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의 대상 [삶]
오랜 친구가 카톡을 보냈다.
“왠지 너가 좋아할 것 같은 내용이야.”
캡처된 사진 속 책 제목은 「편안함의 습격」.
순간, ‘아, 나를 이런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구나’ 하는 감지가 흥미로웠다.
친구가 말했다.
“저 진정한 삶은 불편한 곳에 있다 라는 말이 맘에 들어. 다음 글에 참고 부탁해.”
내가 취미로 글을 끄적인다는 걸 아는, ‘나잘알’ 친구의 마음에 든 문장은 이랬다.
“편안함의 감옥에서 벗어나라. 진정한 삶은 불편한 곳에 있다!”
띠지 문구였다. 장난 섞인 친구의 요청에, 내 안에서 어떤 내용이 불현듯 떠올랐다. 실제로 이 고민을 오래 해왔기에, 언젠가 한 번은 풀어보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자기계발적인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이 문구는 여러 형태로 반복된다.
나는 주로 이런 식의 표현으로 접했다.
“두려움 안에 진정한 보물이 있다.”
통찰적인 말이라고 느낀다.
소셜 미디어에서 생산적이고 계발적인 콘텐츠로 소비되는 이 지혜를 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내 삶의 선생님에게 이 주제로 질문을 던졌었다.
(잠시 힙합 이야기가 섞여있다)
내가 보기에 이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두려움, 불안함, 고통, 불편함 등 여러 부정적 감정들의 대표 이름으로 쓰이고 있었다.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셨다.
그래서 편의를 위해,
오늘 이 글에서는 두려움 · 불안 · 고통 등 회피를 부르는 감정들을 통틀어 **‘불편함’**이라고 부르려 한다.
(오늘의 시작점이기도 하고, 친구가 보내준 문장에도 “불편함”이라는 단어가 있으니까.)
불편함은 회피의 촉매제다.
그러니 “두려움(불편함) 안에 진정한 보물이 있다”는 말은 이렇게도 바꿔볼 수 있다.
“내가 회피하는 것 안에 진정한 보물이 있다.”
많은 사람이 동의할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더 생산적인 “나”로 발전하고 싶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불편과 고통 속으로 내던진다.
그리고 이 말은 실제로도 맞는 말이다.
변화를 위해선 지금의 나에서 한 번 벗어나야 하고,
그 과정은 막대한 에너지를 요구한다.
삶을 안락하게 만드는 습관들, 환경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살을 빼고 싶다면 결국 운동과 식단을 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문장들과 함께, 내 머릿속에서 가장 크게 떠오른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럼 어떤 불편함이 내가 필요한 보물을 찾게 해주는 회피의 대상일까?”
당시 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전공에 대한 회의감이 겹치던 시기였다.
내 전공은 나에게 하나의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이 전공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글에서 한 번 풀어보려 한다.)
그런 상황에서 내 고민의 주제는 이렇게 정리됐다.
“내가 회피하는 것들 중, 무엇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보물을 품은 대상일까?”
어떤 형태로든, 내가 회피하는 것들을 하나씩 깬다면
그 안에는 크든 작든 보상(보물)이 있을 것이다.
그 말도 분명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어차피 다 의미 있다”보다는,
게임으로 치면 메인 퀘스트에 더 힘을 쓰고 싶었다.
인생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제한된 시간과 에너지 속에서 행동해야 하는 존재라면,
“무엇이 메인인지”를 어느 정도라도 알고 살아가는 편이
좀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었다.
(설령, 보조 퀘스트 보상들의 합이 메인 퀘스트를 능가한다 해도 말이다.)
내가 회피하는 것들을 쭉 나열해보면,
결국 많은 사람들의 TO-DO 리스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부, 운동, 독서, 취미…
‘발전을 위해 언젠가 해야지’라고 적어둔, 그 익숙한 목록들이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나름 발전을 도모하고 있었다.
더 “좋은 직장”을 위한 스펙, 경험, 공부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때 나에게 놓여 있던 갈림길은 이것이었다.
전공을 살려 취직해 안정적인 삶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길을 모색해볼 것인가
결국 나는 취직을 선택했다.
그리고 3개월 만에 퇴사를 했다.
그 사이 몸무게는 5kg 이상 빠졌다.
불안 증세와 불면증이 찾아왔다.
그때 내 앞에 있던 두 불편함을 단순화하면 이렇다.
1.취직
사실 취직하고 싶지 않았다.
더 길게 고민하고 싶었고, 좀 더 놀고도 싶었다.
하지만 또래보다 많은 나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니 ‘취직’ 자체가 나에겐 피하고 싶은 회피 대상이기도 했다.
2.다른 길 모색
솔직히 말해 현실 도피처럼 느껴졌다.
‘가능성’이라는 말로 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느낌도 있었다.
안정적이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도 있었고,
또 무언가를 새로 고민해야 한다는 것에 귀찮음도 컸다.
