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6일
어제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며, 3년 전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베들레헴에서 경험했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말구유 자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던 순간,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고 슬픈 눈으로 앉아 있던 요셉의 동상,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 위로와 축복을 받았던 사가랴의 집 주변의 고요한 풍경, 그리고 베들레헴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바라보았던 저녁놀과 다음 날 이른 아침의 햇살까지. 이 모든 기억이 예배 중 찬양 속에서, 눈물방울 위에 조용히 포개졌다. “아, 주님이 나를 그 자리에 있게 하셨었지.” 그 감사가 눈물이 되어 또르르 뺨 위로 흘러내렸다. 성탄절은 매년 맞이하지만, 이번에는 지난 3년의 시간들이 주님께로 향하는 하나의 항로였다는 사실이 유난히 또렷해졌다.
3년 전, 나는 수도권으로 이사했고 지금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목사님의 권면 속에서 성경 말씀을 반복해 읽고, 기도와 금식의 시간을 지나왔다. 장소가 바뀌었고, 삶의 리듬이 바뀌었으며, 무엇보다 “깨어 있으라”고 서로 말하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외형적 이동이라기보다, 내가 서 있는 좌표계 자체가 달라진 경험에 가까웠다. 내가 읽고 있던 성경은 이사 오기 전에도 동일한 책이었지만, 지금의 말씀과 설교는 더 이상 추상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나의 삶을 가르고 이끄는 기준이 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그 시기와 맞물려, 내 주변의 “이웃”도 달라졌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묵상할수록, 이상하게도 양자역학의 개념들이 함께 겹쳐 떠올랐다. 수학에서는 허수의 중요성이 새롭게 다가왔고, 형식의미론에서 다루던 함수와 연산자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과거에는 임기응변적인 설명 도구쯤으로 여겼던 개념들이,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요소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나는 다시 형식의미론을 붙들고, 수학의 기본 개념들을 차근차근 되짚기 시작했다. 군의 정의, 항등원과 역원, 부분과 전체의 관계 같은 개념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물리학 박사님과 소통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수학 선생님과도 함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분들과의 만남은 신앙 이야기를 직접 꺼내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깊었다. 수학 선생님과 물리학 박사님은 어떤 깨달음이나 발견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감정으로 얼버무리지 않았고, 질문을 흐리지 않았으며, 명료하게 성립하지 않는 것은—비록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명료하지 않으면—붙들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셨다.
이 감각은 내가 서울로 이사 와 “깨어 있으라” 설교하시는 목사님과 성도들 곁에 있게 되었을 때 느꼈던 것과 매우 닮아 있었다. 전혀 다른 영역의 만남인데도, 그 안에는 동일한 깊이와 안전함이 있었다. 예전에 목사님께서 설교 중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을 예로 드신 적이 있다. 대서양 위에서는 구름과 안개, 바람과 환각이 끊임없이 방향 감각을 흐린다. 당시 린드버그에게는 자동항법장치도, 무선통신도, 동승자도 없었다. 잠시만 졸아도 항로를 크게 이탈해 대서양에 추락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피로가 만들어 낸 착시인지. 이것은 믿음의 삶에서도 동일하다. 말씀이 있어도, 교리가 있어도, 경험이 있어도 깨어 있지 않으면 해석은 쉽게 틀어진다. 린드버그는 바람에 따라 항로를 조금씩 수정했지만, 북쪽이 어디인지 그 기준 자체는 결코 바꾸지 않았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그가 대서양을 건널 수 있었던 이유는 장비의 우수함이 아니라 오직 나침반과 별을 기준 삼아 끝까지 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만난 수학 선생님과 물리학 박사님, 그리고 내가 몸 담게 된 교회 공동체는 모두 같은 종류의 나침반이었다는 것을. 그 만남들이 나를 바꾼 것일까?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이미 내가 마음과 인지에서 다른 좌표계로 이동했고, 그 좌표계에서 그들이 이웃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은 결국 같은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법이다. 이들과 나의 관심사를 나누는 일, 특히 나의 믿음과 관련해서는 “내가 믿는다”를 말하기에 앞서, “이 길이 얼마나 안전한지”를 함께 확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어제 예배 후에는 양화대교 위의 티하우스(양화대교 동편)에서 호우지차를 마셨다. 버려지던 줄기에서 만들어진 차. 귀부인들은 마시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몸을 데우고 사람을 살렸던 차다. 그 차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돌이 되었다”는 말씀—예수님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떠올랐다. 성탄의 첫 증인이 성전의 중심이 아니라 목자와 동방박사였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좋은 만남이란 화려한 만남이 아니라, 깨어 있음이 유지되는 만남이라는 것을. 교회에서든 학문의 세계에서든, 그 기준이 같다면 그 만남은 이미 복이다. 그래서 어제의 크리스마스는 더욱 감사했다. 주님은 말씀으로 나를 깨우시고, 사람으로 나를 지켜 주시며, 차 한 잔을 통해서까지 그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게 하셨다.
God is so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