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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 윤증고택, 이은시사(離隱時舍), 대문 없는 집이

충청유교의 진수 명재 윤증선생을 공부하며...

by 윤석구

《명재 윤증고택, 이은시사(離隱時舍), 대문 없는 집이 말하는 300년의 저항》 <죄충우돌 인생2막 70호. 2025.11.5>

제1부: 대문 없는 집의 비밀
— 명재고택 기행문, 속세를 떠나 은거하면서 나아갈 때를 아는 집을 다녀오며
글 | 파평윤가 석구


명재고택 (明齋故宅)


프롤로그: 가을 햇살 아래 300년의 시간
2025년 10월 24일, 가을이 깊어지는 충남 논산 노성면. 디지털문인협회 가재산 회장님의 주관으로 회원 70여 명이 김홍신 문학관 탐방길에 명재고택과 종학당, 유교문화진흥원을 찾았다. 선조들이 숨 쉬던 공간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걸으며, 300년 전 한 선비의 선택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과 마주했다.

유교문화의 본류가 흐르는 논산 노성면에 자리한 명재고택(明齋故宅)은 조선 중 후기 대표적 학자 윤증(尹拯, 1629-1714) 선생과 인연이 깊은 집이다. 1709년 선생의 80세를 맞아 후손과 제자들이 정성껏 지었으나, 명재 선생은 "과분하다"며 끝내 입주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고택은 유독 '연고 故(고)'자를 써서 故宅(고택)이라 불린다.

이 글은 결코 미화나 자찬이 아니다. 한 문학지망생의 기행문으로, 문화해설사의 설명과 그동안 배운 선조의 얼, 그리고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명재 선생과 고택, 종학당의 이야기를 담담히 기록하고자 한다.


1. 대문 없는 집의 비밀


명재고택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없음'이었다. 높은 담장도, 위압적인 솟을대문도 없다. 사대부 집의 상징인 그 대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휑하게 뚫린 길만이 마당으로 이어진다.
여느 양반가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없다는 사실. 그것이 이 고택의 첫 번째 수수께끼다.

더 기묘한 것은 이 고택의 위치다. 고택 서쪽으로는 노성향교 대성전의 지붕이, 동쪽 언덕 너머로는 궐리사(闕里祠)의 기둥이 보인다. 공자를 모신 사당과 관립학교인 향교가 이 고택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350년 전부터 집권한 여당 노론(老論)의 거점들에 둘러싸인 야당 당수의 집. 현재 고택에 거주하는 명재 13대 종손 윤완식 님의 말씀이 이 기묘한 풍경을 설명한다.


"감시당할 이유가 없으니까, 떳떳하게 아예 다 까발리고 살자고 하셨다고 합니다."


대문을 없앤 것은 개방이 아니라 저항이었다. 정치 사찰에 대한 떳떳한 맞섬이었다. 조용하되 웅변적인, 비움을 통한 채움의 건축 철학, 명재고택은 그렇게 조선 중 후기 당쟁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21세기를 맞이했다.


2. 백의정승의 세 가지 질문

유봉영당의 명재선생 영정
유명조선 징사 파평 윤증지묘


조선 역사 가장 치욕스러운 병자호란 50년 후인 1683년 5월 5일, 경기도 과천. 경신환국(1680, 남인 정권을 몰아내고 서인이 재집권한 정치 변동)으로 남인에게서 서인으로 정권이 넘어왔지만 정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숙종은 정계를 떠나 있던 서인 지도자 3인을 불렀다. 송시열(宋時烈), 박세채(朴世采), 그리고 윤증(尹拯).

박세채에 이어 송시열이 입경했다. 과천에서 대기 중이던 윤증에게 박세채가 찾아가 복귀를 청했다. 그때 윤증 선생이 던진 세 가지 질문은 조선 정치사에 길이 남는 명언이 되었다.

"그릇되게 추록한 공신을 삭제해야만 일을 할 수 있는데, 형(박세채)이 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외척의 당파를 물리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지금 세상이 의견을 달리하는 자를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를 두둔하니 이런 풍습을 제거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조정에 들어갈 길이 없다."

