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지은 집, 삶이 쓴 이야기] 김홍신문학관에서,
[바람이 지은 집, 삶이 쓴 이야기]
김홍신문학관에서,
《좌충우돌 인생2막 71호. 2025.11.13》
천시지리인화(天時地利人和)
논산으로 가는 길, 가을 하늘 아래 펼쳐진 평야를 지나며 나는 맹자(孟子)의 하늘의 운(時期)보다 땅의 이점이 낫고, 그보다 사람의 화합이 더 중요하다는,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말한 '천시지리인화(天時地利人和)'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마주할 김홍신문학관의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언어임을 깨달았다.
디지털문인협회 회원 80여명이 두대로 탑승한 버스 안에서, 그리고 문학관에서 직접 마이크를 잡고 회원들에게 신나게 강의하신 이 시대 최고 작가 김홍신 선생님의 고귀한 말씀을 일기로 남긴다.
"천시(天時)", 시대가 바뀌었다. 과거에는 작가는 교사이고 독자는 학생이었다. 작가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문학관을 짓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생존 작가의 문학관이 당당히 서 있고, '상업주의 문학'이라 폄하되던 것이 '문화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재평가된다. 『인간시장』 같은 작품이 국제무대로 나갈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왔다.
"지리(地利), 논산이라는 땅. 조선시대 기호학파의 중심지였던 이곳에는 세분의 유교학자 대선비인 사계 김장생, 명재 윤증, 우암 송시열 선생이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그 사계 김장생의 11대 후손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다. 천주교 박해로 할아버지는 옥사하고 할머니는 도망쳐야 했던 그 집안. 그 역사의 땅 위에 이제 김홍신문학관이 서 있다.
"인화(人和)", 72억 원을 들여 문학관을 지어준 후배 남상원 회장. 영화 「조선남자」로 50억 손해를 보고, 「천주교인 김대건」으로 120억 손해를 봐도, 다시 문학관을 지어주는 그 우정.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이 빚어낸 기적이다.
대 작가 선생님의 소시적 두목의 용기부터 문학관 여정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제가 어릴 때 동네 두목이었어요."
김홍신 작가님이 꺼낸 고백은 국민학교 시절 철로 사이 동네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운동장과 철로를 놀이터 삼아 뛰놀았다. 그리고 기차가 오면 두 아이가 철로에 눕는다. 늦게 일어나는 아이가 두목이 된다.
"논산역 저 멀리 기차가 둥그렇게 돌아서 오거든요. 귀를 대고 소리를 듣고, 불빛을 보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죠. 근데 저는 안 일어났어요."
철길 따라 칙칙폭폭, 점점 더 크게 들리는 그 소리에 희열을 느끼며 죽음과 맞서는 용기. 마지막 순간 귀를 대고 일어서는 그것이 소년을 두목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자라서 141권의 책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죽음 앞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배짱이, 80년도 군사정권 시절 『인간시장』이라는 제목을 지키게 했고, 금지당한 연극 원고를 30년 후에 되찾게 했다.
79세의 작가는 지금도 철로에 누워 있다. 백제사를 쓰며, 150권을 목표로, 여전히 죽음 앞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 부분에서 대 작가님은
"근심, 걱정, 분노, 짜증... 없으면 좋겠죠? 그런데 그게 없으면 죽은 사람입니다. 살아있다는 건 이 고해(苦海)를 담고 사는 거예요."
141권의 책을 쓴 작가가 전하는 인생의 진실이다. 불을 끌 만큼 눈물을 흘려봤는가. 거지에게 천 원을 내밀며 두 손 모아 감사를 전해봤는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을 용서하려 매일 결심해봤는가.
"용서를 하는 순간, 나는 그로부터 벗어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그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률이 아니다. 인생을 살아낸 사람의 체험적 지혜다. 그래서 그의 시집은 시집이 아니라 철학서가 된다.
