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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서를 읽으며 깨달은 영적 전쟁의 본질

by 안젤라

에스라서를 읽으며 깨달은 영적 전쟁의 본질


2025년 3월 4일

오늘 에스라서를 읽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세 번의 포로 귀환을 겪었을까 생각했는데, 에스라서에서 그 내막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고레스가 왕이 되고 포로 귀환은 물론 성전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것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얼마나 감동이 되었을까? 70년 포로 생활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고향에 돌아가면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예배드리리라 가슴이 벅찼을 것이다.


그런데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에스라서를 읽어가는데 나의 과거가 생각났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 오면서 나는 정말 귀환하는 포로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일만 남았다고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나는 서울에 왜 가냐고 하는 친구들에게 지금 사정을 알려 주기도 민망할 정도로 힘든 삶을 살고 있다.


에스라서는 그런 면에서 이 시기를 겪고 있는 내 눈에 특별히 쏙 들어왔다. 이것이 신앙의 현실이 아닐까? 믿음의 길에 들어선다고 모든 게 순조롭지는 않다는 것이 과거에도 그랬었구나. 오히려 더 치열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나도 지금까지 이같은 영적 싸움을 하고 있었던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1. 돌아왔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에스라서에는 세 번의 귀환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귀환이 허락되었지만, 이후로는 끊임없는 방해와 싸움이 있었다.


[1] 첫 번째 귀환 – 성전 재건 (스룹바벨, 주전 537년경)

고레스 왕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성전을 다시 지으라고 명령했다(에스라 1:1-4). 백성들은 기뻐하며 성전 기초를 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였다. 주변 민족들이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공사는 중단되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아닥사스다 때에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더라 (에스라 4:3-7)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니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 (에스라 4:23-24)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는데, 왜 이렇게 어려움이 많을까? 종종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하나님의 일을 할수록 더 많은 방해가 따를 수도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도 알게 되고 내 삶에서도 느깔 수 있다.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 문서창고 곧 바벨론의 보물을 쌓아둔 보물전각에서 조사하게 하여 ...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이 성전을 제자리에 건축하게 하라.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리노니 왕의 재산 곧 유브라데 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 (에스라 6:1-8)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신속히 준행하니라.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하니 (에스라 6:13-16)

[2] 두 번째 귀환 – 율법 회복 (에스라, 주전 458년경)

몇 년이 지나 에스라가 율법을 회복하기 위해 돌아왔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이방 민족과의 결혼으로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 때 에스라는 그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은 처음에는 적극적을 개입하셨지만, 이 경우처럼 백성들이 스스로 결단하기를 기다리시는 측면이 있으신 것 같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믿음이란 그런 것 같다. 하나님이 모든 걸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순종해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것 같다.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리노니 우리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왕과 일곱 자문관의 보냄을 받았으니 (에스라 7:12-14)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에스라 7:25)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예스라 9:14)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에스라 10:10-11)

[3] 세 번째 귀환 – 성벽 재건 (느헤미야, 주전 445년경)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려 할 때,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배신자들까지 방해했다(느헤미야 6:9, 6:17). 느헤미아는 내가 본 그 어떤 사극보다도 더 치졸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것도 같은 유대인이 그를 속이려고 한 것이 정말 놀랍다. 가장 무서운 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는 것이다, 내 안에서 타협이 시작되는 것이 가장 무서운데 정작 자신은 그걸 모르고 있을 수 있다.


2. 신앙의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아서를 보면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점은 역사적으로 되풀이 되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한 후에도, 초대교회가 시작된 후에도, 신앙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1] 가나안에 들어간다고 모든 게 해결된 게 아니었다

여호수아가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했을 때, 이제 하나님과 함께 평안한 삶을 살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나타났고, 결국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다 (사사기 2:6-11). 믿음은 한 번 결단했다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지켜야 한다.


[2] 외부의 공격보다 더 무서운 건 내부의 무너짐이다

느헤미야 때도 외부의 적들보다 더 위험했던 것은 자기 민족 안에서 타협하고 배신한 사람들이었다(느헤미야 6:17). 바울도 초대교회에서 거짓 형제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갈라디아서 2:4).


[3] 초대교회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운 초대교회도 처음엔 뜨거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 (요한계시록 2:4)

- 거짓 교리를 받아들인 교회 (요한계시록 2:14)

- 타협하고 타락한 교회 (요한계시록 2:20)


나도 사실은 그랬던 것 같다. 물론, 교회는 주일성수하면서 수요예배, 금요예배를 꾸준히 참석한 것은 맞다. 몸은 참석했지만 내 마음은 어떠했을까? 처음에는 열심히 기도하고 순종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타협하고, 흐려지고… 영적 싸움은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참, 다행이다. 이 시기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몰랐을 것이다.


3. 하나님은 처음엔 강하게 개입하시지만, 점점 우리에게 결단을 맡기신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강하게 개입하시지만, 점점 내가 믿음으로 행동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다.


[1]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순간들

-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심 (에스라 1:1)

- 홍해를 가르심 (출애굽기 14:21)

- 초대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심 (사도행전 2:1-4)


[2] 하지만 이 이후부터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셨다

- 느헤미야가 성벽을 직접 세워야 했음 (느헤미야 6:9)

-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싸워야 했음 (사사기 3:1-2)

-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직접 개입하여 정리하지 않으심


나는 고난스러운 2년을 보내다 보니 내 마음의 중심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은 내가 믿음으로 행동하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을 깨닫는다. 요즘 나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마치 내 눈앞에 계시다면 나는 기도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 전에는 휴대폰으로 찬양을 듣는다면서 켜 두었다가 휴대폰을 보거나 하는 식으로 온전히 주님께 집중하지 못한 적이 많았다. 요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4.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에스라서를 읽으니 이스라엘인들이 자기 집은 잘 지으면서 하나님의 집을 짓는 데는 태만하다고 경고하신 학개서 말씀이 생각났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학개 1:4-8)


하나님은 태만하고 결단하지 않는 유대인들 때문에 속이 터지고 계시지만 그래도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남은 자들을 통해 역사를 이루셨다.


[1]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끝까지 함께하셨다

- 사무엘을 보내어 신앙을 회복시키심 (사무엘상 7:3-6)

- 느헤미야를 통해 성벽을 완공하심 (느헤미야 6:15-16)

[2]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세우실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두 증인을 세우실 것이라 하심 (요한계시록 11:3)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믿음의 여정이 평탄할 것이라 생각할 때가 많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에스라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참된 영적 전쟁은 (초기의) 구원의 기쁨 후에 시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처럼, 가나안 정복 이후처럼, 초대교회가 세워진 후처럼, 구원의 기쁨도 잠시 더 힘든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님, 제가 외부의 핍박보다 내부의 타락을 더 경계하게 하소서. 니골라당의 교리, 발람과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하지 않게 하소서. 사사기 시대처럼 타락과 회개의 반복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느헤미야처럼 끝까지 성벽을 지켜내게 하소서.

저를 훈련하시고, 믿음을 연단하시는 주님을 신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끝까지 견디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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