사랑은 ‘아가페’로 자라났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입술로 오순절 성령 세례 이후 복음을 외쳤고, 예수님을 부인하며 도망쳤던 발걸음은 순교의 길을 걸게 되었다. 그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비로소 ‘진정성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
친구와 언니로부터 걱정어린 충고를 들은 나는 회개의 자리에 앉았다. “하나님,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이런 제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부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베드로를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생각나게 하셨다. 인간이 어찌 완벽하기를 바랄 수 있으랴, 하나님은 ‘완벽한 자녀’를 찾지 않으시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녀를 찾으신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나는 하나님을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는데 이웃인 사람에게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제가 제 이웃을 하나님처럼 대하게 하소서.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부모님을 공경하고 챙겨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신경쓰고 배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제가 회개하오니 저의 부족함을 보지 마십시오. 사실 저는 완벽하지 못합니다. 제 행위만 가지고는 평생을 노력해도 율법이 원하는 바를 다 준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가 발린 문설주를 죽음의 사자가 피해서 간 것처럼, 죄인인 저를 보지 마시고 제 몸에 덮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보아 주세요. 저는 넘어지고 부족하지만 여전히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제 상한 뿌리를 회복시키시어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되는 열매를 맺게 하여 주소서. 저에게도 ‘네가 왜 나를 부인했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챙기고 배려하여라’고 말씀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말씀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게 성령님을 통해 날마다 인도해 주세요. 이번에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