벽을 채운 꿈 이야기이다.
문학관에 도착해 단체사진을 찍고 대작가님은 손수 마이크를 잡는다. 신이 났다. 신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보이다.
김홍신문학관은 단순한 전시공간이 아니다. 1층부터 3층까지, 141권의 책이 벽을 가득 채운다. "평생 소원이 벽을 가득 책으로 채우는 것"이었다던 작가의 꿈이 실현된 공간이다.
입구에서부터 압도된다. '바람이 지은 집, 바람이 지은 책'이라는 현판. 바람처럼 자유롭고, 바람처럼 시공을 초월하며, 바람처럼 마음 편안하게. 그렇게 살고 싶다는 작가의 소망이 건축으로 구현되었다.
1층 전시실에는 작가의 생애가 연대기로 펼쳐진다. 1945년 논산 출생. 건국대학교 재학 시절 데뷔. 『인간시장』으로 빌리언셀러 작가가 되기까지의 여정. 그 모든 순간이 사진과 원고, 육필 원고와 초판본으로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작품 세계가 펼쳐진다. 역사소설, 대하소설, 추리소설.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의 필력이 한눈에 들어온다. 『야망의 세월』, 『제5공화국』, 『한국의 뿌리』... 각각의 책이 시대를 증언한다.
별채 집필관은 작가의 성소(聖所)다. 게르마늄 황토 바닥에 편백나무 벽과 천장. 전화도 안 되는 그 공간에서 작가는 지금도 글을 쓴다. 150권을 목표로, 백제사를 집필 중이다.
"소설가는 남의 잉크병에서 잉크를 퍼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몸속의 피를 펜촉에 찍어 쓰고, 살갗을 벗겨가며 쓰는 사람입니다."
1998년 9월, 작가가 한 말이다. 그리고 그 각오대로 살아온 사람의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
대나무의 지혜 등 김홍신 작가님의 최근 시집 『그냥 살자』에는 대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공교롭게도 일주일 전 동국대 CEO 성장 인문학 특강에서 작가님으로부터 친필사인 시집을 선물로 받았다. 작가님의 호 '모루'가 낙관으로 찍히며 서명까지 새겨진 그 시집.
모루. 대장간에서 달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평평한 쇳덩이. 온 생애를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대작가에게 이보다 어울리는 호가 또 있을까.
시집에서 세 편을 골랐다.
"대바람 소리"
하늘에게 어찌 살라느냐 물으니
대나무처럼 살라하네
대나무는 가늘고 길어도 쓰러지지 않아
마디 있고 속 비어 그렇다네
인생의 고비가 마디요
속을 비우는 건 마음 내려놓은 거라네
대나무에게 어찌 살라느냐 물으니
바람처럼 살라 하네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지
걸림 없고 자유로워 그렇다네
사랑과 용서로 짠 그물에는
바람도 걸리고 하늘도 웃는다네
김종회 교수님은 강평하셨다. "이것이 시인가, 철학서인가. 젊은 시인들은 이런 시를 쓸 수 없다. 인생의 경륜이 있어야만 이런 언어가 나온다."
인생의 고비가 '마디'라는 것. 속을 비우는 것은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라는 것. 걸림 없이 자유로운 삶은 사랑과 용서의 그물 속에서야 비로소 웃음을 얻는다는 것.
"후회"
부자든 가난하든
출세했든 실패했든
장수했든 단명했든
유명하든 무명이든
죽어가면서 마지막 후회 세 마디
그때 좀 참을 걸
그때 좀 베풀 걸
그때 좀 재미있게 살 걸
간결하지만 묵직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 남는 후회는 단 세 마디. 그 짧은 세 문장에,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시인의 조언이 담겨 있다.
