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으로는 2년 전쯤이었던 거 같다. 아들내미가 1:3 그룹 화상영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하는 것도 처음이고 학교수업 이외에 화상으로 수업을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레벨 테스트가 있던 날, 화면에 나온 외국인이 나와서 이름을 부르더니 영어로 머라 머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돌하르방처럼 굳은 아이는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예스" "노"라고 몇 마디 하는 거 같더니 테스트가 끝났다. 화면이 꺼지자마자 긴장이 풀렸는지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본 터라 당연히 수업 안 듣겠다고 할지 알았는데 반전이었다. 영어화상수업을 하고 싶다고 했고 그 대신 "수업시간에 엄마가 옆에 있어줘."라는 조건을 달았다.
수업 첫날,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책상 밑 사각지대에 앉아 수업하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헤드폰을 끼고 마이크를 이용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답답하다며 외부 스피커와 마이크를 사용했다.
덕분에도강인지 청강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학생으로 나 또한 수업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떨려하던 아들내미도 금방 적응했고 잘 못 알아들은 질문은 다른 아이들이 하는 대답을 듣고 눈치껏 답했다.
아이들의 수업을 듣고 있자니 나도 영어가 배우고 싶어졌다.
12년의 초중고를 거치는 동안 영어공부가 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지금처럼 학창 시절 내 의지로 영어 공부를 했다면 인생이 쪼매(아니면 엄청 많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겠다. 자꾸 TV에 나오는 영어 잘하는 사람은 다 멋있어 보였다.
"으미~ 너무 멋있다! 나도 저렇게 영어가 잘하고 싶다."
화상영어회화를 검색해 보니 수업료도 방식도 기간도 천차만별이었다. 고가 회화수업은 헉~소리가 날 정도였다. 검색 끝에 적당한(아니다. 사실은 눈이 빠지게 가격을 비교하여 후기가 좋으면서 제일 저렴한) 곳을 선택해 전화상담을 하고 등록을 하였다.
우선 1달을 해보자. 또 한 달. 한 달. 그렇게 7개월 넘게 회화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선생님이 세번 정도 바뀌면서 느낀 몇 가지가 있다.
1. 화상영어 할 때 필리핀과 유럽, 미국등 어느 지역 선생님한테 배울지 선택한다.
난 유럽, 미국 쪽은 비싸서 패스했고 필리핀 선생님을 선택했다. 주로 비싼 비용 지불하면서도 유럽 미국을 선택하는 이유는 선생님의발음일 것이다.
결론부이 기가 막히게 좋은 사람이 있고 부러질 듯 정직한 발음 하는 사람이 있듯이 필리핀쌤들도 그러하다. 미드에서 보는듯한 발음을 구사하는 필리핀 쌤들도 많다.
2. 수업을 교재로 하는 선생님이 있고 그냥 주제 없이 프리 토킹을 하는 선생님이 있다.
교재를 통한 수업의 장점은 뭔가 체계가 잡혀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틀 안에 있으니 뭔가 안정적이고 예습, 복습이 가능했지만 단점은 내 영어 실력도 딱 그만큼씩, 씨알꼽쟁이만큼씩 성장한다. 선생님이 알려주는 "하이" "헬로" "하우아유?" "아임파인땡큐" 그 선을 넘어가면 당황하고 긴장된다.
프리토킹 수업은 시작부터 입이 바싹 마른다. 15분을 야생 호랑이가 뛰노는 초원에 던져진 듯 대화가 어디로 튈지 몰라 긴장되지만 재미있어서 좋다. 어차피 내가 영어를 잘 못한다는 건 나도 알고 선생도 아는 사실이니까 틀리는 건 괜찮다.
현재는 수업 중인 프리토킹 스타일의 선생님이 직업이 뭐냐고 나에게 물었다.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친구들에게도, 지인에게도 말하지 않던 그 말을..... 선생님한테 서슴없이 했다.
"I am writer."
나는 '글 쓰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내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일들을 영어로 더듬더듬 말하면서 참 행복했다.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 하며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들을 온라인 선생님한테는 속 시원하게 터 놓았다.
직장인, 00이 엄마, 00의 부인
이게 나의 직업이자 소개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I am writer."
모르는 사람이 가끔.. (아니 자주) 편할때가 있다. 이미 어른이 되었을 때 만난 사람들이나, 접시물처럼 아주 얕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내 모습이 많다.
나는 잘 웃고 수다 떠는 것도 좋아하고 멍하니 있는 것도 좋아한다.
주변인이 아는 나의 모습은 진지하고 차분하고 꼼꼼하다.
나는 이중인격도 아니고 내숭을 떠는 것도 아니고 뒤에서 호박씨 까는 것도 아니다.
푼수/ 수다쟁이/ 진지녀/ 꼼꼼쟁이/ 글쟁이
모두 다 내 모습이다.
지하철에서 나란히 앉은 어르신이 짧은 시간 동안 나에게 신세한탄을 늘어 놓은 적이 있다.
택시 기사님이 말이 잘 통한다며 과거에 개판지기로 놀았던 이야기를 술술 해준 적도 있다. (내가 한 말이라고는 "네""진짜요?""대단하세요." 뿐이었는데 나와 말이 잘 통한다고 하셨다.)
자신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꾸밈없이 새롭게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다. 내가 날린 뻥카도 그저 받아주는 날. 모. 르. 는. 사. 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