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을 대하는 자세
영화 <열쇠의모든 것>을 보고
얼마 전 졸업한 대학교를 찾아가 추억의 냉면을 먹은 후에 친구와 캠퍼스 근처를 샅샅이 뒤지며 달라진 부분과 그대로인 부분을 찾는 놀이(?)를 했다. 사라져 버린, 혹은 인테리어가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가게들을 보며 이제는 나의 기억에만 존재하는 그것들을 향해 애도한 바 있다. 특히 잔디밭에서 자주 시켜 먹었던 중국집이 사라진 것을 보고 거의 경악을 했는데 친구의 말로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더욱 놀란 적이 있다. 생각해보니 언젠가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지나가는 말로 '설성이 사라졌다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었었고 그때도 나는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럼 이제 후배들은 짜장면 어디서 시켜 먹어?'라고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저편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
올해 정동진 독립 영화제에서 인상 깊게 본 영화 중에 '열쇠의모든 것'이라는 단편 영화가 있다. 영화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수막 회사에서 일하는 민영이 사무실 열쇠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열쇠수리공인 대녕을 부르게 된다. 대녕은 사무실 문을 열어 준 이후에 자신도 현수막을 하나 제작하고 싶다며 현수막에 사용할 문구를 두고 한참을 고민한다. 그 내용인즉슨 곧 문을 닫게 될 열쇠집의 마지막 인사였다. 한 평도 안될 법한 작은 열쇠집 앞에 오도카니 붙어 있는 마지막 인사말의 잔상이 아주 오래 남았다.
영화를 보고 들었던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잔함, 그리고 하나는 마지막을 대하는 예의였다. 열쇠집 주인인 대녕은 자신의 고객인 민영에게, 유튜브에 열쇠 없이 문 따는 법 영상이 다 있다며 자신의 영업 비밀이 이미 다 비밀이 아니라고 자신을 부를 필요가 없다고 문을 열어주고도 돈조차 받지 않으려 했다. 도어록이 보편화되며 열쇠에 대한 수요가 점차 줄어든 데다가 열쇠집의 이름이자 그야말로 '열쇠의모든 것'이 유튜브 등에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열쇠집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편리해진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그전의 방식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비단 열쇠집뿐만 아니라 열쇠를 잃어버려 부모님이 올 때까지 계단에 가만히 앉아 시간을 헤아리던 일, 열쇠에 달아두었던 귀여운 열쇠고리 등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해서 편리해지는 것은 기쁘고 편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잔함이 잔존한다.
대녕은 도와주겠다는 민영의 제안을 거절하고 몇 시간이고 자리에 앉아 마지막 인사말을 작성한다. 사실 대녕의 마지막 인사를 대단히 잘 쓴 글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곧 문 닫을 가게를 여태껏 찾아주었던 고객들에게 감사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진솔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전하는 글이었다. 마지막을 알리는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일까? 영업 종료를 알리고 인사를 남기는 것은 아마도 고객들에 대한 작별 인사일 뿐만 아니라 열쇠집에서 일해 온 자기 자신의 시간에 대한 위로이자 열쇠집의 마지막에 예의를 갖추는 일일 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기술이 개발되며 삶의 양상이 너무나 많이, 그리고 너무나 급박하게 바뀌는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앞으로 더욱 많아질 것이다. 무언가가 사라지는 일은 슬프다. 그렇지만 사라지는 것 앞에서 슬퍼만 하기보다 마지막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예의를 갖추는 의연한 모습은 울림을 준다.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애써 기억하는 일이므로, 변화 앞에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침표를 찍고 그다음 문장을 시작하는 일이므로.
*이번 글의 사진은, 내가 사랑해마지 않았던 중국집 설성의 마지막 인사이다. 청명한 날 잔디밭에서 짜장면을 먹는 대학시절의 낭만(?)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