"겪어보면 안다"
굶어보면 안다 밥이 하늘인걸
목마름에 지쳐보면 안다 물이 생명인걸
코 막히면 안다 숨 쉬는 것만도 행복인 걸
일이 없어 놀아보면 안다 일터가 낙원인 걸
아파보면 안다 건강이 엄청 큰 재산인 걸
잃은 뒤에 안다 그것이 참 소중한 걸
이별하면 안다 그 이가 천사인 걸
지나 보면 안다 고통이 추억인 걸
불행해지면 안다 아주 작은 게 행복인 걸
죽음이 닥치면 안다 내가 세상의 주인인 걸
삶의 모든 경험을 통해 깨닫는 지혜. 굶어봐야 밥이 하늘임을 알듯, 목마름에 지쳐야 물이 생명임을 안다. 아픔을 겪어야 건강이 큰 재산임을, 죽음 앞에 서야 내가 세상의 주인임을 깨닫는 인간사의 진리가 시 속에 담겨 있다.
또 다른 시 한 편,
"술잔에 담긴 별"
술잔에 별이 떠 있다
술잔 했던 별을 마신다
심장이 벌렁벌렁 춤춘다
김 교수님은 평가중에 이 시를 소개하며 말했다. "여러분, 술잔에 별이 떠 있을 수 있나요? 없죠. 하지만 시에서는 가능합니다. 그게 시적 허용입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기교가 아닙니다. 이 시는 삶의 환희를, 살아있음의 기쁨을 노래하는 겁니다. 별을 마신다는 것, 그건 우주와 하나 되는 경험입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시에서는 가능하게 만드는 마법.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술을 마시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깊이, 인생 철학의 응축이 여기 있다.
"따라 배우기"
거지에게 천 원짜리 한 장 내밀고
두 손 모으고 인사했다
또박또박 걸어가는 그에게
어떤 여자가 따라
두 손 모으고 인사했다
작가님은 이 시에 관해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러분, 거지에게 돈을 주고 인사해본 적 있으세요? 저는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도 사람이고, 저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뒤에 나오는 여자입니다. 그 여자가 따라서 인사를 했다는 거. 선행은 전염됩니다. 내가 한 작은 행동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선행은 도처에 있다. 내 발길을 다듬고 또 다듬어야 한다. 이것은 가르침이 아니다. 실천의 기록이다. 그래서 이 시는 시가 아니라 삶이 된다.
"그 누구한테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집필관의 비밀"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집필관 3층 내실이었다. 보통은 공개하지 않는 공간인데, 대작가님은 특별히 문을 열어주었다.
"여기가 제 사적 공간입니다. 이 내실은 핸드폰 전파도 차단됩니다."
"그리고 저는 매일 아침 마음의 글씨를 씁니다. 제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죠. '사랑', '용서', '감사'... 이런 단어들을 쓰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책상 위에는 만년필과 노트가 놓여 있다. 컴퓨터는 없다. 여전히 손으로 쓴다.
"저는 컴퓨터로 글을 쓰지 않습니다. 손으로 써야 마음이 전달됩니다. 타자를 치면 머리로 쓰는 글이 되지만, 손으로 쓰면 가슴으로 쓰는 글이 됩니다."
김홍신 작가님께서 문학관과 집필관 속살을 모두 보여주시고 나오는 대로변에서 건물을 바라본다. 매의 눈에는 벽면 중간 가로로 된 공간에 모루 한 척이 늠름하게 장식되어 있다. 마치 대장장이가 철을 녹이듯 대작가님의 만년필이 원고지를 녹이는 듯한 느낌이다.
"주옥같은 대 작가 선생님의 네 마디 인생 지침서 주문"
관촉사 오르는 길에 작가님 곁을 함께 걸으며, 나는 지난 한여름 8월 동국대 박영희 교수님의 초대로 대작가님과 선운산 내장산CC에서 36홀을 누볐던 날을 떠올렸다. 서울에서 정읍까지 차량으로 오가며 36홀에서 들었던 주옥같은 말씀.
"그래, 고마워, 잘했어, 감사해."