인재중용과 탕평을 건의했던 윤증 선생은 그렇게 고향 논산 노성으로 돌아갔다. 남인을 잔혹하게 숙청한 송시열 무리와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최종 통고였다. 노론이 주도해서 만든 『숙종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박세채와 밤새도록 나눈 이야기는 모두 송시열을 헐뜯고 해치는 말이었다(皆疵傷時烈之言)."


이후 숙종이 열여덟 번, 심지어 우의정 벼슬까지 내리며 복귀를 명했지만 윤증 선생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의정부 영의정이라는 최고의 자리를 제수했지만, 그는 여전히 노성의 초가에 머물렀다.

'백의정승(白衣政丞)', 벼슬 없는 정승.
그의 묘 앞 비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선 징사(徵士) 윤증'. '부름을 받았던 선비'라는 뜻이다. 2년 반 전 선조의 묘소에서 필자 후손의 저서 『내 마음의 은행나무』를 헌수 하며 징사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겼다.

명재 윤증 선생이 거부한 것은 벼슬이 아니라 시대의 어두움이었다. 권력의 독점, 당파의 갈등, 외척의 위세.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벼슬에 나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명재가 선택한 '이은시사(離隱時舍)', 즉 은둔을 떠나 때에 머무는 길이었다.


3. 니회시비(尼懷是非) — 스승과 제자의 결별


(사진, 윤여갑 선생님 명재 서예전)


윤증의 아버지 노서 윤선거(尹宣擧) 선생에게는 친구가 많았다. 송시열도 있었고 젊은 윤휴(尹鑴)도 있었다. 송시열은 송나라 유학자 주희(朱熹·주자)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반면 윤휴는 공맹 사상을 주자와 다르게 해석했다.

송시열은 윤휴를 사이비로 낙인찍었다.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하자, 윤선거마저 사이비로 몰렸다.
노서 윤선거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아들 명재 윤증은 아버지의 옛 벗 우암 송시열에게 묘갈명(묘비문)을 부탁했다. 송시열이 써준 글은 차갑고 건조했다. '쓸 게 없어서 다른 사람 글을 베껴 쓴다'는 식이었다. 서운한 아들이 수정을 거듭 청했으나 송시열은 거부했다. 따지고 보면 우암은 명재의 스승이었기에 더욱 마음이 쓰리고 아팠을 것은 자명했다.

이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사상 논쟁을 제기했다. 대전 회덕(懷德) 사람 송시열과 논산 니성(尼城·현 노성) 사람 윤증이 벌인 그 유명한 '니회시비(尼懷是非)'다. 결국 이 일로 스승과 제자가 결별했고, 노론과 소론 분당의 씨앗이 되었다.

1642년 인조 20년, 14세의 윤증은 금산에서 아버지 윤선거를 비롯하여 유계, 권시, 김집, 송시열 등에게서 배웠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성리학의 대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스승 송시열과의 갈등은 한 사람의 학문적 성취를 넘어 조선 후기 정치 지형을 바꾸어놓았다.

그사이 '사이비' 윤휴가 주도한 남인 정권이 실각하고 윤휴는 목이 잘려 죽었다(1680). 2년 뒤 잔존 남인 세력을 서인 내부 강경파가 계략으로 숙청했다(임술고변, 1682). 이를 부도덕하다고 비난했던 송시열이 이들 편으로 돌아섰다.

이에 실망한 서인 소장파가 노론 송시열파에 등을 돌렸다. 이들이 바로 소론(少論)이고, 이들이 추대한 영수가 명재 윤증 선생이었다. 1689년 송시열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격랑의 시대가 흘러가고, 문득 조선은 노론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제2부: 니산(논산)에 새겨진 300년

4. 닭 봉우리에서 거부한 집

(문성공 우의정 시호 교지)


명재 윤증 선생이 내려온 고향 니산(노성)은 파평 윤 씨의 땅이 많았다. 입향조 윤돈 선생께서 광석면 득윤리 마을에 장가를 들면서 처가의 유산과 처남의 대를 잇는 봉제사까지 400년간 이어온 땅이었다.

