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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메루 Mar 09. 2023

그리운 아버지

그곳에선 평안하시길



아버지가 보고 싶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 앙상한 몸만 남은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자상하고 이목구비 뚜렷한 잘생긴 우리 아버지가 보고 싶다. 아버지와 나눈 추억이 그리 많지 않아서일까. 환갑이 지나자마자 병석에 누워만 계시다 아버지는 떠나가셨다. 그런 아버지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사진을 꺼내 보았다.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계신 아버지가 나에게 안부를 묻는 듯하다.


우리 오 남매를 키우느라 청춘을 다 바치고 한숨 돌려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60대 초반에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그것도 보도에서 잠깐 내려 길을 가던 중 전방 주시를 소홀히 한 자동차에 치인 것이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그런 분이셨는데 무슨 연유로 보도가 아닌 곳으로 걸어가셨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다행히 당시에는 큰 수술은 받지 않으셨지만 그 후유증으로 파킨슨씨병이 급속히 진행됐고 급기야 말기 증상인 음식물 섭취가 어려운 연하장애까지 오면서 정상적인 생활은 힘들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퇴원할 때 음식물을 삼킬 때 조심하라고 귀띔만 해주었어도 그렇게 심각한 상황까지 가진 않았을 텐데... 지나고 나니 모든 것이 안타깝고 원망스럽다.


멀쩡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가해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보험사가 와서 아버지의 잘못이 많다고 터무니없는 소리만 늘어놓고 갔다. 난 너무도 분하고 원통해서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도 해야 분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을 거 같았다. 때마침 인터넷으로 억울한 사연을 올리면 변호사가 전문가 입장에서 소견을 올려주는 사이트가 있어서 글을 올리고 답변을 얻었다. 그 변호사가 요즘 핫한 함문철변호사이다. 막막하고 분할 때 한줄기 햇살 같았다. 우리는 보험사의 횡포에 휘둘리기에는 억울했기에 소송을 걸기로 했다.


지루한 송사가 이어졌다. 아버지의 병세는 호전과 악화를 되풀이하셨다. 엄마까지 아버지 병시중에 쓰러지실까 걱정되어 우리는 병원에 아버지를 모시고 간병인을 고용했다. 그러나 대형병원에는 6개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반년마다 이곳저곳 옮겨 다녀야 했다. 아버지는 송사가 진행되는 3여 년의 기간 동안 잘 버티시다가 송사가 부분 승소로 끝나자마자 그해 겨울 다시는 올 수 없는 길을 떠나셨다. 자식들이 금전적으로 힘들까 봐 어느 정도의 보상은 받기를 바라신 모양이다.


최고의 대학을 나오시고 세무서에 근무하시다 학자인 할아버지의 반대로 그만두신 후 아버지의 직장운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아버지는 청렴한 학자가 제일 잘 어울리셨을 거 같다.


오 남매의 막내인 난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엄마에게 꾸중을 듣거나 매를 맞을 때면 항상 내 편을 들어주셨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맛있는 간식을 사가지고 집에 오실 때도 맨 먼저 이름을 부르시면서 뽀뽀를 해주셨다. 어린 나이라 까끌까끌한 수염 때문에 뽀뽀가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정만큼은 듬뿍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막내딸을 잘 데리고 다니셨다. 단양팔경도 구경하고 강원도에도 놀러 가고...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계단을 내려갈 때면 언제나 누가 먼저 내려가나 시합을 하던 부녀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팔자걸음을 배우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내 걸음걸이를 고치고 싶지 않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아버지의 흔적 같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흔적이 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서 사용할 수 없게 된 흔적이다.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서 갓난아기 때 바로 서울 사직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래서 부산 사투리를 거의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께는 존댓말을 사투리로 했기 때문에 그 말투가 남아있었다. 엄마에게는 반말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울말을 하게 되었지만 아버지껜 감히 반말을 할 수 없었다.


“아부지 예, 진지는 잡수셨습니꺼?”

“아부지 예, 지는 막내 희얍니더!”

"아부지 예, 거긴 평안하시지예?"


아직도 ‘아부지 예~’ 하고 내가 부르면 언제든 나타나실 것만 같다.


외손자와 함께 거제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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