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또 다른 나

나와 나의 관계에 대하여 [삶]

by 서 희

“내가 원하는 대접을 남에게 하라”고 말하면서,

왜 남에게 하는 그 대접을 나에게는 허락하지 않는가.

타인은 또 다른 나다.

그들을 대하듯 나 자신을 허용하라.


프랑스에서는 어릴 적부터 자신만의 상담사를 곁에 두고 자란다고 한다.

그걸 그대로 따라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나 역시 좋은 계기로 말이 잘 통하는 상담 선생님과 매주 함께하고 있다.


나는 술을 마신 다음 날이면 이상하게 불안하다.

뭔가 큰 실수를 저질렀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올라온다.

아세트알데하이드 때문이라고만 보기엔 부족하다.

이건 내 내면과 관련이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선생님이 물었다.

“친구들이 술 주정 부리면 어때요?”

나는 대답했다.

“전 그런 건 크게 신경 안 써요. 오히려 관대한 편이에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나는 친구들의 술주정을 정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품어주려는 쪽에 가깝다.


남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는 엄격했다.

나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것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심리 쪽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상담 선생님은 그동안의 대화들을 기반으로

내가 자기허용이 부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하셨다.


학창 시절, 한 선생님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남에게는 관대한데 자신에게만 유독 엄격하다고 말하던 한 소년에게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오만이야.”

그 소년은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인격은 나였던 것인데, 오만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었다.

나부터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말이다.

내 몸뚱이로 생각하고 움직이면서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남들보다 뛰어나야 하고, 그러니까 나에게는 실수를 허용해선 안 된다고 믿는 오만이었다.


황금률이라고 한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이 격언은, 철학에서도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윤리 원칙이다.

나는 아마도 나만의 황금률을 친구들에게 적용해왔던 것 같다.

나의 꼴사나운 모습도 품어달라는,

그럴 때도 우리 관계는 쉽게 깨지지 않을 거라는

조용한 확신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관계가 하나 더 있었다.

“나와 나”의 관계.

타인은 또 다른 나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가장 먼저 허용되어야 할 타인이다.


이제는 그 관계를 조금 바꿔보려 한다.

남에게 하듯, 나에게도 허용해주는 것.

내가 사랑해온 사람들만큼, 아니 어쩌면 날 사랑하고 싶었던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