하지만 윤증 선생은 초가를 짓고 살았다. 80세가 된 스승을 위해 제자들이 정성껏 집을 지어 올렸다. 지금 우리가 본 명재고택이 바로 그 집이다. 하지만 윤증은 "과분하다"며 이사를 거부했다. 초가에서 평생을 보냈다.

윤증의 호는 명재(明齋), 또는 유봉(酉峯)이었다. '酉峯(유봉)', 즉 '닭 봉우리'다. '酉(유)'는 닭을 뜻하는 지지(地支)의 열 번째 글자로, 서쪽 방향과 가을, 그리고 새벽을 알리는 닭을 상징한다.
이곳의 지명이 유봉이었고, 윤증은 자신의 호도 유봉이라 지었다. 화려한 봉황이 아니라 새벽을 깨우는 닭. 높은 벼슬이 아니라 때를 아는 지혜. 그것이 윤증 선생이 추구한 삶이었다.

1714년, 86세의 나이로 명재 윤증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그를 따르는 유생들은 강당인 경승재와 함께 영당을 세웠다. 1744년 영조 20년, 윤증의 영정을 영당에 모셨다. 영당의 이름을 유봉영당(酉峯影堂)이라 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80호다.

유봉영당은 영당, 경승재, 고택 유허지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인 경승재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영당은 경승재의 오른쪽에 있는데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선생의 영정은 중앙에 모셔져 있다.

봄과 가을, 후손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올린다. 필자 또한 노성 방문 시마다 꼭 영정에 재배를 드리며 선조의 업적에 감사한 마음을 드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5. 니산에서 벌어진 일


명재 선생이 돌아가시고 얼마 뒤 니산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죽은 송시열의 뜻을 따라 그 제자들이 노성에 살던 공자 후손과 손잡고 파평 윤 씨 권역에 공자 사당 궐리사(闕里祠)를 짓는다는 것이다.

궐리사


왜 하필 노성인가?

노성에 있는 노성산에는 니구(尼丘)라는 봉우리가 있고 그 아래에 궐리촌(闕里村)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노성산, 니구봉, 궐리. 모두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 곡부(曲阜)의 지명이다. 중국 사신으로 다녀온 이가 사 온 공자 영정을 그 노성에 모시겠다는 말이었다.

1716년 궐리사가 건립됐다. 노론 정호(鄭澔)가 건립기를 썼다.
"지명의 부합이 진실로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그윽이 맞아떨어졌다(地名之符固有不約而冥會者)."
하지만 건립기에는 묘한 구절이 있었다.

"병자정묘년 천지가 번복되는 큰 난리 후, 주화파 잔당이 효종이 명나라를 섬기려는 대의를 비난하였을 뿐 아니라 송시열 선생의 춘추대의도 우습게 여겼다."

궐리사 건립의 정치적 취지였다. 춘추대의의 화신 송시열을 우습게 본 소론에게 모범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소론 영수 문중 땅에서 말이다.

참고로 명재 선생의 아버님 팔송 윤황 선생은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서 척화를 주창하셨고, 동생 윤전 선생은 왕실 가족을 모시고 강화도 피난 후 오랑캐와 싸우다 순절하셨다. 현재 충헌공으로 시호를 받은 위패는 강화도 충렬사에 모셔져 있다.

노서 선생의 부인 공주 이 씨 또한 강화도에서 오랑캐에게 짓밟힌 대신 순절로 생을 마감하셨고, 그 정려비가 명재고택 입구에 모셔져 있다.


1805년 노론은 노성산 서쪽에 있던 궐리사를 명재고택이 바라보이는 고택 동쪽 언덕 기슭으로 이건 했다. 송시열이 열렬히 흠모하던 주자를 궐리사에 함께 배향하고 마당에 '闕里(궐리)'라 새긴 돌기둥을 세웠다.

파평 윤 씨 소론 영수 영역 한가운데에 노론의 정신적 구심점이 마련된 것이다. 고택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언덕이었다.


