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 개점식 현장기 (4)

by 윤석구

[개성공단 1188일의 기억]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 개점식 현장기 (4)


분단 60년, 북한 땅에 처음 세워진 은행
"남북금융협력사업 굳건한 토대가 되어라"


2004년 10월 28일, 역사적인 북한 땅을 밟고 개점 행사일까지 한 달여의 시간은 하루가 삼 년 같았다. 정식으로 금융회사 해외 점포 설치 신고 수리를 받아야 했고,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너무도 빈약한 건물에 영업점 객장을 꾸며야 했다.


시범 단지에 입주하는 신원, 로만손 등 기업 대표님들을 찾아뵙고 남북경제협력사업의 선구자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인사를 건네며 '함께 가자'고 손을 맞잡았다. 개점식에 초대할 분들을 선정하고, 북측으로부터 하객 초청장을 받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국방부 시계는 돈다는 말처럼, 개점 D-Day를 정하고 밤을 새워가며 한 가지 한 가지 꼼꼼하고 차분하게 준비했다.

북한 개성공단 총괄관리인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박철수 부총국장과 함께 한 윤석구 당시 우리은행 차장. 공대 출신으로 합리적 온건파로 기억하고 있다.


어느덧 개점 사흘 전, 조조와 싸우러 나가는 제갈량의 심정으로 이종휘 수석부행장님(당시)께 개점식 행사를 최종 보고 드렸다. 그리고 은행 내 지인과 선후배들에게 붓을 들어 "북한 개성 잘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출사표를 썼다.


"다음 주 화요일 북한 땅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메일로 인사를 올립니다. 깊어가는 가을날의 빗방울이 존경하는 선후배님들을 더욱 생각나게 합니다. 막상 북한으로 출발하려니 제2의 군대 가는 마음입니다. 개성공단지점은 2004년 12월 1일 자본금 500만 달러로 영업을 개시하고 12월 7일에 개점식을 갖습니다. 선후배님들 모두 초청하고 싶지만, 추후 북측 초청장을 받아 개성에서 뵙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당분간 통신이 연결되지 않아 고립된 생활이 예상되고, 방북 절차들이 매우 복잡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어 안타깝습니다. 지점 개설을 준비한 지난 2개월은 16년 근무 기간보다 더 많은 일을 한 시간이었습니다. 통일의 기초를 닦는 하나의 밀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근무하고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선후배님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개성공단지점 개설위원 차장 윤석구 올림"


지구 반대편에서 이메일을 읽으신 미국 뉴욕의 황록 본부장님(당시)이 곧바로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윤 박사! 이게 얼마 만인가? 우리가 어릴 때 배운 남북이 아닌 같은 민족으로 다가서는 최근의 움직임들이 통일을 향한 작은 밑거름으로 쌓여가는 것 같네. 그중 하나가 이번 개성공단지점 개점이 아닌가 싶네. 멀리서나마 건투를 비네."


청량리지점 김병효 지점장님도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개성공단지점 개점을 축하합니다! 우리은행 행로에 큰 발자국을 남기는 길에 들어섰음을 축하하고 한가위 보름달만큼이나 큰 희망을 품고 열심히 노력하시길 기원합니다." 삶의 길목에서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는 자주 만난다. 보내는 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개성이라는 낯선 땅에서 나를 견뎌내는 힘이 될 것이었다.


개성공업지구 우리은행 개점식.


드디어 12월 1일, 서울 은행 본부와는 단절된 지점 자체 전산망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그리고 분단 이후 북한 땅에 12월 7일 자로 국내 은행 최초로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을 공식 오픈했다. 하지만 개점식은 출발부터 삐걱댔다. 새벽 6시, 개점식 안내를 위해 설치한 대형 아치형 홍보 간판을 본 북측 윤 참사가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개성공단'이라는 표현은 쓸 수 없고, 북한 법에서 공포한 대로 '개성공업지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글자를 고치던지 간판을 철거하던지 새벽 추위를 떨며 한 시간 동안 큰 소리로 실랑이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그냥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북측에서 이유도 없이 테이프 커팅과 축사도 할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현대아산 김윤규 사장의 참석마저 불투명하다는 소식에 순조로운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막막했다. 다행히 날씨는 우리를 축하해 주듯 반전되었다. 전날 밤 몰아치던 바람이 아침 태양과 함께 잔잔해졌다. 컵라면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사무실을 정리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드디어 10시 20분, 군사분계선과 북측 CIQ를 통과한 황영기 은행장님이 도착했다. 통일부 조명균 차관보, 금융감독위원회 양천식 부위원장 등 많은 인사가 참석했다. 그런데 갑자기 참석하지 못한다던 김윤규 사장도 오셨다. 김 사장님의 참석 덕분인지 북측에서도 많은 인사가 나와 개점을 축하해 주었다. 당초 현대아산에서 성원했던 은행이 선정되지 못하고 우리은행이 입점하면서 다소 앙금이 있었기에, 하객으로 참석하느냐 마느냐로 고민했던 김 사장의 마음은 이해가 되면서도 아쉬운 대목이었다.


