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산티아고 9

인생의 짐

by 정만철

어젯밤 주방에서 오늘 아침에 먹을 감자를 삶고 있는데 게일이 만취가 되어 나타났다. 마을 어느 술집에서 얼큰하게 한 잔 하고 온 모양이다. 얌전히 잠이나 잤으면 좋으련만, 주방에 들어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난처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안면이 있으니 말려야겠다 싶어 게일을 어르고 달래서 침대로 보냈다. 밤 12시가 넘어 내 침대로 왔더니, 비어있던 이층 침대 위층에 슬로베니아에서 왔다는 젊은 아가씨가 걸터앉아 반갑게 인사를 한다. “늦었는데 빨리 자요.”라고 인사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잠을 자려고 하는데 옆자리에서 자고 있던 분이 코를 어찌나 골던지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 위에 있는 슬로베니아 아가씨가 뒤척일 때마다 끼익 끼익 철사 부딪히는 소리가 나서 너무 신경이 쓰였다. 할 수 없이 배낭의 응급약품 파우치에 있던 귀마개를 꺼내 귓속에 쑤셔 넣었더니 세상 조용하고 평온하다. 덕분에 비교적 단잠을 잘 수 있었다.


5시 반에 일어나 짐을 싸고, 주방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토마토와 복승아를 꺼내러 갔더니 게일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있다. 이놈이 잠은 자고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밤을 꼬박 새운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제 일이 얼마나 미안했으면 이 시간에 저렇게 사과를 하고 있을까. 나를 보더니 더더욱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어젠 정말 미안했어요.”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술은 좀 줄이지 그래!”

아빠 뻘 되는 사람의 충고라고 생각했는지 고분고분 알았다며 멋쩍어한다.


알베르게를 나오면서 시계를 보니 6시 15분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쌀쌀했지만, 이 아침의 상쾌함이 너무 좋다. 마을 중심으로 들어가는 성문을 통과해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어제 오후에 봤던 오래된 건물들과 문 닫힌 카페들이 새롭다. 그리고 메인 골목에 깔린 고풍스러운 돌길 끝으로 마을 외곽을 흐르는 작은 강과 아름다운 돌다리가 나왔다. 고즈넉한 순례길의 시골 마을 아침 풍경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푸엔테 라 레이나를 벗어나고, 처음에는 평지길이라 그리 힘이 들지 않았다. 포도밭 옆길을 지나는데 막 해가 뜨고 있었다. 진녹색의 포도나무 잎에 햇빛이 반사되어 6월 포도밭이 더욱 싱그럽게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올리브 과수원에는 아주 오래된 올리브나무가 빼곡했다. 개인적으로 올리브를 아주 좋아하는데, 올리브나무의 색깔도 참 좋다. ‘반갑다 올리브!!’ 조금 걷다가 갈림길이 나왔다. 화살표가 양쪽으로 있는 것을 보니 어느 쪽으로 가도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맞나 보다. 왼쪽으로는 평지길, 오른쪽으로는 오르막길이다. 처음에는 고민을 했지만, 앞서가는 사람들이 왼쪽 길로 많이 가길래 나도 그들을 따라 왼쪽 길로 들어섰다. 조금 전 포도밭을 지나면서 동양인 청년을 만났는데 눈인사만 하고 각자 길을 걸었다. 그 친구를 왼쪽 길에서 다시 만났다. 한국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아니면 대만에서 온 사람인지 몰라 영어로 인사를 했다. “하이!” 순간 이 친구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아 일본 사람이었구나.’ “오하요우 고자이마스”라고 일본어로 인사를 하자 놀라는 표정이다.

“일본 사람이세요?” 그 친구가 물었다.

“아니요. 한국에서 왔어요. 일본에서 공부해서 일본어를 좀 할 줄 알아요.”

오사카에서 온 이 친구(이름을 물어보긴 했지만, 이름을 외우는 데에는 소질이 없어 금방 까먹었다)는 재활치료사인데, 직장을 옮기는 중에 몇 달간 시간이 나서 산티아고 순례길에 왔단다. 그리고 이 친구의 이번 목표는 이 길에서 서양인 여자친구를 만나는 것이라나. 10여 분 동안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급경사의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이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계속 평지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일본 친구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나는 천천히 걷기로 했다. 마라톤을 하고 있다는 이 친구는 오르막길을 날아오르듯 뛰어 올라갔고, 금방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까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택했으면 어땠을까? 처음에는 오르막길이었지만 거기만 넘으면 금방 내리막에 평지를 걷게 되지는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봤지만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인생도 그렇지만,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어떻게 좋은 쪽으로만 선택할 수 있겠는가? '조삼모사'다.