6. 노성향교의 악연

노성향교


명재 윤증 선생의 아버지 노서 윤선거 선생 생전에 이미 노성에는 향교가 있었다. 니산향교였다. 노서는 명륜당을 세우며 건립문을 썼다.

"학교에는 묘(廟)와 당(堂)이 있다. 묘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당에서는 공부를 한다. 묘 앞에 반드시 당을 세워 명륜이라 한다."

노소론 분당 이전, 윤 씨 문중이 지역 유림과 함께 지은 향교였다. 그런데 정국이 노론으로 넘어가면서 향교는 명재고택 서쪽을 막는 또 다른 감시 초소가 되어버렸다. 궐리사가 집 동쪽을 감시한다면, 향교는 서쪽을 감시했다.

13대 종손의 말씀이다.

"향교가 옆으로 오고 얼마 뒤 할아버지들이 솟을대문을 없애기로 결정했습니다. 감시당할 이유가 없으니까, 떳떳하게 아예 다 까발리고 살자고 하셨답니다."

대신 후손들은 사랑채 댓돌을 하나 더 놓았다. 그 댓돌에 신발이 있으면 집안 남자가 집에 있다는 뜻이다.

"감시하려면 해봐라,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또 옛 마당 오른편 언덕에 작고 좁은 집을 한 채 지어 망루로 삼았다.
그리하여 여느 명문가와 똑같이 담장과 솟을대문을 가져야 할 명재고택이 건물만 덜렁 솟은 탁 트인 구조로 수백 년 넘게 서 있게 되었다.

자연합일(自然合一)의 실현이 아니라 정치 사찰이 잉태한 건축 구조였다.


7. 나눔의 품격 — 의창과 종학당

종학당 정수루. 왼편 고르바조프 대통령 방문 기념식수
필자의 7대 선조 盤湖 윤광안 선생은 충청ㆍ경상 관찰사를 역임. 종학당 발전을 위해 서적,목재. 쌀 등을 기증한 정수루 현판글에도 수록되어 있다.


권력을 거부한 명재였지만, 그의 문중은 지역 사회에서 막중한 책임을 다했다. 의창(義倉)이라는 창고에서 해마다 200가 마의 쌀을 지역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조선시대 쌀 1 가마가 80kg이니, 16톤에 달하는 양이다. 단순 계산으로 500명이 한 달을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교육이었다. 종학당(宗學堂)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신분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무상으로 가르쳤다. 그 결과 문과 31명, 생원·진사 80여 명을 배출했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가 평균 3~4회 응시 끝에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대략 7년에 한 명꼴로 합격자를 낸 셈이다.

재력보다 더 값진 것은 교육 철학이었다. '초학회계도(初學會計之圖)'라는 체계적인 커리큘럼으로 독서법부터 사고법까지 세밀하게 가르쳤다.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어떻게 생각을 정리할 것인가.

교육이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전수하는 것임을 선조님들은 알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종학원을 찾아 먼저 방문한 곳은 종학당이었고, 두 번째가 언덕 위 대형 강당인 향원익청 현판이 정면 상단에 부착되어 있는 정수루, 강당 뒤로는 백록당 즉 책을 보관·관리하는 서고 건물이었다.

문화해설사의 해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전달할 전문 인력 양성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1호차는 버스 안에서, 2호차는 명재고택 가는 길에 부연 설명을 드렸다.

눈썰미 있는 분들은 강당에 설치된 편액에 종학당과 강당의 유래를 자세히 설명해 놓은 것을 보셨을 것이다. 1800년 전후 7대 직계 선조 반호 윤광안 선생께서 종학당을 설치·운영했던 선조들의 유업을 받들어 충청관찰사와 경상관찰사를 역임하며, 역시 교육이 힘은 집안 문중뿐만 아니라 나라를 구한다는 신념으로, 종학원의 중수에 쌀과 서적, 목재 등을 넘칠 정도로 기증하여 오늘날 종학당의 모습이 유지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자부심을 늘 간직하는 마음이다.

안동 충효당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하셨다면, 종학당에는 러시아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다녀가시며 정수루 입구 앞에 식재한 멋진 소나무와 방문 기념비가 있다. 눈썰미 있는 분들은 인증샷을 찍는 모습이 나의 시야에 들어오기도 했다.

