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길은 없다
한국을 떠나오면서 종합감기약과 알레르기약, 반창고 등 몇 가지 응급약품을 챙겨 왔는데, 혹시 모르니 넣어 가라며 아내가 챙겨준 수면유도제가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수면유도제를 먹을 일이 전혀 없었지만, 어제는 빨리 잠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한 알을 먹고 잤다. 그 덕분인지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푹 잤다. 6시에 맞춰 놓은 스마트폰의 알람 소리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늦잠을 잤을 것이다. 허겁지겁 세수와 양치를 하고 짐을 싸서 6시 40분에 알베르게를 나왔다. 팜플로나 시내는 월요일 아침인데도 한산하다. 어젯밤에 북적이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그나마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일 정도였다. 오늘도 여전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교차로에 서 있는 전광판에 아침 기온이 16℃라고 표시되어 있다. 약간의 선선함과 상쾌함이 온몸을 감싼다. 하늘이 너무 맑아 한낮의 더위가 걱정되었지만,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 그조차 즐기기로 했다.
팜플로나 구도심을 빠져나오니 외곽으로 신시가지가 나왔다. 한산했던 구도심과는 달리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볐고, 버스와 자동차들이 분주하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고, 조깅하는 사람들과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다. 신시가지의 대로를 따라 계속해서 직진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산티아고 순례길임을 알려주는 노란색 화살표와 가리비 모양의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도시구경을 하다가 길을 놓친 모양이다. 계속 앞으로 직진을 해야 할지, 아니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일단 큰 사거리의 신호등 앞에서 누군가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마침 할머니 두 분이 지나가길래 산티아고 순례길이 어디냐고 물으니 스페인어로 열심히 설명을 해 주셨다.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시 뒤에 조깅을 하는 젊은 여성이 가까이 다가오길래 다시 물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이 길이 맞나요?”
“아니에요. 너무 많이 왔어요. 다시 온 길로 돌아가면 공원이 보이고, 그 공원 중간쯤에 이정표가 있을 거예요.”
너무 고마워 영어와 스페인어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땡큐, 그라시아스!”
거의 500m 정도를 되돌아오니 멀리서 큰 배낭을 메고 걷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아까 이곳을 지나면서 한국의 도시에도 이런 공원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나친 공원이었다. 토마토를 먹으면서 이 공원을 지났는데, 토마토의 단 맛에 정신이 팔려 이정표를 지나친 모양이다. 처음에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도 나고, 왕복으로 1km의 시간을 손해 봤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건 손해가 아니었다. 오히려 남들은 보지 못한 1km만큼의 경험을 더 한 것이니까. 걷다 보면 의도치 않게 길을 잘못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길이 틀린 길은 아니다. 애초에 틀린 길은 없다. 조금 늦더라도 제자리로 돌아와 원래 가고자 했던 길을 다시 가면 그만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도심을 빠져나오자 광활한 들판이 나타났다. 그리고 멀리 꽤나 높아 보이는 산이 보이는데 정상에는 짙은 구름이 걸려있다. 오늘 구간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인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on)을 지나게 되는데, 저 짙은 구름 속에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용서의 언덕까지는 다양한 길을 걸어야 했다. 드넓은 밀밭 사이의 아스팔트 길을 걷다가 살짝 오르막길을 걷기도 했다. 멀리 온통 노란색 밭이 보여 뭔가 했는데 가까이 가 보니 엄청 넓은 해바라기밭이다. 순례자들 여러 명이 걸음을 멈추고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키가 2m는 됨직한 독일사람에게 스마트폰을 건네주며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원샷 원킬'이다. 