힘겹게 오르막길을 오르자 다시 포도밭이 나왔다. 와인용 포도인 것 같았고, 대부분의 포도나무가 수령이 꽤 오래된 것 같이 보였다. 줄지어 늘어선 포도나무에는 아직 익지 않은 초록색 포도알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를 구경하며 걷고 있는데 멀리 구릉지 언덕에 요새 같은 마을이 보였다. 시라우키(Zirauki)라는 마을인데 주위는 모두 밀밭과 농지로 둘러 쌓여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의 성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멀리서 본 것과는 전혀 다른 너무 예쁜 곳이다. 잠깐 ‘이런 곳에서 살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중간에 있는 카페에서 잠깐 쉬었다 가려고 들어갔더니 벌써 많은 순례자들이 커피와 간식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모닝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싶어 진한 커피에 끓인 우유를 섞은 카페 콘 레체(Cafe con Leche)를 주문했다. 한국에서 마시는 카페 라떼하고 비슷한데 스페인의 카페 콘 레체가 훨씬 더 고소하고 맛있다.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 시간이나 지났다.


시라우키를 벗어나자 다시 밀밭과 포도밭, 올리브 과수원이 나왔다. ‘스페인의 농업이 이렇구나.’라는 것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길을 걷다 앞을 보니 서양 여자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는 이영희 선생님이 보였다. 큰 올리브 과수원 옆이었다.

“안녕하세요? 몇 시에 출발하셨는데 벌써 여기까지 오셨어요?”

“네, 걸음이 느려서 아침에 일찍 출발했어요.”

“아침은 드셨어요?”

“네 새벽에 컵라면 먹고 나왔어요.”

그러면서 천천히 갈 테니 나보고 먼저 가라고 했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이따 뵐 수 있으면 또 뵈어요.”

이영희 선생님과 함께 있던 서양 여자분에게도 인사를 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이영희 선생님과 헤어져 걷고 있는데 갑자기 좀 출출해졌다. 걸으면서 어제 준비한 토마토와 감자를 먹기로 했다. 토마토는 하루에 무조건 한 두 개는 먹으려고 한다. 호주에 살 때 토마토가 피부암을 예방하는 데에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를 너무나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호주 사람들에 비해 이탈리아 사람들이 피부암이 적은 이유가 이탈리아 사람들이 토마토를 많이 먹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스페인의 삶은 감자는 정말 맛이 있다. 쫄깃한 식감이 한국의 감자와는 많이 다르다. 당 충전을 위해서는 납작복숭아도 매일 챙겼다. 감자나 과일은 걸으면서 먹기도 좋아 배낭에서 가장 꺼내기 좋은 곳에 넣어두고 먹고 싶을 때 바로 꺼내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중간중간 큰 도로를 건너기 위해 터널을 걷기도 하고, 높이가 100미터도 더 되어 보이는 긴 농수로를 지나기도 했다. 어느 마을을 지날 때에는 순례자들을 위해서 마을 사람들이 물과 볶은 땅콩, 호두, 빵, 과자 등을 준비해 놓은 테이블이 있어 잠깐 쉬며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정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테이블 옆에 잠깐 앉아 시원한 물 한 잔과 빵 하나를 먹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10시 반쯤 로르카(Lorca)라는 마을을 지나는데 노란색 건물에서 하얀 옷을 입은 동양 여자분이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반가운 마음에 카페이 들어가 오렌지주스 한 잔을 주문했다.

“이 동네에 사세요?” 궁금한 마음에 내가 물었다.

“네 이 집에서 알베르게하고 카페를 직접 운영하고 있어요.”

혹시 이분은 순례길을 걷다가 이 마을의 매력에 빠져 여기에 정착을 하게 되었나?라고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이 마을에서 살게 되셨어요?”

“아아, 제가 몇 년 전에 스페인에 어학연수를 왔다가 스페인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여기로 와서 살게 되었죠.”

스페인 남자는 가정적이고 착한데 좀 소심하다는 둥, 팜플로나부터 로르카 근방의 지역이 밀, 감자, 포도, 와인의 산지이고, 특히 감자는 유럽 각국으로 수출까지 하고 있다는 등의 고급 정보까지 듣게 되었다. 그래서 이 지역 감자가 그렇게 맛이 있었나 보다. 이 카페의 오렌지주스는 바로 착즙을 해서 신선하고 당도가 높아 정말 맛있었다.


로르카를 출발해 처음에는 큰 아스팔트 도로 옆을 걸었고, 아스팔트길에서 작은 오솔길로 빠져나오면서부터는 다시 아름다운 시골길이 이어졌다. 중간중간 해바라기밭을 지났는데 해바라기꽃이 활짝 피어 너무 아름다웠다. 결혼 전에 맞선을 본 적이 있는데, 해바라기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그 사람에게 이 해바라기밭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시쯤 비야투에르타(Villatuerta)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곳은 지금까지 봐 왔던 고풍스러운 마을들과는 달리 현대적인 곳이었다. 팜플로나와 같이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맨션과 같은 신흥 주택단지가 있고, 대형 쇼핑몰이 있다. 도시 주변으로 공장들이 많이 보이는 것을 보면 신흥 공업도시임에 틀림이 없다.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래되어 보이는 성당이 있는데, 오히려 현대적인 마을 분위기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성당 안에 들어가자, 성당 직원인지 마을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덩치 좋은 사람이 성당 마당과 주변 마을 길의 풀을 예초기로 깎고 있었다. 잘린 풀냄새가 향긋하다.