시간이 부족하여 아쉽게도 유교문화진흥원의 약식 박물관에 의창 문구가 큼직하게 있는 유물을 못 본 분들이 더 많은 것 같다.


8. 선업은 후대에 맞춰온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불타지 않은 유일한 양반가. 한국전쟁 때도 폭격을 면한 집. 그 이유는 명확했다. 박희동 장군이 미군을 설득하며 했던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이 마을 사람 중 파평 윤 씨 집안의 은혜를 입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선업(善業)은 보험이 아니다. 그것은 회귀한다. 명재 선생은 제자들이 지어준 화려한 고택 대신 초가를 선택했고, 시호 문성(文成)을 받은 그 정신은 300년 뒤 자손들에게 폭격 없는 하늘을 선물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추상적인 덕목이 아니라, 이렇게 구체적인 삶의 선택들로 이루어진다.


제3부: 새벽을 깨우는 닭의 봉우리

9. 이은시사(離隱時舍) — 은둔을 떠나 때에 머물다


이은시사 현핀
고풍스러운 명재고택


명재고택 사랑채에 걸린 현판, '이은시사(離隱時舍)'. 은둔을 떠나 때에 머문다는 뜻이다. 이 네 글자는 명재 윤증의 삶 전체를 압축한다.

'이은(離隱)'은 은둔을 떠난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역설을 품고 있다. 조정을 떠나 은둔했지만, 그것은 진정한 은둔이 아니었다. 지역 사회를 위해 쌀을 나누고, 후학을 양성하고, 바른말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을 등진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만났다.

'시사(時舍)'는 때에 머문다는 뜻이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 벼슬에 나가야 할 때가 아니면 물러나 있고, 세상을 위해 할 일이 있으면 은거 속에서도 실천하는 것. 이것이 명재가 보여준 지혜였다.

문화해설사가 명재고택 유래를 잘 설명해 주었지만, 후손의 입장에서 한 가지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종손이 외출하여 사전 전화로 허락받고 사랑채 창문을 개방하여 내부를 보시도록 안내했고, 본채 안으로 입장하여 마루에 걸터앉아 300년 된 고택의 맛을 느끼시도록 안내했다.

장독대를 지나 구릉지에 올라 400년 된 느티나무 너머로 연못을 바라보도록 안내한다. 봄이면 연산홍, 여름의 회화나무 녹음, 가을이면 사당 앞 은행나무, 겨울의 설경, 사계절이 이 마당을 거쳐 간다. 필자의 개성공단 1188일 기억 연재 금강산 편에도 소개한 바, 마루 앞에 설치한 검은 돌 석가산은 금강산을 본떴다.

자주 갈 수 없는 명산을 마당에 불러들여, 이 누각에 앉아 있으면 속세를 벗어난 도원경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해시계는 동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다. 명재 집안은 음력보다 양력이 정확하다고 믿어, 모든 기록을 양력으로 남겼다고 한다. 과학과 실용, 예술과 철학이 한 공간에서 숨 쉰다. 300년 전 선비들의 사유가 지금도 이곳을 떠나지 않는 것만 같다.
10. 2018년, 그리고 2025년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는 2018년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1980년대 서울 인사동에는 소론 다방이 따로 있었고 노론 다방이 따로 있었다. 서예와 한학 선후배끼리 인사동에 가면 자연스럽게 발길이 갈라졌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충청남도 논산 땅에서 300년 넘도록 이 땅을 흔들어놓았던 노론 독재 시대의 흔적을 목격한다. 왕조도 사라지고 식민시대도 갔다. 하지만 옛 흔적은 완연하다. 2025년 오늘, 우리는 함께 차향(茶香)을 즐기고 있는가?

명재고택 앞에 선 2025년의 우리에게 묻는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권력을 거부할 용기가 있는가. 가진 것을 나눌 품격을 지녔는가. 감시와 사찰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가.


