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골'이란 말을 처음 알았다
“내일이 아버지 산소 이장하는 날이지? 뭐 준비해 갈 거 없나?”
“간소하게 제를 지내는데 그건 내가 준비해 갈게. 일찍 오시는 분은 벌초를 하면 좋겠어”
둘째 언니와 오빠가 메시지를 올리자 셋째 언니가 이어서 말했다.
“벌초하려면 낫이 필요하겠네. 3개 사 갈게”
친정아버지는 법 없이도 사실 분이었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병석에서 고생하시다 자식들이 임종도 못 지키고 쓸쓸하게 요양원에서 홀로 가셨다. 처음엔 화장하기로 했는데 사촌 큰오빠가 김포 공원묘지에 자리가 있다고 큰아버지 옆에 모시자고 해서 그렇게 했다.
예전에는 사방이 확 트인 아주 양지바른 좋은 곳이었지만 개발이 되면서 점차 아파트가 들어섰다. 게다가 아버지 묘 자리는 위아래 작은 통로 옆에 있어서 보기에 썩 내키지 않았다. 친정 엄마가 돌아가실 때 함께 수목장을 하자고 말했지만 그땐 오빠가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다.
올해 초 드디어 오빠가 이장을 결심했다. 아마도 손주들이 별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내 하소연이 마음을 움직인 듯하다. 엄마를 팔당에 모시고 난 후에 외 손주가 일이 잘 풀리는 것 같다고 말한 것도 한몫했으리라.
보통 이장은 윤달이나 윤년에 하는데 손 없는 날 자식들이 모두 모일 수 있는 날 하기도 한다 해서 올해 5월 29일 일요일로 정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화장장 예약도 쉽게 할 수 있으리라 예상해서이다.
당일 날 날씨가 참 좋았다. 땡볕이 아니라 선선한 바람이 약간 부는, 그야말로 벌초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아버지 묘를 찾아 걸어가는데 코앞까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예전에 다니던 길이 없어졌다. 새로 난 길을 더듬더듬 찾아 들어가니 잡초가 무성한 묘지가 보였다. 불과 몇 주 전에 오빠가 벌초를 했다는데 그사이 무성하게 풀이 자랐다. 아버지 묘 아래쪽에는 길도 없어지고 무연고 묘 주인을 찾는다는 현수막이 나부꼈다.
간단한 예를 올리고 아버지 묘를 파는 동안 우리는 준비해 간 도구로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큰어머니 묘 벌초를 했다. 여러 명이 번갈아가면서 했더니 힘도 덜 들고 산소가 깔끔해졌다. 그 사이 파묘가 진행되어 뽀얀 황토 흙 사이로 아버지 유골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냈다. 이장 대행업체 전문가들이 조심스럽게 유골을 수습했다.
“자제분들 여기 보세요. 아버님 유골이 황골이세요.”
황골은 묏자리가 좋고 고인이 잘 살았을 때만 생긴다고 덧붙였다. 나중에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황골(黃骨) 무덤 속에서 누렇게 된 해골. 풍수지리에서는 그런 무덤을 길혈(吉穴)이라 하며 후손들에게 복이 온다고 한다.’
전문가는 조심스럽게 아버지 유골을 하나하나 담으면서 갈비뼈로 하트를 만들었다.
“이 하트는 고인이 후손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갈비뼈가 제대로 잘 나오기 쉽지 않아요.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답니다.”
남편은 파묘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른 황토가 나오고 아버지 유골이 황골이 되는 것을 확인하자 마음이 흡족했다고 한다. 걱정을 제일 많이 한 사람이라 더더욱 마음이 그랬을 거다.
우리들도 여러 상황을 예상하며 부디 아버지 유골이 잘 수습되기를 바랐기에 황골의 출현은 마음 한 구석에 올려두었던 돌덩이를 말끔히 없애주었다.
아버지 묘 자리를 다시 흙으로 잘 덮어두고 점심 끼니는 쉑쉑 버거로 때우고 화장터로 향했다.
성남 장례 문화사업소는 한산했다. 코로나로 지난달까지 복잡했다는 큰 형부의 말을 들으며 참 감사하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유골을 화장하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았다. 40분 후 유골함을 모시고 팔당으로 향했다. 광주 방향에서 팔당에 가기는 처음이었는데 가는 길이 괜찮았다.
통일정사에 도착해서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고 영가 단에 아버지를 모셨다. 젊은 스님과 함께 반야심경을 큰 소리로 염불 해서 좋았다. 엄마 나무를 살펴보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잠깐 담소를 나누었다. 다음 주 목요일에 천도재를 지내기로 하고 하산했다.
우리 친정 가족은 오 남매인데 매년 설날과 추석에는 모두 만나서 안부를 나누었다. 코로나로 모이기 어렵게 된 지 3년 만에 다 같이 이른 저녁을 먹었다. 오빠가 한우고기를 쐈다. 일요일 오후 팔당 고깃집은 한가했다. 실외라서 편안하게 이야기 나누면서 밥을 먹었다. 모처럼 돌아가신 부모님 이야기를 즐겁게 했다. 내가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모습도 알게 되었다. 오 남매가 기억하는 부모님의 모습은 태어난 순서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하늘에 계신 엄마 아버지도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흐뭇해하실 거다. 큰 소란 없이 우애 있게 이렇게 오 남매가 함께할 수 있다는 건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엄마! 아버지! 자식농사 잘 지으셨어요. 덕분에 저희들 잘 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