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1188일의 기억] 개성전문대학 북측 여직원을 채용하며 (7)
다행히 당초 6개월 개성공단 현지 근무에 1주일 휴가라는 조건은 과거 KEDO 복무 지침에서 원용한 것이라고 했다. 거리상으로 개성공단에서 서울까지 60~70km, 한 시간 거리였기에 대부분의 입주기관들이 격주로 서울 집에 다녀올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다행히 은행 또한 타 기관과 유사하게 조정되어 숨통이 다소나마 트이는 듯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소위 북한 보위부 소속의 '초엘리트'라고 불리는, 아주 미남이고 유머 감각도 뛰어나다고 소문난 나운석 참사가 종종 은행을 방문했다. 남북 회담으로 서울에 자주 다녀간 그는 나름 국내 정세에 익숙했던 터라, 우리은행이 개성공단에 입점을 '아주 잘했다'며 여직원 두 명을 채용해 달라는 말을 에둘러 요청했다.
"윤 선생, 그 은행에 돈도 많은데 그래도 은행 업무 할 두 명은 있어야 되지 않겠습네까?"
"나 참사 선생, 아직 기업들 공장도 땅을 파지 않았고, 우리 주재원 직원 두 명도 할 일이 없어 놀고 있는데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나 참사의 집요함은 끝이 없었다. 2~3일 간격의 방문과 요청에 우선은 청소 또는 지점에 방문하는 손님을 위한 차 심부름 정도로 채용하고, 두 명은 안 되고 한 명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의 본심은 어찌 보면 우리 주재원들의 동태 파악이 우선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꽃인 은행 업무의 흐름과 향후 늘어날 기업의 세금 등 각종 공과금 및 북한 근로자들의 급여를 어떤 형태로 지급해야 할지, 남이나 북이나 사전 준비하고자 함이 있었음을 나는 느끼고도 남았다.
그리고 다음 날, 붉은색 계통의 상의를 입은 그녀가 나 참사와 함께 왔다. 드디어 남남북녀, 작은 '금융 통일' 가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김명옥, 개성 전문대학 졸업자였지만 자칭 입학 및 졸업 모두 수석으로 했다는데 졸업장도 신분증도 없었다. 그저 북한의 관리자가 우리은행에 가서 근무하라고 지시하면 받아야 하는 구조였다. 해외에 진출한 여타 해외 지점과는 다른 북한의 특수성이었기에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 보면 김명옥 또한 남측 우리은행 직원으로 근무하라는 숙명일지도, 팔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대한민국 우리은행 개성공단 지점에서 근무할 팔자였으니 한 가족이 된 것 아니겠는가.
나는 하루 한 가지씩 금융 용어를 학습시키고 예금, 대출, 환율, 수수료 등 금융의 기초 지식과 금융 시스템을 전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연수부에서 신입 직원 연수 교재를 들고 와 하나하나 알려주는 인재 양성 또한 나의 임무였다.
1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자, 그녀의 비상한 두뇌와 암기력과 지식 습득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주장을 펼 때는 앞뒤 안 보고 강하게 어필하는 모습은, 어찌 보면 호랑이 새끼 한 마리를 키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개성공단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업무를 넘어선, 낯선 환경 속에서 관계를 맺고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었다.
필자 당시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 차장
현 건양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경영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