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고보니 사그라다 파밀리아

인생은 흰개미처럼 [재밌는 생각]

by 서 희

걸어온 길만이 형태를 가진다.
그 모양이 바로 나의 삶이다.


EBS의 「위대한 수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세상에 흩어져 있는 위대한 생각들을 짧게 모아 보여주는 강의 프로그램이다. 한 주제당 15분짜리 강의가 4~5강 이어지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어렵지 않게 설명해 준다. 가볍게 틀어놓고 보다가도, 문득 깊은 생각에 빠질 때가 많다.

그날은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 강의였다. 그 중 2강, ‘우리 몸에 설계자가 있을까?’라는 제목의 수업에서 마주한 지식을 통해 나는 인생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려한다.

핵심 키워드는 이것이다.
설계도(하향식)와 레시피(상향식).


도킨스는 우리가 보통 DNA를 “몸의 청사진”이라고 배우지만, 이 비유는 틀렸다고 말한다. 청사진, 설계도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방식이다. 설계자는 완성된 건물의 모습을 이미 알고 있고, 그 그림을 기준으로 세부를 채워 간다. 마음만 먹으면 청사진을 다시 그려 되돌릴 수도 있다.

하지만 DNA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DNA는 청사진보다는 레시피에 가깝다. 케이크 레시피가 있으면 케이크를 만들 수 있지만, 완성된 케이크만 보고 레시피를 정확히 복구할 수는 없다. 엑셀 화면만 보고 그 프로그램 소스코드를 거꾸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신체 구성과 치수를 모두 안다고 해서 그로부터 DNA를 역추적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도킨스는 말한다.
우리의 몸은 ‘설계도(하향식)’가 아니라
‘레시피(상향식)’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여기서 흰개미집의 비유가 나온다. 건축물 못지 않은 자태를 가진 흰개미집에는 설계자가 없다. 흰개미들은 그저 각자에게 주어진 단순한 규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흰개미 한 마리는 자기 집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른다. 그럼에도 수많은 개별 행동이 모여, 결국 하나의 집이라는 형태를 남긴다. 우리의 몸, 우리의 DNA도 이 흰개미집과 같은 방식으로 생성된다고 그는 설명한다.

“신체는 상향식으로 설계된다.”
이 한 문장이, 내가 갖고 있던 인생관을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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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짓고 있는 것이 ‘집’이 아니라 ‘인생’이라면, 흰개미와 같은 태도가 더 현실적인 것 아닐까. DNA가 상향식이라면, 우리도 세상을 상향식으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대부분은 하향식에 가깝다. 인생의 설계도, 최종 모습, 완성된 그림을 먼저 상상하고 나서 거기에 맞춰 현재를 끼워 맞추려 한다.

마치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설계도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설계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서 괴로웠던 게 아니라, 처음부터 설계도 같은 건 없었는데도 있다고 믿어왔던 건 아닐까.


우리는 상상하고 계획하는 능력이 있다. 분명 인간의 큰 장점이다. 계획은 방향을 잡게 해주고, 흩어질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준다. 문제는 세상이 설계도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훨씬 많다. 이런 세상에서는 계획을 세우는 능력만큼, 그때그때 궤도를 수정하고 다른 길을 찾는 능력이 중요하다. 목표를 향해 가는 것 자체는 좋지만, 그 목표까지 가는 단 하나의 루트만을 고집하는 순간, 계획은 기준이 아니라 족쇄가 되기 쉽다.


우리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DNA”를 가지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산다. 그럼에도 “계획대로 사는 삶”이 옳다고 배워왔다. 이 간극이 우리를 지치게 한다.


내게 큰 울림을 준 책이 하나 있다. 「이 삶이 당신을 어디로 이끌었든」이라는 책이다. 그 책의 메시지 중 하나는 이렇다.
“너무 촘촘한 계획은 우연의 기쁨이 들어올 자리를 막는다.”

제목부터가 흥미롭다.
“내가 삶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가 아니라
“이 삶이 나를 어디로 이끌었든”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대로 인생을 설계하라”고 말할 때, 이 문장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인생은 내가 끌고 가는 것만큼이나, 삶에 이끌려 가는 면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태도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미래를 그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원하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고, 그 미래와 지금 사이의 격차를 줄여가는 과정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분명히 가치 있다. 다만 이렇게 정리해보고 싶다.


우리는 미래를 그릴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몸이 상향식으로 만들어졌듯,
삶 역시 상향식에 가까울 때 더 풍족해지는 것 같다.

원하는 바를 향해 발걸음을 떼되,
매일 변하는 세상 속에서 유연하게 선택하고,
그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진 길,
그 ‘걸어온 길’이 결국 내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


이건 포기나 체념의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완벽한 청사진에 인생을 끼워 맞추려는 압박에서 한 발 물러나,
“지금 할 수 있는 선택과 노력”에 무게를 두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완성된 뒤의 삶의 모양이 어떠하든,
그 모양을 나의 것으로 긍정하겠다는 결심에 가깝다.


이 이야기는 정답을 말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DNA가 상향식이니까 삶도 반드시 상향식이어야 한다는 과학적 주장도 아니다.
그저 이렇게도 관점을 돌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제안에 가깝다.


다 지어놓고 나서야,
우리 삶이 가우디의 성당처럼 화려할지,
오래된 한국식 가옥처럼 소박할지는 알게 된다.
하지만 어떤 모양이든,
죽음이라는 마침표 앞에서 뒤돌아보면
그동안 내가 걸어온 과거들의 형태가 곧 내 삶일 것이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원하는 집을 짓기 위해 오늘 눈앞의 일을 하나씩 해나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어떤 집이 완성될지는 끝까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흰개미와 비슷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흰개미는 자기 집의 최종 형태를 상상할 수 없지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요즘, 이렇게 생각하려 한다.


“나는 상상할 수 있는 흰개미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이
조금은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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