드디어 개점 행사 사회자의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 개점식을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안내가 울려 퍼지고, 황영기 은행장님과 김동근 관리위원회 위원장님의 축사가 이어졌다. 테이프 커팅과 함께 오색 풍선이 하늘을 향해 힘껏 날아올랐다. 분단으로 폐쇄되었던 북한 지역 60여 개 지점 복원의 첫 단추라는 측면에서 너무도 큰 의미가 따르는 순간이었다. 하객 모두 뜨거운 박수 속에 지점 안으로 들어와 객장을 둘러보았다.


은행장님께 "저는 20대 초반에 삼성물산에 근무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깜짝 놀라셨다. 하객으로 함께 오신 에스텍시스템 박철원 회장님도 "우리는 다 같은 삼성물산 출신입니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셋이 나눈 악수가 유달리 뜨거웠다.


황영기 은행장 개점 축하 방명록 메세지


조그마한 지점은 환전하겠다는 분들과 통장을 만들겠다는 사람들로 금세 북적였다. 북한 땅에 설치된 은행에서 기념 통장을 만드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참고로 계좌를 북한 용어로는 '돈자리', 환율을 '환자시세'라고 한다.


카메라 플래시가 축포처럼 더욱 빛나게 터졌다. 이 순간을 위해 그리도 힘들어했나 보다. 북측 땅에 자랑스러운 우리은행 간판을 내손으로 붙이고 개점 행사를 하기까지의 모든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가슴속 눈물을 삼키며 오찬장인 개성 시내 선죽교 인근 자남산여관으로 이동했다. 고려수도 개성으로 이동하면서 '오늘 축하객으로 오신 분들은 창밖의 북한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까? 개점식이면 기뻐야 하는데 왜 이리 착잡할까? 가족과 떨어져 이곳에서 홀로 근무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온갖 잡념이 얽혔다.


북한 측의 예고 없는 일정 변경이 또 있었지만, 선죽교를 걸으며 여기까지 온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남산여관 오찬 음식은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지만, 애써 먹어야 했다. "개성공업지구 발전과 우리은행의 발전을 위하여 쭉 내자!" 건배 소리 속에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6개월에 한 번 서울 집에 가도록 복무규정이 되어있다"라고 답하니, "펜스 사방에 북한 군인들이 총 들고 지키는 이곳에서 어떻게 6개월을 버티겠느냐"며 놀라워했다. 이곳에 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되었는데, 개점식이 아니라 '고통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당국 발급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 영업허가 세무등록증 (개성공업지구지점)

하객들을 잘 전송하고 북측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사무실로 돌아오니 긴장감이 완전히 풀리며 몸이 천근만근으로 늘어짐을 느꼈다. SBS 뉴스에 개점식 장면이 보도되었고, 창구에 선 내 모습이 어색했다. 동료 안 차장이 모처럼 활짝 웃었다. 각종 업무로 지쳐가던 안 차장의 간만의 웃음이었다.


MBC, KBS에서도 5분 이상 상세히 보도되는 것을 보며 그래도 큰 미션 하나는 완수했다는 후련함이 밀려왔다. 마치 옥동자를 낳기 위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그것도 군사분계선을 넘은 북녘땅 개성에서 그렇게 그렇게 울었나 보다.

다음 편에서는 개성 전문대학 북한 출신 여직원 은행원과 함께 근무하며 나눈 이야기 및 개성공단 시범 단지에서 생산된 첫 제품인 '통일 냄비' 등을 들려드리겠다.


2004.12.7 당시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 개점식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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