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향하는 운명, 개성공단 첫 발자국(2)

by 윤석구


[개성공단 1188일의 기억] 북으로 향하는 운명, 개성공단 첫 은행원의 기록] (2)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러 가던 길을 통해 우리은행 윤석구 차장 일행은 2004년 10월 28일 개성공단으로 올라갔다.)


"화폐융통(貨幣融通)은 상무흥왕(商務興旺)의 본(本)이다." 금융 지원을 원활하게 하여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고종황제의 뜻에 따라 황실 자금과 민족자본으로 1899년 탄생한 대한천일은행, 현재의 우리은행에게 개성공단 입점 은행 선정은 100년 역사상 가장 큰 쾌거였다. 그야말로 '빅뉴스 중의 빅뉴스'였다.


이제 은행 내부의 관심은 북한 땅에 지점을 설치할 주관 부서 선정에 쏠렸다. '헌법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조문에 따르면 내국환 업무였지만, 남북한의 UN 동시 가입 현실을 고려하면 국외점포 담당인 국제부 소관이었다. 다행히 재경부 질의 결과, 해외 점포 개설에 준해 국제부가 주관하기로 결정되었고, 정준구 차장이 팀장을 맡아 헌신적으로 업무를 뒷받침했다.


북한 땅에 은행을 설치하고 초대 현지 근무 직원을 발령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때 정주영 회장님의 "이봐, 해봤어?"라는 한마디가 내 심장에 용기와 도전 정신을 움트게 했다. '요만큼'이나 '이만큼'이 아닌, '오직 더 하여야 더 할 게 없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하는 최선'이라는 회장님의 정신을 《이 땅에 태어나서》 회고록을 통해 여러 번 읽었던 터였다.


'그래, 사내로 태어나 이름 석 자는 남겨야지!' 조부는 심양에서 한의술을, 종조부는 만주에서 전기기술을, 부친 또한 젊은 시절 강경에서 나주·목포를 오가는 운반선 경영에 도전했던 개척정신이 내 피 속에 흐르고 있었다. 북으로 가라는 팔자라면 개성을 발판으로 평양에 자랑스러운 우리은행 깃발을 꽂아보자. 이 길이 숙명이라면.


인사부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했는지, 백여 명의 지원과 추천 속에서 장교 출신 등을 심사숙고한 끝에 마침내 내 이름이 적힌 '개성공단지점 발령' 인사명령을 게시했다. 발령 전까지만 해도 간절히 기도했건만, 막상 잉크 마르지 않은 발령지를 읽는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아이들은 한창 성장하는데, 또한 북한 땅 근무를 지원한다면 팔을 매달고 반대할 것 같은 아이들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내는 "죽든 살든 당신 마음대로 하라"며 얼굴을 돌렸다.


2004년 9월 9일 우리은행 개성공단 입점은행 선정, 9월 23일 직원 발령, 그리고 10월 28일 지점을 만들 현지를 방문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적성국가' 북한으로 그냥 갈 수는 없었다. 먼저 통일부에 북한 주민 접촉 승인을 신청하고, 북한의 초대장을 받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수유리 통일교육원에서 방북 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지점을 세울 땅과 숙식할 건물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가 들은 대로 북한 사람들의 머리에 뿔이 달려있는지 현장을 직접 봐야 감이 올 것 같았다.
절차에 따라 수속을 밟고 10월 28일 새벽 6시 집을 나섰다. 매일 개성공단을 왕복하는 계동 현대아산 본사 버스에 몸을 맡겼다. 고종황제께서 내탕금으로 자본금을 대며 강조하셨던 화폐융통 상무흥왕의 정신이 떠올랐다. 개성공단 개발에서도 금융 지원을 원활히 하여 남북 경제협력사업에 민족은행 우리은행이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면. 내 팔자, 북으로 향하라는 운명이라면.


북으로 향하는 버스 안의 공기는 엄숙했고, 늦가을 임진강 변의 공기도 차가웠다. 마음마저 꽁꽁 얼어붙는 듯했다. 민간인이 갈 수 있는 마지막 구간인 통일대교를 건너 경의선출입사무소에 도착했다. 핸드폰은 사무소에 보관하고, 여권 대용 방문증명서로 세관 검사를 마친 뒤 다시 버스에 탑승했다.
출발 시간 오전 10시 정각, 늠름한 국군 장병들의 호위 지프차가 군사분계선으로 향하는 길잡이 역할을 맡았다. 동시에 북쪽에서는 북한군 지프차가 출발하고, 우리 헌병차는 군사분계선 200m 지점에서 되돌아가는 방식이었다. 남방한계선 전후로 지금은 임진각 공원에 있지만, 6·25전쟁 당시 수만 발의 기관총 세례를 받으며 피난민을 실어 나른 화차 기관실 한 량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탄 버스는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과 회담하러 갈 때 임시로 노랗게 칠해진 바로 그 땅, 그 군사분계선을 지나고 있었다.


분단 반세기를 넘어 처음으로 민간 금융인이 북한 땅을 밟는 역사적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는 북한군 초병의 인원점검과 세관 검사를 거쳐 개성공단 조성부지를 둘러보는 생생한 현장 체험기가 이어진다.

작가의 이전글'군사분계선 넘은 은행원의 기록'(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