멀리 있는 공장지역을 바라보며 비야투에르타를 빠져나왔다. 큰길에서 오솔길로 접어들어 조금 걷고 있는데 빈집으로 방치된 농가주택이 여러 채 보였다. 몇 채는 아예 방치되어 폐가가 되어 있었다. 스페인도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농촌 인구가 줄어드니 당연히 농촌의 빈집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며칠 안되었지만 그동안 보아 온 스페인의 농업은 상당히 경쟁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물어져가는 빈집을 보니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오늘의 목적지인 에스테야(Estella)에는 12시 40분쯤 도착했다. 에스테야로 들어가는 길목 왼쪽에는 무슨 공장인지 모르겠지만 ‘웅웅’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 공장을 지나 마을 쪽으로 좀 더 걸어가니 오른쪽 축대 아래로 제법 물이 많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마을 초입에 작은 카페와 급수대가 있어, 잠시 세수를 하고 손과 팔에 시원한 물을 부어 뜨거운 몸을 식혔다. 마을로 들어왔는데 정면으로 성과 같은 성당이 보였다. 성당 앞에는 먼저 도착한 순례자들이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나도 성당 계단에 앉아 우선 알베르게를 찾아보았다. 생장의 순례자 사무소에서 받은 알베르게 목록에 있는 숙소 중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서 묵기로 했다. 체크인을 하고 샤워도 하지 않은 채로 알베르게 맞은편 카페에 가서 시원하게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목적지에 도착해 마시는 맥주 한 잔은 정말 꿀맛이다. 알베르게에서 샤워와 빨래를 하고 시내 구경을 나갔다. 강을 건너 반대편 도심까지 다녀왔는데 풍경이 아름다운 도시이다. 에스테야는 인근에서는 꽤 큰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잘 정비된 도심에는 마트와 식당, 약국 등도 많다. 오른쪽 아킬레스건에 통증을 있어 약국에서 스프레이파스와 허브 오일을 사 왔다.


알베르게의 계단 벽면에는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드로잉펜으로 그린 건물과 풍경 그림(어반 드로잉)들이 걸려있다. 그림들을 보고 있는데 광주에서 오신 박응렬 선생님 부부와 이영희 선생님이 인사를 한다. 나중에 보니 수현과 나린, 수원에서 오신 남자 한 분 까지 모두 이 알베르게에서 묵는단다. 오후 5시쯤에 박응렬 선생님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는 연락이 왔다.

“네 알겠습니다. 준비하고 1층 로비로 내려가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고 1층 로비로 내려갔더니 다른 한국분들이 모두 모여있다.

“지난번에 왔을 때 맞은편 카페에서 밥을 먹었는데 괜찮더라고요. 거기 가서 같이 드시죠.” 이번이 두 번째인 박응렬 선생님이 제안을 했다. 모두 그러자고 동의를 했고 맞은편 카페로 갔다. 메뉴는 모두 ‘순례자 메뉴’로 통일하기로 했다. 대부분 순례자 메뉴는 약 15~20유로 정도이다. 먼저 애피타이저로 샐러드가 나오고, 메인 디쉬로 고기나 생선이 나온다. 그리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이나 차가 나오는데, 반드시 따라 나오는 게 와인이다. 오늘은 참치와 삶은 화이트 아스파라거스가 올라간 샐러드와 바게트빵이 애피타이저로 나왔고, 메인 디쉬는 삶은 감자를 토마토소스에 비벼 치즈를 올려 구운 이름 모를 음식이 나왔다. 메인 디쉬에 대해서는 다들 실망한 눈치였지만 나는 나름 좋아하는 맛이었고, 와인 안주로도 딱 좋았다. 지역산 하우스 와인이 테이블 당 두 병씩 나왔는데 다른 분들이 와인을 별로 마시지 않아 나 혼자 두 병은 마신 것 같다. 그리고 디저트는 초코 딸기아이스크림 바(ice cream bar).


오늘은 종일 거의 혼자서 걸은 것 같다. 가끔 나를 추월해 가는 사람도 있었고, 내가 추월한 사람도 있었지만, 스치는 사람들과 잠깐 인사를 나눴을 뿐, 긴 시간을 함께 걷지는 않았다. 그런데 혼자 걸으니, 풍경을 보는 것도, 생각을 하는 것도 오히려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해지니 인생이 풍요로워졌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오늘 길을 걷다가 불현듯 이번 산티아고 길에서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아보겠다고 했던 것이 잘못된 생각일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 내가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구하고자 했던 것은, 무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부여잡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덜어내고 버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 길을 걷다 보면 많은 순례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등에 지고 있는 짐의 크기와 무게가 각자 다르다. 그 짐의 크기와 무게만큼 그 사람의 속도와 움직임도 다르다.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음의 짐이 크면 클수록 사고와 행동의 폭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등에 진 배낭이든, 마음의 짐이든 버리고 내려놓아야 몸도 마음도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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