정말 딱 한 장을 찍고 스마트폰을 돌려주는데 사진을 확인하고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인의 눈높이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어서 내가 마치 땅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감사하다고 웃으며 인사는 했다. 속으로는 '다시는 키 큰 서양인에게 사진을 부탁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해바라기밭을 지나자 다시 오르막길이 나왔고, 다시 밀밭이 시작되었다. 밀밭에는 노랗게 익은 밀들 사이사이로 빨간 개양귀비꽃이 활짝 피었다. 1, 2주만 일찍 이 길을 지났더라면 밀과 개양귀비가 어우러진 훨씬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크다. 홍성 홍북면에 이응노미술관이 있는데, 그 앞으로 홍성군이 밭을 하나 매입해 경관용으로 청보리를 심었다. 기왕 청보리를 심었으니까 보리가 노랗게 익었을 때 함께 어우러지도록 개양귀비 씨를 뿌리자고 미술관 학예사와 담당 공무원에게 건의를 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이 제안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지금 이 풍경을 보면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용서의 언덕으로 오르는 길까지는 밀밭뿐 아니라 귀리와 유채밭도 많다. 유채는 꽃이 거의 지고 씨앗이 익어가고 있었는데, 유채꽃이 피는 시기의 산티아고 길도 아름다웠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광활하게 펼쳐진 밀밭과 유채밭을 지나 오르막 언덕길을 올라오니 산등성이에 풍력발전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풍력발전기들을 지나자 용서의 언덕이 나왔다. 10시 15분.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블로그나 책, 유튜브 등을 보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가 페로돈 봉우리(Alto de Perodon)의 ‘용서의 언덕’이다. 거센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길을 걷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성스럽게 보인다. 조형물 하나하나의 모습을 보면서 뭔지 모를 감정이 가슴속에서 밀려 올라온다. ‘뭐지?’ 이곳이 왜 용서의 언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언덕을 올라오면서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 또는 내가 힘들게 했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이 언덕에 올라 용서하고, 용서를 빌며 순례길을 이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덕에서 나보다 먼저 도착해 조형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아르헨티나 친구를 만났다. 표정이 심각하다. 그 친구의 마음을 울리는 뭔가가 있나 보다.
조형물 아래로 작은 스톤헨지 같이 돌비석이 세워져 있어 내려가 보니 성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비석과 같은 것이었다. 돌에 새겨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읽어보고 다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용서의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동글동글한 자갈들이 빼곡하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순례자들이 발로 밟아 거친 돌들이 동글게 둥글게 깎인 것인 줄 알았는데, 흙 속에서 반쯤 삐져나온 돌들을 보니 원래 둥근돌이 흙 속에 파묻혀 있다가 순례자들의 발길에 빠져나온 것들이었다. 아마도 수억 년 전에 이곳은 강이나 냇가가 아니었을까? 이 자갈길에 결국 무릎 통증이 왔고, 배낭 안쪽에 깊이 넣어두었던 무릎보호대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언덕을 내려오자 다시 평원이 펼쳐졌는데, 밀밭을 지나면서 밀로 껌을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것을 직접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잘 익은 밀 이삭을 두어 개 따서 손바닥으로 열심히 비볐더니 껍질이 잘 까졌다. 벗겨진 껍질을 입으로 ‘후후’ 바람을 불어 날려버렸더니 손바닥에는 깨끗한 갈색의 밀알만이 남았다. 손바닥에 있던 밀알을 입안으로 털어 넣고 쉬지 않고 씹었다. 잘 되지 않아 중간에 포기하려고도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가 보자는 심산으로 5분 이상을 씹었더니 천천히 미끈하고 쫄깃한 껌 같은 것만 남게 되었다. ‘성공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껌에 가까웠다. 거기에다 길가에 지천인 야생 딜(dill) 잎을 조금 따서 함께 씹으니 달달한 맛과 향기까지 즐길 수 있는 허브껌이 되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도전이자 기쁜 경험이었다.
