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년 새해 첫날(2005. 1. 1) 해돋이를 (9)

by 윤석구

[개성공단 1188일의 기억] 을유년 새해 첫날(2005. 1. 1) 해돋이를 보며 (9)

"담담(淡淡)한 마음을 가집시다."
"담담(淡淡)한 마음은 당신을 굳세고 바르고 총명하게 만들 것입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어록. (개성공단 현대사무소)


정주영 회장님의 담담한 마음을 갖자는 어록을 북한 개성공단 현대 사무소에서 보았다. 정 회장님의 담담한 마음이란 말이나 행동이 정직한 상태를 의미하고, 담담한 마음을 가져야 당당하고 굳세고 의연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을유년 새해 닭띠해의 신태양이 군사분계선 너머 둥그렇게 떠올랐다. DMZ이라는 철책으로 분단되어 있어서 그런지 날씨가 맑은 날이면 도봉산도 훤히 보일 정도로 개성공단은 정말 가까운 거리다.

연말 겸 주말 근무 당번이고 의미 있는 새해 해돋이를 보고자 카메라를 들고 모자를 깊게 쓰고 한참 공단 부지가 조성 중이지만 그래도 언덕이 있는 공사장 위로 올라섰다. 같은 마음이었던지 현대아산 직원 두 명과 북한 여성 근로자 한 명이 비슷하게 도착했다. 어둠을 뚫고 저 멀리 남녘에서 붉은 태양이 솟아오른다.

나도 모르게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대한민국의 기술과 자본, 북한의 노동력이 결합된 이곳 개성공단의 남북경제협력사업이 본격적으로 개발·성장되는 2005년 을유년 새 아침이 밝아옵니다. 우리은행도 본연의 개성공단협력사업의 금융기능에 혼신을 다하겠습니다. 통행이 자유롭고 인터넷이 연결되는 등 통신이 원활하고 CIQ 통관이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신의 가호가 함께하여 무궁히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리고 그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정주영 회장님 말씀처럼 담담한 마음을 갖도록 천지신명이 지켜주소서!
간절한 마음의 기도를 함께 드렸다.

신년 해돋이 감상 후 숙소로 돌아와 CD를 꺼내 음악을 들으며 3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홀로 신년휴일을 보냈다. 조수미의 '기차는 8시에 떠나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 피가로의 결혼 2막 "여인들이여 사랑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등의 CD 음악과 북녘땅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DVD를 통해 영화 감상을 했다.

동족 간의 총부리를 겨누며 죽이고 죽이는 장면은 너무도 끔찍했다.
형제간의 우애를 그리는 내용보다는 북한 땅에서 보는 영화이기 때문인지 마음이 보통 심란한 것이 아니었다. 두 번 다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지도자 간의 머리싸움으로 정치적 불행이 오지 않기를 기원할 뿐이었다. 혹시 모를 북측 세관의 검색을 예상하여 어렵게 갖고 왔던 '태극기 휘날리며'.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감상하지 못했지만, 오늘 이 영화를 이곳 북녘에서 볼 줄이야.


남남북녀. 현지에서 뽑은 은행원 김명옥 동무와 윤석구 당시 우리은행 차장(필자).


태극기 이야기가 나왔으니 태극기와 관련된 한 가지를 소개한다. 지점 객장 안에는 환율, 북한말로 환자시세 고시판이 있다. 원화 대 달러, 위안화 및 유로, 일본 엔 등을 고시한다. 개점을 하고 2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개성공단관리위원회 소속 북측 간부인 참사가 잠깐 보자고 했다.

"우리 공화국에 있어서는 안 될 게 은행에 있어요. 윤 선생, 그게 무엇인지 압네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알 리가 없고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잘 모르겠으니 알려주세요."


"꼭 그것을 말로 해야 알 수 있는 것입네까?"


"아니, 모르니까 모른다 하는 것 아닙니까?"


"거참, 거참..."


아마도 본인도 말은 꺼냈지만 강하게 말하기 애매했던지, 그러다가 하는 말이,

"아니, 어떻게 공화국 땅에 남측 국기를 버젓이 걸어놨다는 말입니까?"


"아니, 무슨 대한민국 태극기를 걸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그제야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환율고시판에 5개 나라 국기 모형이 있음을 트집 잡은 것이었다. 그랬다, 그들은 그런 부분에 너무도 민감했던 것이다.

"참사 선생, 당신네 평양의 무역은행, 대성은행 등에서는 환자시세(환율)를 고시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현재 우리은행 개성공단 지점은 입주기업과 주재원을 대상으로 업무 하는 것이지 북측 근로자를 대상으로 업무 하는 것 아니잖습니까. 다른 말하지 말고 인터넷이나 빨리 연결하여 은행도 기업들도 제품 디자인 등 실시간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건의나 더 많이 하세요."

"그건 내 소관 아니고, 다음에 올 때 그 남측 국기 보이지 않도록 잘 정리하시오."

작은 일상의 디테일 속에서도 드러나는 남북 관계의 미묘한 긴장감. 담담한 마음으로 시작한 새해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흘러갈지, 그 희망과 우려가 교차하던 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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