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사남'과 영월군수 윤순거의 '노릉지'

by 윤석구

[영화 '왕사남'과 영월군수 윤순거의 '노릉지'] <좌충우돌 인생2막 88호. 2026.3.12>


- 명재 윤증의 큰아버지 '동토 윤순거'선생 노릉지 간행 후

30년 만인 1691년 사육신 복권, 7년 뒤인 1698년에는 노산군의 묘호를 단종으로, 능호를 장릉(莊陵)으로 추봉


왕과 사는 남자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 33일 만에 누적 관객 1,100만 명을 돌파했다. 단종이라는 이름 석 자가 다시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다.

두 달 전 대만 여행 후 강남역 인근 일일향에서 자장면 뒤풀이 자리가 파한 뒤, 긍촌 선생의 제안으로 인근 던킨도너츠에 둘러앉았다. 커피 한 잔씩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던 중, 조 총재께서 이 영화 이야기를 꺼내셨다. 세조의 정권 찬탈, 단종의 청령포 유배, 사육신의 충절, 결국 하늘나라로 향한 단종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역사의 강으로 흘러들었다.

나 또한 그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동대문 낙산 언덕의 동망봉(東望峰)이 떠올랐다. 2018년 현역 재임 시 성북동대문 영업본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보문동 뒤편 낙산 언덕에 자리한 동망봉을 찾은 적이 있다. 영월로 유배된 단종을 그리며 왕비 정순왕후가 매일 아침저녁 정한수를 떠놓고 안녕을 기원하던 바로 그 언덕이다. 지금도 성북구에서는 해마다 왕비를 기리는 추모제를 올린다. 그 이야기를 일행에게 전하며 동망봉에서 장릉까지 이어지는 단종의 흔적을 함께 더듬었다.

그리고 어제 영화관을 찾았다. 스크린 속 단종은 비극적 소년이면서도 인간적 체온을 지닌 존재로 살아 있었다. 1441년에 태어나 열두 살에 왕위에 오르고, 열다섯에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열일곱에 영월 청령포에서 생을 마감한 단종.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시신을 홀로 수습하여 밀장(密葬)하는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패자의 역사는 사멸하지 않는다. 충직한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며 살아남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 이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파평윤문 논산 노성종중 종학당(宗學堂)의 창설자, 명재 윤증의 큰아버지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1596~1668) 선생이다. 동토집을 직접 읽으며 선조의 행적을 살펴본 후손으로서, 선조를 미화하려는 뜻이 아니라 『노릉지』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이 자리에 옮겨 적는다.

동토 윤선거 직계 후손 동춘 윤흥식 선생 소장 노릉지

동토 선생은 영월군수로 부임하자마자 직접 노릉을 참배하셨다. 그러나 단종 사후 210년이 지났건만 관리 상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선생은 노릉 수호 암자인 지덕암(地德庵), 현재의 금몽암(金夢庵)을 중수하고 스님을 들여 노릉을 보살피도록 하셨다. 몸으로 먼저 충절을 실천하신 것이다.

이어 관아에 소장된 노릉록(魯陵錄)을 펼쳐 보니 "완전히 아전들이 다루는 서류철 수준"에 불과하였다. 선생은 탄식하며 붓을 드셨다. 비문과 추강집, 동학사 혼기, 순흥야사 등 무려 40여 편의 문헌을 두루 모아 사실·전묘·사묘·제축·제기·부록의 육편으로 정연하게 엮어 『노릉지(魯陵志)』를 편집하셨다.

그 내용은 방대하고 치밀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의 전말과 양위의 경위, 성삼문 등 복위 거사가 밀고로 실패한 경위를 낱낱이 밝혔다. 단종에게 목숨으로 충절을 다한 사육신(死六臣)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와 벼슬을 버리고 절의를 지킨 생육신(生六臣) 김시습, 원호, 조려, 성담수, 남효온, 이맹전을 비롯한 열일곱 충절 인물의 행적도 하나하나 기록하였다.

발문에서 선생은 단호하게 썼다. "만약 육신의 절의를 승인하고 원통함을 씻어주어 군신일체의 의리를 밝힌다면, 이는 실로 성조의 아름다운 일이자 천고의 풍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그 말을 남겼다.

그 한 권의 책이 역사를 바꾸었다. 『노릉지』 간행 30년 만인 1691년 숙종은 사육신을 복권하고 제사를 허락하였다. 7년 뒤인 1698년에는 노산군의 묘호를 단종으로, 능호를 장릉(莊陵)으로 추봉하였다. 조정의 논의에서 그 논거로 인용된 것이 바로 『노릉지』였다 한다.

영월군수로 부임하여 몸소 노릉을 보살피고 흩어진 기록을 모아 역사의 진실을 세상에 알린 선생의 붓끝이 씨앗이 되어 마침내 역사의 꽃을 피운 셈이다.

1,100만 관객이 스크린 앞에서 단종을 향해 울었다. 그 울음의 연원 한 자락에 선조의 얼이 닿아 있음을 생각하니, 후손으로서 작은 자부심과 깊은 추념이 함께 밀려온다.


영화 에필로그 자막 한 줄에 『노릉지』의 사연이 실렸더라면 더없이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없지 않지만, 오늘 부족한 이 글이 그 한 줄을 대신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동토 선생의 직계 후손 동춘 윤흥식 선생님께서 조만간 영월로 향하신다 한다. 빈자리 있으면 동승하여 단종의 장릉 앞에 국화 한 송이 함께 바치고 싶다. 동토 선조님 덕에, 노산군이라는 굴레를 쓰고 이름 없이 묻혔던 어린 왕이 단종(端宗)이라는 묘호를 되찾고, 엄흥도가 홀로 거두어 밀장한 그 초라한 무덤이 마침내 장릉(莊陵)이라는 왕릉의 이름을 얻었다.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했던 사육신은 충신으로 복권되어 사당에서 제사를 받게 되었다. 노산군으로 강봉된 지 241년 만의 일이었다. 영월군수 소임을 참으로 잘 하셨다고, 장릉 앞에서 추모의 마음 함께 드리련다.

그리 멀지 않은 날, 낙산의 동망봉도 다시 찾으련다. 80평생 한 많은 삶을 사신 정순왕후께도 아뢰고 싶다. 이제 수많은 후손이 당신의 삶을 모두 기억하오니, 두 발 쭉 뻗고 편히 주무시라고. 언젠가 홀로 계신 사릉(思陵)에서 장릉(莊陵)으로 합장하여 두 분 손잡고 함께 영면하시기를 삼가 기원드린다.

꽃우물에서 건양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윤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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