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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메루 Oct 18. 2022

수성동 계곡

인왕산 아래 옥인아파트



서울 종로구 사직동과 옥인동 일대는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곳이다. 우리 가족은 내가 태어나자마자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왔다. 한사코 사대문 안을 고집하셨던 할아버지 덕분에 사직공원 옆 작은 한옥에서 살았다. 

우리 오 남매는 모두 사직공원 위쪽에 있는 매동 초등학교를 다녔다. 사직공원이 놀이터였고 경복궁 경회루에서 스케이트도 종종 타곤 했다. 지금은 경회루 출입도 예약제로 하던데 그 당시에는 참 문화재 관리가 허술했던 것 같다. 사직공원은 지금은 규모가 확 줄었지만 옛날엔 아주 넓고 큼직했다. 이후에 사직동에서 인왕산 자락 아래 옥인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인왕산 스카이웨이 아래 위치한 옥인아파트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이 터진  지어진 시범아파트이다

1970년 4월 8일 새벽, 마포구 창전동에 와우아파트 한 동이 무너졌다. 서울시가 그 당시 야심 차게 준비한 서민아파트였다. 6개월 만에 완성한 아파트는 온갖 건설 비리로 얼룩진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이를 반면교사로 옥인아파트는 1971년 아주 튼튼하게 지어졌다.      


가로지른 돌다리가 '기린교'이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


안내문


옥인 시범아파트는 2010년 철거되었다. 그때 수성동 계곡이 발굴되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에도 등장하는 수성동 계곡. 계곡 물소리가 크다하여 이름을 ‘수성동 계곡’이라 지었다. 아파트를 철거하면서 ‘기린교’가 드러났고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공원으로 복원되었다. 계곡 초입에 놓인 폭 1m, 길이 6m의 기린교는 겸재의 그림과 거의 흡사하다는 점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기린교는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된 돌다리로, 통 돌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이채롭다. 기린교가 놓인 절벽이 다소 위험하고, 훼손을 우려해 펜스를 쳐놓아서 직접 건너볼 수는 없지만, 겸재의 그림과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기린교 맞은편에는 쉬어 가기 좋은 정자가 있다. 이 정자에 앉으면 앞으로 인왕산이 보이고 옆으로 계곡을 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옥인 시범아파트가 있었다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은 당시 권문세가들이 모여 살던 장동(현재 효자동, 청운동 일대)의 명승지 8곳을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중 '수성동' 그림 속의 기린교 인근에는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집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수성동 계곡은 종로구 옥인동 마을버스 종점, 서울 한복판 인왕산 자락에 있다. 조선시대부터 이 일대가 수성동이라 불렸는데, 조선의 역사지리서인《동국여지비고》에 명승지로 소개되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이곳을 배경으로〈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라는 시를 지었다. 수성동 계곡은 당대 최고의 문인과 화가를 불러들여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접할 수 있는 한적한 자연, 거기다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뛰어난 경관이 한몫했다. 그러나 평소에는 계곡물을 보기 힘든 마른 하천이다. 때문에 요즘처럼 비 오는 날이나 비가 온 바로 다음날 찾아가야 수성동 계곡의 운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수성동 계곡에서 가재를 잡기도 하고 계곡으로 내려오는 맑은 물을 모아 만든 천연 수영장에서 물놀이도 했다. 아카시아 나무 꽃을 따먹기도 하고 친구들과 술래잡기도 했다. 도심에서 자랐지만 자연과 벗하며 지낼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계곡이다. 지금은 아담한 공원으로 조성되어, 10~15분이면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계곡 위쪽으로는 소나무를 비롯해 자귀나무, 산사나무, 화살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뤄 싱그러운 기운을 뿜어낸다. 주변으로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다. 


계곡 위로 끝까지 올라가면 인왕산 스카이웨이와 만나고, 큰길 하나를 건너면 인왕산 등산로와 연결된다. 스카이웨이를 따라 올라가면 부암동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이어진다. 스카이웨이 아래로 걸어 내려오면 사직공원이 있다. 바로 ‘서울 성곽길’ 인왕산 코스다. 지인과 함께 이 길을 걸으며 오랜만에 향수에 젖어 본다. 옥인아파트는 사라졌지만 다른 건물이 아니라 공원으로 남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어릴 적 놀았던 계곡이 역사에도 등장하는 수성동 계곡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어 무척 기뻤다.     


수성동 계곡에 한 번 가보시길 추천한다. 옥인 아파트를 찾아 걸어 올라가는 길에 이상의 집터도 구경하고 윤동주 하숙집 터도 볼 수 있다. 이 길은 등하교했던 옛길과 겉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길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다. 수성동 계곡을 구경하고 내려올 때는 통인시장에 들러서 ‘기름 떡볶이’도 맛보기 바란다. 추억이 깃들어 있어서 그런지 언제 먹어도 맛있다.          




수성동에서 비를 맞으며 폭포를 보고   水聲洞雨中觀瀑

심설의 운을 빌린다   次沁雪韻

골짜기에 들어오니 몇 무 안 되고   入谷不數武

나막신 아래로 물소리 우렁차다   吼雷殷屐下

푸르름 물들어 몸을 싸는 듯 젖다   濕翠似裹身

대낮에 가는데도 밤인 것 같네   晝行復疑夜

고운 이끼 자리를 깔고   淨苔當舖席

둥근 솔은 기와 덮은 듯   圓松敵覆瓦

낙숫물 소리 예전엔 새 소릴러니   簷溜昔啁啾

오늘은 대아송 같다    如今聽大雅

산마음 정숙하면   山心正肅然

새들도 소리 죽이나   鳥雀無喧者

원컨대 이 소리 세상에 돌려   願將此聲歸

저 속된 것들 침 주어 꾸밈없이 만들었으면   砭彼俗而野

저녁 구름 홀연히 먹을 뿌리어   夕雲忽潑墨

시의로 그림을 그리게 하네   敎君詩意寫


-추사 김정희의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 水聲洞雨中觀瀑此心雪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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