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리안치(圍籬安置)나 다름없었다' (5)

by 윤석구

[개성공단 1188일의 기억] '위리안치(圍籬安置)나 다름없었다' (5)


- 제한된 환경 속 자유의 의미: 개성공단에서 찾은 깨달음


- 자유대한민국의 자유로운 세상을 그들이 알겠는가


개성공단 개발 총 2000만평 1단계 100만평 개발 기반공사 중,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회 부속 건물 내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우측)


전통 한옥에서 취미를 즐기거나 손님을 맞이하던 공간을 우리는 사랑방이라 부른다. 2004년 12월 1일 개점과 12월 7일 개점식 행사를 남북 고위 인사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치르고 겨우 한숨 돌릴 때, 개성공단에는 차가운 겨울이 찾아왔다. 다행히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은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개성공단 부지 기반 공사에 참여한 건설업계 관계자들과 투자 신청 기업인들이 자주 은행을 찾아왔다. 그들은 공단과 남북 관계의 전망,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투자가 합당한지를 물어왔다. 그 누구도 시원한 답변을 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기업인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조언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현장을 직접 방문한 이분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북한 근로자 한 달 인건비가 10만 원도 안 되는 65달러에 불과하다는 점과 서울에서 원재료를 공급하고 완제품을 생산해 국내로 공급하는 물류 시스템의 시간 절약 효과,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민족으로서 한글 즉 말이 통할 수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이보다 더 좋은 입지 조건이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100명 중 100명 모두 "그러니까 투자하려고 현장에 와보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대답했다.


15개 시범 단지 기업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반 시설 공사였다. 한국토지공사는 사전 수요 조사를 바탕으로 한전과 KT 등의 본격적인 건물 부지를 미리 계획해두었다. 각 기관의 지사장과 직원들이 서울 본부로부터 발령받아 속속 개성공단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개성공단관리위원회와 우리은행, 한전, KT, 토지공사 등 준공공기관들이 사랑방에서 의기투합하니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달이 되어가는 개성공단 생활의 적막감 속에서 간헐적으로 눈발이 날리던 크리스마스를 앞둔 주말, 나는 자유와 비자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자유란 무엇일까? 단순히 억압받지 않는 상태일까? 아니다. 자유는 한 인간이 지닌 모든 잠재력을 꽃피우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 나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성장해왔다. 그러나 개성공단에서의 시간은 내가 누리던 자유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Gemeni가 만들어준 위리안치 이미징 사진, 펜스 밖 북한군 초병의 곙계모습이 현장과 매우 흡사한 느낌이다.)


1단계 100만 평 중 시범 단지는 고작 2만 8천 평이었다. 학교 운동장만 한 그곳은 펜스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50여 명의 개성공단관리위원회 직원들과 함께하는 생활은 어찌 보면 위리안치(圍籬安置)나 다름없었다.


삼시 세끼 함바집 같은 식당 밥상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때로는 공단 맨 위쪽 북한 식당 '봉동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북한 여성이 부르는 '반갑습니다' 노래와 기타 반주 소리가 울려 퍼지면, 대동강 맥주 한 잔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어느새 시간은 연말로 흘러가고 있었다. 명동이라면 거리마다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하게 빛날 계절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청교도보다 더 금욕적인 환경 속에서 조용히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유로운 대한민국 국민이 규격화되고 제한된 공간에서, 북한 군인들이 경계를 서는 1만 8천 평 남짓한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거나 지점에 설치된 YTN 국내 보도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에는 공단을 만드는 과정에서 닦인 흙길을 걷거나 뛰는 것이 유일한 업무 외 시간 활용법이었다.


하지만 뛰는 것 그 자체는 체력 단련을 위한 운동과는 달랐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공간에서도 구속당하지 않는, 비자유 속에서 내면의 갈등과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단 내 북한 근로자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귀띔이 들어왔다. "걷고 뛰고 달리면 허기질 텐데, 왜 남측 윤 차장 선생은 아침저녁으로 뛰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남측에서 뭔 일이 있어 이곳에 와서 그걸 견디려고 저리 뛰는 것 아닌가"라는 말까지 돌았다고 한다. 내 귀에 들어올 정도였으니 개성 시내에서 공단으로 출퇴근하는 북한 사람들 눈에는 내가 참으로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대한민국의 자유로운 세상을 그들이 알겠는가. 매일 아침저녁 흙길을 달리며 느끼는 것은 단순한 운동이 아닌 펜스 안의 생활 제약 속에서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자유였다. 어쩌면 현실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의 내면에서 평화를 찾고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그 깨달음은 차가운 개성공단의 겨울 속에서 내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 차장

현 건양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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