11. 명재 선생의 지혜

명재고택은 한국의 고택 중 두 번째로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진짜 아름다움은 건축에 있지 않다. 숨은 듯 살면서도 세상을 외면하지 않았던 삶, 가진 것을 나누되 자랑하지 않았던 품격,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정확히 알았던 지혜. 그것이 이 고택을 빛나게 한다.

제자들이 정성껏 지어 올린 집을 거부하고 초가에 머물렀던 윤증. 그가 살던 곳, 그의 호가 된 이름, 그리고 그를 기리는 영당의 이름. 모두 酉峯(유봉), 닭 봉우리다.

높고 화려한 봉황이 아니라 새벽을 깨우는 닭. 서쪽 방향을 의미하는 酉는 해가 지는 곳이지만, 동시에 다음 날 새벽을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둠 속에서 다가올 새벽을 준비하는 것. 그것이 윤증이 선택한 길이었다.

담장 너머로 가을바람이 분다. 이은시사 편액 아래서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권력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거부할 줄 아는 용기. 많이 가진 것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나누는 품격.
명재 선생의 9대손 윤하중은 개화기 문학자가 되었다. 선비의 후손이 시대의 변화를 읽고 새로운 길을 연 것이다. 가문의 정신이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새로운 형태로 꽃 피우는 것임을 보여준다.

에필로그: 새벽을 깨우는 닭의 봉우리

해가 서쪽으로 기운다. 이은시사의 그림자가 마당 가득 펼쳐진다. 300년 전에도 이런 햇살이 이곳을 비췄을 것이다. 그리고 300년 후에도, 이 가을 햇살은 이 고택을 부드럽게 어루만질 것이다.

대문 없는 집은 말한다. 떳떳하면 숨길 것이 없다고. 감시당할 이유가 없다고. 진정한 저항은 대문을 높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대문을 없애버리는 것이라고.

이은시사(離隱時舍). 은둔을 떠나 때에 머물다.
300년 전 한 선비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2025년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언제 나아가고, 언제 물러날 것인가. 그리고 물러나 있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신의 봉우리는 화려한 봉황의 그것인가, 아니면 새벽을 깨우는 닭의 酉峯인가.
김홍신 문학관에 이은 관촉사 부처님 그리고 명재고택 종학원을 방문한 우리 디지털문인협회 회원님 모두 단톡방에 "땡큐" 단어가 연발되는 문구를 보니 유교문화의 진수 논산 지역 방문길은 대만족의 시간이지 않았을까.


2025. 10. 24.
글을 잘 쓰기를 꿈꾸는 소생 파평윤가 석구 드림


작가 후기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문화탐방을 주관해 주신 디지털문인협회 가재산 회장님과 김영희 총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김홍신 작가님께서는 문학관에서 직접 소개 및 집현실 내전까지 열어주시며 작가님이 늘 강조하시는 "그래, 고마워. 잘했어, 감사해"의 정신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 잘하셨어요. 고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작가님께서 몇 번 강조하신 대로 다음번에는 꼭 돈암서원을 방문하여 김장생, 김집 선생의 얼을 배우고, 인근 탑정리 저수지 붕어찜에 폭탄주 석 잔 중 한 잔은 꼭 따라 올리겠습니다. 망팔십, 늘 강건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여건이 되는 어느 날, 정수루 강당 중수 시 후학 양성에 큰 기여를 하신 반호 윤광안 선생, 필자의 7대조께서 건축한 백마강변 반호정사와 책 읽기 좋고 밭 갈기 좋고 낚시하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의 삼의당에도 함께 가보는 그날이 오길 희망합니다.

박범신 작가의 『소금』의 배경지 강경 옥녀봉에도 올라 금강의 젖줄을 살피고, 김대건 신부가 상해에서 서품을 받고 제주도 용수포구에서 수리한 배를 타고 처음으로 입항한 강경포구 인근 나바위 성당도 둘러보는 그러한 시간도 꿈꾸어 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현장을 가보아야 글이 보이고 글이 된다는 것을 이번 탐방에서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2025.10.24
김홍신 문학관 가는 길에
조선의 선비의 길, 명재고택과 종학당을 공부하며 by sk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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