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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메루 Mar 11. 2023

친정 엄마

언제나 그리운 우리 엄마


“엄마, 나야 지금 뭐 해?”

“응, 그냥 있다. 니는 잘 지내고 있나?”

“참 엄마두! 나 집에 잘 왔어. 좀 전에 엄마 봤잖아?”

“아, 그랬나 그래 또 언제 올기고?”

“응, 다음 주에 갈게”


요사이 엄마와 내가 전화로 주고받는 대화이다. 엄마는 방금 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신다. 그래서 항상 새롭게 말씀하신다. 엄마의 기억은 몇 시간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엄마가 혼자 생활하실 때 엄마는 기운 없이 누워계셨다. 밥솥의 밥도 언제 해 놓았는지 모르게 말라있을 때가 많았다. 우유병만 여러 개 보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올케 언니가 정성껏 해준 반찬도 냉장고에서 나올 줄 몰랐다.


엄마는 자존심이 무척 세시다. 그래서 오빠네로 들어가시라고 해도 좀처럼 말을 듣지 않으셨다. 속상한 마음에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아들 아꼈다가 어디다 써먹으려고 그러냐고 화도 냈지만 엄마는 고집을 쉬이 꺾지 않으셨다.


어느 날 엄마와 목욕을 가기로 하고 작은 언니와 함께 대중탕에 다녀왔다. 그런데 엄마의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허벅지가 무척 아프다고 하셨다. 집으로 오는 길에 근처 정형외과에 들러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왼쪽 골반 뼈에 금이 갔다고 했다. 노인 분은 빨리 수술을 해야 큰 위험을 막을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동네 병원이었기에 우리는 다른 날 큰 병원으로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았다. 거기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 바로 응급실로 가서 수술날을 어렵게 잡았다. 그런데 수술 당일 엄마는 수술을 거부하셨다. 내가 이렇게 멀쩡한데 왜 수술을 받아야 하냐면서 강력하게 의사를 표하셨다. 하는 수없이 엄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혼자 두기엔 위험해서 작은 언니 집으로 모셨다. 언니가 정성껏 진지 챙겨드리고, 나도 사골을 푹 끓여서 가져다주었다. 채식만 드시는 엄마에게 된장찌개 끓일 때 넣어드리라고 했다. 그리곤 엄마에게 이젠 나이가 많아서 혼자 계시면 안 된다. 오빠네랑 함께 사시라고 갈 때마다 얘기했다. 엄마는 약간 고집을 꺾으시고 수긍을 하셨다.


초기 치매로 고생하시는 엄마가 오빠내외랑 함께 사시려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치매가 심해지면 함께 살고 싶어도 힘들 거고 그렇게 되면 요양병원으로 들어가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마침 엄마도 이사를 허락하시고 손없는 날을 잡아 짐을 옮기라고 하셨다. 오빠와 올케 언니도 대청소를 하고 엄마를 맞을 준비를 다해놓았다. 오빠내외가 맞벌이 부부여서 혼자 이삿짐 정리하기 쉽지 않았지만 드디어 엄마가 오빠랑 함께 살게 되었다는 기쁨에 손이 퉁퉁 불어도 힘든 줄도 모르고 쓸고 닦았다.


작은 언니가 성심껏 간호를 잘해서 다행히 경과가 좋았다. 이제 오빠네로 가도 될 거 같아서 병원에 들렀다가 바로 모셨다. 그런데 아뿔싸, 엄마가 왜 내 집이 아니라 여기로 데리고 왔냐고 심하게 거부하셨다. 어느 정도의 반항은 예상했지만 이건 도를 넘는 수준이었다. 무서웠다. 하는 수없이 도루 엄마 집으로 몇 가지 짐만 챙겨서 바로 옮겼다. 엄마를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새언니가 울면서 같이 살자고 애원하는데도 엄마는 냉정하게 거절하셨다. ‘이렇게 엄마가 또 혼자 생활하셔야 하나, 엄마는 아들 봉양을 받을 운이 정말 없으신 건가’ 만감이 교차했다.