이쪽 역시 분명한 회피의 대상이었다.
나는 그중 취직이라는 불편함을 선택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동시에 시달렸다.
하지만 동시에 보물도 얻었다.
“아, 이 길은 내게 맞지 않는구나.”
라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는 것.
퇴사를 고민하던 며칠 전,
나는 취직을 앞두고 고민하던 그때처럼
또다시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었다.
이 회사를 다니며 버텨볼 것인가
아니면 그만둘 것인가
똑같이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때 나는 AI에게 이렇게 물었다.
“더 버텨볼지, 그만둘지 조언을 부탁해.”
AI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 길의 끝에 있는 사람을 떠올려봐.
어떤 감정이 들어? 부러워? 그렇지 않아?”
나는 이 한 문장에서
지금까지의 고민이 정리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퇴사를 했다.
지금은 몸과 마음이 많이 회복되었고,
다른 삶을 살아보고 있다.
이 문장으로, 오늘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려 한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어떤 것이 내가 필요한 보물을 찾을 회피의 대상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내가 굳이 내 삶에 들일 필요 없는 회피의 대상인가?”
내가 찾은 답은 이렇다.
그 회피의 대상이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면,
불편함을 뚫고 들어갈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회피해도 괜찮다.
AI의 말은 결국 이런 뜻이었다.
“그 길의 끝에 서 있는 나는,
내가 원하는 인생의 그림과 연결되어 있는가?”
어떻게 보면 힘이 빠질 만큼 간단하다.
예를 들어,
나는 자동차에 관심이 거의 없다.
그런데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해보자.
“자동차에 대해 공부해.
그 안에 진정한 보물이 있어.”
분명 귀찮고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편하니까, 분명 큰 보물이 있을 거야”라며
자동차 공부를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의 그림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마케팅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퇴사를 할 수 있었다.
다만 우리의 문제는,
정작 자기 문제 앞에서는 시야가 극도로 좁아진다는 데 있다.
나도 그랬다.
눈앞에 “취직”이라는 거대한 갈림길이 놓이자
머릿속에서는 이렇게만 그려졌다.
취직 루트
비취직 루트
그리고 두 루트의 미래가
완전히 딴판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시기에 내가 느끼던 불편함의 대상들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나를 끌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대상이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향하는 수단일 때,
그 안에는 큰 보물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조금 재미있는 모순처럼 보이는 지점이 하나 있다.
내 말대로라면, 이렇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졸업 시즌에 취직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취직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 선택은, 결과적으로
“굳이 내 삶에 오래 들일 필요가 없는 불편함”이었다.
그렇다면, 그 안에는 큰 보물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취직 후 퇴사를 고민하던 그 시점의 나는
“마케팅으로 내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그 경험을 통해
몸은 아팠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길”이라는 아주 큰 정보를 얻었다.
이건 분명 큰 보물에 가깝다.
그럼 이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지금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다시 해석한다.
당시의 나는
취직 vs 비취직
을 완전히 서로 다른 루트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넓은 시야에서 내려다보면,
두 길은 결국 한 줄로 이어진 ‘같은 길 위의 다른 구간’이었다.
왜냐하면,
취직을 하든,
취직하지 않고 다른 것을 도전하든,
둘 다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겪을 수 있는
수단의 후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그때 취직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원하지 않는 길이라는 정보”를 얻었고,
반대로,
취직하지 않았다 해도
또 다른 방식으로
“아, 이건 아니구나” 혹은 “이게 더 맞구나”라는 보물을
결국 얻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당시의 내 고민은
“어느 쪽이든, 내 목적과 닿아 있는 생각들”이었고,
둘 중 어느 것을 택해도
언젠가는 같은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떤 선택이든, 보통은 큰 틀에서 상관없다.
우리는 결국,
각자의 “원하는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
멀리 돌든, 조금 덜 돌든
계속해서 길을 수정하게 된다.
다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선택의 순간”과 계속 부딪힌다.
그때 행동을 위해,
“이 길 끝에 서 있는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것과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는가?”
를 한 번쯤 고민해보는 것은
돌아가는 길을 조금 줄여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시간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질문은 꽤 중요하다.
그러나,
전혀 모르겠는 시기가 있어도 상관없다.
그럴 땐 그냥 아무거나 선택해도 된다.
조금 더 오래 돌아갈 뿐,
결국 다시 나에게 맞는 길을 찾기 위해 되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내 경우,
나는 자동차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애초에 자동차 관련 선택지는 내 리스트에 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그 길을 택했더라도,
언젠가는
“이건 내 길이 아니다”라는 불편함과 고통을 통해
다시 방향을 돌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인생의 정답”이라기보다,
선택의 순간에
시간을 조금 절약하게 도와주는
작은 지침 정도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이렇게 마지막 내 말에서 의아한 부분만큼은
스스로 생각해보았다.
지금 내가 겪는 이 고민의 불편함과 고통의 끝에서
조금 더 깊어질 ‘나’를
원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