이 네 마디만 입에 달고 살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씀. 오늘 디지털문인협회 시간에 중계방송 자랑질을 한다.
"그래"는 긍정이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자세다.
"고마워"는 감사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잘했어"는 격려다. 나 자신과 남을 격려하는 말이다.
"감사해"는 다시 한번 감사다. 거듭 감사하는 것이다.
"여러분, 오늘부터 이 네 마디를 따라해보세요. 상대방에게 '그래, 잘했어' '고마워' '감사해' 꼭 해보세요. 그러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귀경길에서 떠오는 대작가님의 나환자촌에서 배운 것"
귀경 버스 길에서 나는 작가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떠올렸다. 2년간 나환자촌에서 살았다는 이야기. 그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원형이 되는 작품을 썼다.
"나환자들은 손가락이 없습니다. 발가락도 없죠. 하지만 그들은 행복했어요. 왜냐하면 살아있으니까. 저는 그곳에서 배웠습니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요."
대 작가님은 나환자들과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잤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가 작품이 되었고, 그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소설가는 타인의 고통을 대신 앓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소설을 씁니다. 나 혼자 앓을 수 없으니까, 글로 써서 독자와 함께 앓는 겁니다."
또 터오른다. 역사는 증인을 만든다고.
작가는 1981년, 보안사에 잡혀갔다 나왔다. 군사정권 시절, 『인간시장』이라는 제목 때문에 공연이 금지당했고, 원고가 압수당했다. 그런데 3년 전, 군포문화재단 행사장에서 한 연극 지부장이 그 원고를 돌려주었다. 30년 만에.
"그때 제가 그 원고를 받아들고 울었습니다. 30년 동안 그분이 보관하고 있었던 거예요. 역사는 이렇게 증인을 만듭니다."
역사는 증인을 만든다. 그리고 그 증인이 쓴 글이 빌리언셀러가 된다.
"에필로그: 바람이 되어"
바람이 지은 집, 김홍신문학관을 나서며, 나는 입구에서 본 문구를 다시 떠올렸다.
"바람이 지은 집, 바람이 지은 책"
바람처럼 자유롭고, 바람처럼 시공을 초월하며, 바람처럼 마음 편안하게. 그렇게 살고 싶다는 작가의 소망.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望 팔십을 살아오며 체득한 삶의 방식이다.
강연이 끝나며 김교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이렇게 정색하고 경청하는 청중은 처음 봤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문학관을 방문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을 목격했고, 그 삶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들었다.
천시, 지리, 인화. 그 모든 것이 모인 자리. 그곳이 바로 논산 김홍신문학관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무엇을 남길 것인가. 141권의 책. 72억 원짜리 문학관. 그보다 더 큰 것은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무게다.
철로에 누워 기차를 맞이하던 소년이, 나환자들과 2년을 살며 그들의 이야기를 쓴 청년이, 군사정권의 탄압에도 펜을 놓지 않은 작가가, 이제 '바람'이 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그것이 자유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배웅길에 김홍신 작가님은 몇 번을 강조하신다.
"다음에 오시면 꼭 돈암서원에 가보세요. 김장생, 김집 선생의 얼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 또한 덧붙인다. "돈암서원에서 공부하고 3km 인근 탑정리 저수지에서 팔딱팔딱 움직이는 붕어 매운탕에 곁들인 붕어찜에 폭탄주 석 잔은 제가 올릴게요."
망팔십, 여전히 청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김홍신 작가님. 그가 우리에게 남긴 말은 단순하지만 깊었다.
"그래, 고마워, 잘했어, 감사해."
이 네 마디가 인생을 바꾼다. 김홍신문학관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이다.
2025. 10. 24.
글을 잘 쓰기를 꿈꾸는 소생이,
김홍신 문학관ㆍ명재고택ㆍ 종학당ㆍ유교문화진흥원을 방문하고 귀경버스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