용서의 언덕을 내려와 처음 만나는 마을은 우테르가(Uterga)이다. 마을을 지나다 골목 안쪽으로 카페가 보여 들어갔더니 낯익은 얼굴들이 많다. 셀레스테와 시크프리트가 자리를 잡고 앉아 반갑게 인사를 한다. 합석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한국에서 온 한솔씨가 들어왔다. 혼자 들어온 한솔씨도 같은 테이블로 불러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카페를 나왔다. 20대 여성인 한솔씨는 축구선수 출신이라 그런지 걸음걸이가 예사롭지 않다. 내 걸음 속도가 너무 느리니 먼저 가라고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오늘 저녁에 내가 묵은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녀는 한 마을을 더 간 것 같다). 우테르가 다음 마을인 무루사발(Muruzabal)에 들어가서는 길을 좀 헤맸는데, 노란색 화살표가 성당을 향해 있어서 성당으로 갔더니 그 길이 아니었다. 다시 마을길로 나와 이리저리 이정표를 찾다가 오래된 벽돌 담벼락에 그려진 노란색 화살표를 발견하고 그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오바노스(Obanos) 마을을 지나 오늘의 목적지인 푸엔데 라 레이나에 도착했다. 오바노스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로 오는 길은 작은 면적의 와인용 포도밭과 아스파라거스밭, 농가의 텃밭 등이 이어진 재미있는 길이었다. 아마도 내 전공이 농업경제학이라서 더욱 유심히 그 밭들을 보며 걸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물들 이외에도 인상 깊었던 것이 겨우살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도가 높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볼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길가에 있는 거의 모든 나무에 싱싱한 겨우살이가 기생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무가 죽으면 겨우살이도 같이 죽어있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기생식물이니까 숙주가 죽으면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지만…
푸엔테 라 레이나의 초입에 들어섰는데 도로 옆 인도에 작은 새끼 새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잡아서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따끈따끈한 몸이 꼼지락꼼지락 거린다.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분명히 가로수나 나무울타리에 있는 새집에서 떨어진 모양이다. 내가 새끼 새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머리를 들어 새집을 찾느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지나가던 젊은 여성이 말을 건넨다. 옷차림을 보니 순례자는 아니고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아가씨인 듯하다.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이야기를 하면서 위를 올려다보니 가로수 가지에 새집이 하나 걸려있고, 그 안에는 다른 새끼들이 몇 마리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새집에서 떨어진 것 같아요. 여기 나무 울타리 위에 올려놓으면 고양이도 잡아먹지 못할 거예요.”라며 내가 새끼 새를 올려놓자, 그 아가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는다.
알베르게는 마을 안쪽의 구도심 초입에 있는 곳으로 정했다. 순례자들을 반기는 입간판에는 세계 각국어로 어서 오라는 인사를 써 놨는데 한국어로도 ‘환영’이라고 쓰여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곧바로 샤워를 했다. 알베르게 뒤쪽으로 잔디밭의 정원이 있는데 빨랫줄이 여러 개 있어서 가능하면 늦게까지 햇볕이 닿는 그늘이 없는 곳에 빨래를 널었다. 오늘은 날씨도 좋은 데다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 빨래를 말리는 데에는 최적의 날이다. 빨래를 널고 있는데 수현과 나린이 알베르게에 도착했고, 조금 더 있다가 이영희 선생님이 도착하셨다.
푸엔테 라 레이나는 작은 마을이지만 슈퍼마켓과 식당, 바 등 있을 건 다 있다. 마을 가운데에 있는 집들은 100년이 넘어 보이고, 마을 주변으로 나무들도 많아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5시쯤 이른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에 갔더니 7시에 문은 연다고 한다. 시에스타를 생각하지 못했다.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사다가 저녁을 해 먹으면 어때요?” 이영희 선생님이 제안을 하셨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마트에 가서 먹을 것 좀 사 올게요.”
“선생님 저희도 같이 가요.” 수현이 마트에 같이 가겠다고 했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가서 수현과 나린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은 제가 대접할게요. 오늘 파스타 만들어드릴게요”
“와아,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맥주 좀 살게요.”
알베르게에 도착해 사 온 베이컨과 햄, 토마토소스로 파스타를 만들었다. 다들 맛있다며 프라이팬에 남아 있던 소스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저녁을 먹고 수현과 나린이 맥주를 마시고 싶다고 해 7시가 넘어서 카페로 갔다. 그런데 카페에서 파는 안주가 마땅치 않다. 카페를 나와 다시 마트로 갔다. 마트에서 와인과 맥주, 그리고 간단한 안주를 샀는데, 와인이 한 병에 4유로다. 왠지 모를 이 충만한 기쁨은 뭐지? '앞으로 무조건 1일 1와인이다.' 숙소 정원에 둘러앉아 와인과 맥주로 서로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 간다. 웨일스에서 온 게일은 어디서 마셨는지 만취가 되어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내일 아침으로 먹을 감자를 삶고 토마토와 납작복숭아를 씻어 놓고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