며칠 후 엄마는 오빠내외의 청을 다시 받아들이셔서 오빠네로 순순히 가셨다. 그 후로도 몇 번 당신 집을 찾으셨지만 이제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을 하신 듯하다. 골반뼈도 잘 붙었다고 했다. 엄마의 오빠네집 입성기는 참으로 험난했다. 그러나 참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엄마를 모시겠다고 마음먹어준 올케 언니에게도 고마움을 전했다. 시누들이 더 잘하겠다고 말했다. 대중탕에서 목욕하고 나와 엄마 몸무게를 재어보니 이제 40킬로그램에 진입하셨다. 희소식이다.


어느새 엄마가 오빠네로 들어가신 지 석 달에 접어들었다. 엄마가 사시던 집을 처음엔 그냥 두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엄마도 당신 집에 대한 애착을 많이 내려놓으신 듯했다. 엄마가 직접 노트에 월세 동의서를 글로 적게 하고 함께 부동산에 갔다. 중개인이 자매였는데 아주 친절하고 자세하게 전월세 상황을 알려주었다. 시세를 대충 알고 나서 언니 오빠와 상의했다. 좀 더 내버려 두는 것이 좋겠다는 큰언니 말을 무시하고 내가 바로 월세를 놓겠다고 했다. 월세가 엄마 통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여드리면 분명히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사이 엄마네 집에 남은 물건을 정리하러 가면 금방 오빠네로 가자고 조르시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했다. 또 이사철이 지나면 월세 놓기가 어렵다는 중개인의 말도 참고했다.


엄마는 우리들을 키우면서 이사를 많이 다니셨다. 그래서 그때마다 엄마만 쓰시는 비방이 있었다. 이번에 그 비방을 사용해 보았다. 신기하게도 2주 만에 월세 임자가 나타났다. 화장실 공사와 도배장판 등이 순차적으로 잘 마무리되었다. 결혼 후 직장생활을 했기에 부동산 관련 일은 시어머님이 모두 다 해주셨다. 난생처음 계약서도 써보고 집공사도 해보고 새로운 경험을 참 많이 했다. 부동산 자매의 도움이 무척 컸다.

잔금을 받고 세입자가 입주하는 날 마지막으로 엄마를 모시고 당신 집을 보여드렸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을 보시니 좋다 하신다. 그런데 어김없이 또 물으신다.


“야야, 그런데 이 방에 있던 장롱은 어떻게 했노?”

“엄마, 세 짝 장롱 중에 두 짝은 버리고 한 짝은 엄마 방에 가져다 놓았잖아!”


그제야 마음을 놓으시고 집에 가자고 하신다. 엄마가 오래 쓰시던 장롱을 처음엔 버리려고 했다가 아쉬워하는 마음을 알아채고 그중 한 짝만 옮겨다 놓은 것이다. 그렇게 하길 정말 잘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들이 저마다 안부를 묻는다.


“그동안 안 보이시던데, 어디 다녀오셨어요?”

“이제 아들 집에 들어갔지요.”

“아휴, 참 잘하셨어요. 아드님이랑 함께 살면 좋지요.”


흡족한 미소를 짓는 엄마를 보니 나도 기분이 좋다. 오빠네로 와서 다시 한번 엄마 집을 월세 놓았고 그 비용은 얼마인지 노트에 메모하시게 했다. 똑같은 말을 하루에도 여러 번 물으시니 그때마다 대답하기 귀찮아질 때가 많아서 엄마의 기억력 보조로 메모를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어떤 땐 노트에 기록한 사실조차 잊어버리곤 하시지만 메모는 나름 유용한 도구이다.


며칠 전 영화를 보았다. <스틸 엘리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언어학자이야기였는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을 잃어가는 여주인공에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러면서 엄마에게 마구 짜증을 내었던 나를 되돌아보았다. ‘엄마도 병에 걸리신 거야. 기억이 안 나니까 물을 수밖에...’ 염불 하듯이 대답하라는 스님의 말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내가 처음 말을 배울 때 몇 번이고 웃으며 엄마가 해주었을 똑같은 대답을 이제 나도 해보자라고 다짐했다.



그 후로 엄마를 모시고 언니들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큰 언니가 시어머님 때문에 함께 못 간 것이 참 아쉬웠다. 옆지기의 배려로 시댁 식구와 언니들과 다 함께 대만 여행도 다녀왔다. 엄마는 결국 화장실에서 넘어지시는 바람에 대퇴골이 골절되어 수술을 받으시고 재활요양병원에 입원하셨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하셨다.


효도하고 싶어도 부모님은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래도 엄마의 마지막은 우리 오 남매와 사위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했음에 위안을 삼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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